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ERIOR

2012_0719 ▶ 2012_0810 / 월요일 휴관

이예린_Concerto no.1_캔버스에 유채, 첼로, 모터, 실_150×150×150cm_2011

초대일시 / 2012_0719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승영_남은경_배민경_이예린_최종운_홍남기

워크숍『거울 속의 방(A mirror in the room)』 일시 / 2012_0719_목요일_05:00pm 발제 / 연미정_박정연

기획 / 박정연 (www.lapis-vitrine.net) 후원 / 마중물재단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0길 4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래?" / "그건 어딜 가고 싶은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고양이가 말했다. / "어딜 가고 싶은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앨리스가 말했다. / "그럼 어느 길로 가든 상관 없네, 뭐" (루이스 캐롤(Lewis Carrol),『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지도는 땅의 표식이 되지만 풍경의 의미들을 담지는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말처럼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길이 나는 것이라면, 앨리스에게 지도 위의 표식들은 어떤 의미들을 지니게 되는가? 의미론자 코르지브스키(Alford Korzybski, 1879-1950)는 "지도는 영역(영토)이 아니다 the map is not the territory" 라고 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불려지는 것들은 불려진 대상과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떠한 구별을 위해 이름을 폐곡선으로 삼아 사물들을 세계로부터 개념화한다. 안과 밖을 구별짓는 폐곡선의 경계를 통해 사물에 내재하는 인테리어(Interior)라는 개념의 공간과 엑스테리어(Exterior)라는 불려진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의 외부로 나눌 수 있다. 세계는 이렇게 단지 하나의 원으로도 표현 가능하다. 그러나 이름은 사물이 아니고 우리는 같은 지도를 보면서도 다른 그림들을 상상한다. 하나의 지도를 바라보며 다른 풍경을 떠올리는 동상이몽의 다름이 바로 개인의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로의 소통을 조율하게 하는 또 하나의 거리두기가 되는 것이다. 그 거리 혹은 틈(간극)이 바로 상상력의 공간이자 타자와 소통하는 단초가 된다. 자신만의 정원을 꾸미는 푸른 눈의 새 - 새틴 바우어(Satin Bowerbird)는 배치를 통해 사물들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한다. 나뭇가지 등을 엮어 대칭형의 정원을 만들고, 길 가의 꽃잎, 병뚜껑과 같은 사물들을 물어와 자신만의 정원을 장식하는데, 이 때의 사물들은 용도가 아닌 하나의 표식으로 그 곳이 새틴 바우어의 정원임을 알린다.『EXTERIOR』展 역시 아트라운지 디방이라는 전시 공간 안에 일상적 사물들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배치되는데 그것으로 인해 작품들 간의 그리고 전시 공간에 의해 발생하는 새로운 관계망이 보이지 않는 원 그리기를 함으로써 누구의 방이었을지 모르는 공간으로의 방문 혹은 낯선 곳에서 지도를 펼치듯 관람객 자신 고유의 시선으로 공간과 작품, 그리고 작품과 관객 자신 사이에 떠도는 어떤 사물의 이름과 그 외부의 것들을 꺼내어 올리게 할 것이다. 여섯 개의 방 ● 에셔(Maurits Conelius Escher)의 석판화「Relativity(상대성)」(1953)에서 각각의 방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놓여져 있다. 방을 연결하는 계단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거꾸로 서있게 된다. 어느 곳 하나 분명한 출구는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각각의 출구들이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즉,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그리고자 한다면 논리를 상실하지만, 각각의 방들을 떼어놓고 보았을 때에는 바르게 놓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집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공간인 아트라운지 디방에는 여섯 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 각각의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 여섯 개의 방들은 에셔의 그림 속에 나와있는 방처럼, 전체적인 맥락이 아닌 주체적인 의미들로써 서로들을 엮는다. 이것은 하나의 위상공간(位相空間)-위상공간이라는 개념은 기하학적 도형 개념의 일반화로 파악될 수도 있다. 그 일반화를 통해 우리는 공간 내에서 도형의 부분들의 정확한 위치나 크기 같은 특성들에서 벗어날 수 있고, 부분들의 상호 배치에만 전념할 수 있다.-처럼 사물의 부분들이 정확한 위치나 크기와 같은 물질적 특성에서 벗어나 부분들의 상호 배치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남은경_보다-긴서랍_스테인리스 스틸_174×112.5×28cm_2006

