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Life

이성희展 / LEESUNGHEE / 李星暿 / photography   2012_0720 ▶ 2012_0802 / 월요일 휴관

이성희_No.11 (black dogs)_라이트젯 프린트_80×8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121e | 이성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72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온 GALLERY ON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B1 Tel. +82.2.733.8295 www.galleryon.co.kr

"나는 왜 이것을 이리도 보고 있는 걸까" - 이성희의 Still Life ● 우리말엔 아직 사진을 찍는 행위(photography)와 사진(photograph)을 구분하는 용어가 없다. 이 언어의 부재는 담론의 부재다. 우린 '사진'을 종이 한 장이나 디지털 스크린에 찍힌 이미지 그 결과물 자체로 인식해왔을 뿐, 사진 찍는 행위에 대한 관심이나 그 문제성을 가지고 토론을 해야 할 필요성을 그만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사진 찍는 행위를 예술로 여기는 사람에겐 이 언어고갈이 더욱 안타깝다. ● 사진의 행위적 의미, 즉 포토그래피를 먼저 떠올려보자. 이성희는 이번 기획전 Still Life를 놓고 "이 바라봄이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나의 상실을 혹은 내 연민의 시선을 대신하는 듯"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라봄'이란 사물을 보되, 눈에 보이는 것이 반드시 카메라 렌즈에 비쳐진 사실과 필연적 연관성을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우린 종종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걸 본다고 하듯 그 바라봄이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 주관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선택한 대상이 피사체로서 반드시 그 주관적 가치를 잘 반영하는 건 아니다.

이성희_No.6 (things)_라이트젯 프린트_80×80cm_2011
이성희_No.1 (rocks)_라이트젯 프린트_60×60cm_2012

감정을 느껴 찍는 것과 감정을 느끼게 찍는 것의 차이는 크다. 감상자의 입장에선 물론 후자가 더 중요하다. 여기선 사진의 행위적 의미인 포토그래피보단 결과물로서의 사진이 그 가치를 부여한다. 작가가 셔터를 누르며 무엇을 느꼈는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감상자로서 작가가 느낀 점을 공감하려는 노력이 작품을 보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사진 자체가 창조해내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사진 속에 포착된 어떤 사건이나 상황, 또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감상자로 하여금 스스로 불러일으키게 해야만 한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프레임에 담기면 그것은 단지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감정이 깃든 사물로서 삶의 단면을 품게 된다"는 이성희의 제안은 매우 흥미롭게 들린다. 사실 사진이 가진 내재적인 감정이 있다면(주제를 막론하고) 그것은 상실감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실체의 부재를 전제한다. 예외가 없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이미지는 지금 여기 없는 그것을 영원히 불러 일으켜 주는 저승의 메신저다. 과거가 보낸 독촉장이다. 그렇다면 상실이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을 주제로 제시한 이성희의 사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

이성희_No.3 (yellow pot)_라이트젯 프린트_60×60cm_2009

1) 무인 ● Still Life의 사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중 하나는 인간이 지나간 흔적이 있되,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상자가 인물을 상상해서 삽입하기엔 좀 부담스러워 보인다. 오래 버려진, 더 이상 인기척을 기대하기 어려운 폐허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사진은 실체의 부재를 전제한다고 했는데, 이 경우 이성희는 인물을 아예 빼버려 실체와 이미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간접적 상실감은 배제한 대신, 빈 의자, 깨진 유리창, 부서진 책상, 백보드 없는 농구대 등 직접 사물 그 자체의 이미지를 이용한다. 놀라우리만큼 꾸밈없고 정직한 이 시도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2) 회복 ● 그런데 여기서 우린 무인폐허라는 상실감을 뒤엎을 수 있는 요소를 발견한다. 이 사진들의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식물이란 생명이다. 인간이 버리고 간 흔적을 두고 폐허라고 한다면, 그 자리를 덮어가는 잡초의 번식은 사필귀정 자연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질서에서 자연의 질서로 돌아갈 뿐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상실'이 아니라 회복이다. 3) 상실, 그 성공적인 예 ● 그렇다면, 상실의 감정을 작품화 하고자 한 이성희의 의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예는 화분시리즈가 아닌가한다: No.2(Flowering Plants),2012 그리고 No.3(Yellow Pot), 2009. 먼저 여기서 '상실'이라함은 화분이란 인위성이 주는 상실감이다. 그 인위성의 배경 설정도 효과적이다(원근법의 의도적 회피와 벽을 이용한 평면 구성). 상실감을 자아내되 전혀 센티멘털하지 않다. 감정의 승화를 가능케 하는 게 예술의 진정한 역할이라면 이성희는 여기서 그걸 이루었다. ■ 홍진휘

이성희_No.5 (the shade of a tree)_라이트젯 프린트_80×80cm_2012

버려진 듯 놓여있는 화분, 한참을 돌보지 않았는지 메마르고 파리하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사물들의 초상은 참으로 볼품 없고 초라하다. 무관심 속에서도 번식하는 식물들처럼 죽어가는 듯하지만 살아있는 이 사물들에 생기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사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그 외연이 달리 보일 뿐이다. 한때는 대통령의 별장까지 있었고 내 어린 시절엔 유명 관광지였던 그곳의 풍경은 이젠 빛바랜 오렌지 빛이다. 인적 없는 그곳엔 여전히 관광객을 기다리는 호텔과 식당이 늘어서있지만 오랜 낡은 간판들은 곧 꺼질 듯 불안하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가본 여행지에서의 낯선 붉은 네온 불빛과 그때서야 처음 먹어봤던 노란색 바나나로 선명히 기억되는 그곳은, 이제는 오랜 세월 쇠락해온 풍경에 날근날근하고 색 바랜 사물들까지 더해져 공허하기 그지없다. 어쩌다 그곳을 지나치게 될 때면 그런 그곳의 경관은 번번히 나를,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몇 번이고 그냥 지나쳤던 길, 그곳을 멈추어 서서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여다본다. ● 나는 왜 이것을 이리도 보고 있는 걸까. 내 삶의 주변과 여행지에서 마주한 비루한 이러한 대상들은 단순히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 대한 나의 취향 혹은 기억만을 환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시선에 우연히 들어와 나를 잡아 끈 이 사물들로 인해 의도하지 않았던 모호한 생각의 고리가 이어지기도 하고, 이 바라봄이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나의 상실을 혹은 내 연민의 시선을 대신하는 듯하기도 하다. 무심한 듯 외면하려 했지만 왠지 가슴이 슬쩍 긁힌 듯한, 둔한 쓰라림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가, 다음에 마주할 땐 작고 묘한 들뜸이 들기도 한다. 아주 이런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마주하는 순간에 말이다. ● 사진 찍는다는 행위는 그 사이에 있다. 스쳐 지나치거나 무시될 수 있었던 사물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어 특별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진의 프레임 안에 들어옴으로써 매우 평범한 일상적 사물은 시각적인 의미를 지닌 특별한 그 무엇이 된다. ● 더욱이 이것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사라져가는 어떤 것이기에, 곧 사라지고 잊혀질 이 사물들에 대한 연민은 그것들을 이미지로 부여잡고 다시 그것에 새로운 생기와 의미를 부여하고 싶게 한다. 프레임에 담기면 그것은 단지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감정이 깃든 사물로서 삶의 단면을 품게 된다. 비연속인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삶의 모습을 이루는 것처럼, 이 이미지들은 모여 더욱 큰 내러티브를 드러내 보인다. 이 이미지들에서 나는 내 삶의 정서의 경관을 본다. ■ 이성희

Vol.20120720h | 이성희展 / LEESUNGHEE / 李星暿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