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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JH공모 작가선정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공휴일_10:30am~06:00pm
제이에이치갤러리 JH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인사갤러리빌딩 3층 Tel. +82.2.730.4854 www.jhgallery.net
사진이 근본적으로 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라면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가공(加工)된 사진은 사실에 대한 신화적 기술이라고 생각 한다. 사진을 이용한 나의 작업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종교와 모든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개인적 의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된 하나의 피사체를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이미지를 겹치는 작업으로 사진의 사실성을 해체하고 복잡한 패턴들로 변화 시켜 그 과정 안에서 나타나는 낯선 하지만 낯익은 무의식적 이미지에 각자의 주관적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레이어에 얹혀진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각적이고 다양한 관점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진들은 파편화된 주관적 사실들이며, 이러한 하나의 사건에 대한 관점들이 합쳐졌을 때 역사는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며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구속의 장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조작되어진 데칼코마니 된 사이 공간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 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시각적 모순 상황은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사실성을 담보로 현실을 넘어 초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가상의 현실은 실재가 되고 실재는 다시 가상이 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논의는 의미 없어 보인다. 진실은 계속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모호함이 곧 진실에 대한 본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진실)를 가시화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려하는 시각의 편협성, 기억의 단편성이 만들어낸 주관적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 안유종
모호함 – 궁지(窮地) ● 막다른 길목과 망망대해를 마주하는 느낌은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나 정 반대이다. 하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작가가 사회 참여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그의 그림에서 시대의 내면을 바라본다. 안유종의 작품은 '망망대해가 그려진 벽'이다. 아니 탁 막힌 벽에 드넓은 바다의 영상이 비춰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 같다. 세상은 사람들을 벽으로 내몰고 있다. 준비 안 된 자들에겐 세상은 두꺼운 벽처럼 차갑고 막막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정체하기엔 불안이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기에 '혹시'라는 모호한 열정으로 그 벽에 부딪친다. 아프겠지만 '긍정'이라는 마취약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그 벽을 더듬는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위로하기 보다는 오히려 벽을 보지 말고 그 너머를 보라며 그들의 얼마 안 되는 쌈지 돈에 빨대를 꽂는다. 꿈을 이용한 마케팅은 자기소모적 생태계를 만들며 그렇게 굴러간다. 밤의 별이 더 빛나던가? 실패가 클수록 희망은 더 찬란하고 또다시 부딪칠 준비를 한다.
손을 뻗어 만져보면 벽인데 눈앞에는 대양이 펼쳐진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한 몸에서 느끼게 되면서 손과 눈은 협응이 되질 않고 토글 되는 의미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당황하며 침몰한다. 벽만 바라보며 얻은 근시안은 저 먼 수평선은 그저 신기루일 뿐이다. "경험을 토대로 한 기억의 기록을 역사라 한다면 역사란 다분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긴 어렵지 않을까. 그것은 사실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기도하고 왜곡되어 때로는 선전 선동의 목적으로 또는 신앙의 대상으로써 우리 앞에 진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기억의 모호성으로 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작가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기억의 모호함에 근거한다고 하고 그것을 운용하는 권력을 가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해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젠 소수에 의해 쓰여지는 그런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진실을 왜곡하는 조작의 권력은 아마도 힘없는 개인을 숙주로 삼아 정신 분열적 모험을 하는 듯하다.
이제는 힘 있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조작한다. 이율배반의 정보는 선택을 위한 결정을 한없이 유보시키고 따라서 무기력해진 개인은 사회적 위치를 상실하고 항상 궁지에 몰린다. 휴학을 연장하고, 부모의 집이 나의 평생 보금자리고, 월급을 줄여도 끈질기게 불평하며 붙어 있다. 이런 상황이 자연스러워 지고 학습되면 명쾌한 윤곽선으로 다가오는 의미는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한사람만의 조언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의 모습보다는 그것이 무엇을 하려는 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피카소는 사물의 본질을 보기위해 사물의 여러 면을 하나의 대상에 조합하여 보기에는 불편하지만 진실의 문을 열려고 했었다. 작가는 사람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선 어지럽지만 정보를 중첩시켜 그 궤적이 만드는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모습 보다 그 사람의 행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무슨 기업이 아니라 그 기업의 가치 변화에 더 주위를 기울인다. 주식 시세표를 보며 울고 웃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조작된다. 뒤샹의 미래파 중첩 이미지는 움직임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지만 작가는 가치의 방향을 쫓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모호함이 몰아가는 궁지에 대한 답으로 오히려 작가는 모호한 이미지의 작품을 제시한다. 다만 보는 시각을 '관람'이 아닌 '주시'를 요구한다. 현란한 변위 속에서 중심을 잡아가고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왜 그곳이 그 상황에서 중심이 되는가? 이번 전시도 안유종은 관객을 힘들게 한다. ■ 류제원
Vol.20120802f | 안유종展 / AHNYOOJONG / 安唯鍾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