처음의 방 ● 서랍장을 모티프로 작업한 남은경의「보다-긴서랍」(2006)은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세계를 투영한다. 평면을 전제하는 유클리드 기하학(Euclidean Geometry)에서는 3차원 공간 내에서 그 직선과 평행한 하나의 측면만을 허용하지만, 리만 기하학(Riemannian Geometry)은 비어있는 구(球)를 통해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공간을 설명하고, 평면에서 허용되지 못한 여러 측면들을 허용함으로써 다양한 공간을 인정한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우주가 중력에 의해서 휘어 있음을 보였다.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의 공간에 대한 기초 이론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찾았다. 평면을 전제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는 달리, 리만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다루면서, 공간 자체의 성질을 점 사이의 거리로 정의하여 휘어진 공간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눈의 인식은 공간의 감각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공간의 감각을 이용한 것 중의 하나가 트롱프뢰유(Tromp l'oeil)이다. 안드레아 포조(Andrea Pozzo, 1642-1709)가 건축한 예수회 교회(Jesuit Church, Vienna)의 천장화는 트롱프뢰유 기법을 사용하여 그려진 것으로 시점에 따라 평면의 천장으로부터 입체의 돔(Dome)을 볼 수 있다. 어느 위치에 서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인 3차원의 '돔'이 현실의 이미지인 2차원의 '천장'을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지닌 눈의 계산법으로 일일이 모눈종이에 작업을 구상한 후 정교한 모형 제작을 거쳐 마침내 실제 작업이 만들어지게 되는 남은경의「보다-긴 서랍」(2006)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련된 자리에서 3차원의 가상 이미지인 세 개의 서랍이 공간을 향해 열리게 된다. 더불어「보다-다섯개의 방」(2012)에서 문 뒤로 펼쳐져 있는 파란 색면은 두 개의 영상을 합성하는 기술인 크로마 키(Chroma-key)처럼 현실의 공간과 문 너머의 공간을 연결 짓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자리한다.

홍남기_Flexible_사운드, 컬러, 비디오 설치_00:05:07_2010

두 번째 방 ● 남은경이 시야 바깥의 것들을 시야 내부로 끌어오는 것과는 달리, 홍남기는 어떤 행위의 배경을 시야 바깥으로 몰아낸다.「flexible」(2010)은 실제 상황을 촬영한 후 그것을 다시 아날로그 텔레비전 안에 담는다. 이 때 필름 속의 배경은 하얗게 지워진 채 집을 짓는다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인물의 행위만이 증식되어 화면 안에 채워진다. 위상수학에서는 집합의 부분들인 열린 집합(위상)들이 개별적으로 정의된 모든 공간이 되어 수렴, 연결, 연속과 같은 형식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구조가 되는데,「Flexible」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바로 하나의 위상이 된다. 즉,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영역이 되고, 동시에 다른 상황들을 수렴, 연결, 연속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두드리는 모습의 인물은 다른 상황들에서 각기 다른 의미들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단어장 속의 단어들처럼 문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열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맥락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어떤 문장에도 삽입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이 잠재되어 있는 어떤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운_A storm in the black_코카콜라, 알루미늄, 모터_30×100×100cm_2006

세 번째 방 ● 그렇다면 의식의 바깥에서 이 공간을 상상의 장소로 변모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축과 가구는 구조와 장식, 안과 밖이라는 대립 속에서 공간을 가르고 분리하는 기능을 하지만, 이 곳으로 들어온 가구들은 스스로의 주체성으로 인해 그러한 대립 관계에서 벗어나고, 공간은 기표들이 떠도는 상상의 장소가 된다. 최종운의「A storm in a teacup」(2006)의 테이블은 어떤 상태를 이 곳으로 지속하기 한 장소가 되고, 찻잔은 지나간 순간들을 분리하여 그 안에 머무르도록 한다. 모터와 자석을 이용해 찻잔에 담긴 잉글리시 티가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표현하는 바는 작품 제목과도 동일한 영국 속담 "A storm in a teacup"과는 대치된다. 영국 속담의 경우 소소한 일로 큰 소란을 피운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최종운의 작품은 오히려 침묵 혹은 부재가 떠오르게 된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R. Hofstadter)는 메시지에는 틀 메시지, 전달되어야 할 내부메시지, 내부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한 구조인 외부메시지 등 세 개의 층위가 있다고 하였다. (더글라스 호프스태더『괴델, 에셔, 바흐』p218 인용_박여성 옮김_까치글방_2010) 최종운의 테이블과 찻잔은 틀 메시지로, 제목이기도 한 영국 속담 구절은 외부 메시지로써, 마지막으로 최종운이 전달하고자 하는 고요한 긴장감은 내부메시지로써 자리한다. 차를 마시는 인물들은 사라졌지만 대신 공간적 요소들로써 전시장이라는 영역과 움직이는 찻잔 등은 새롭게 관계를 맺는다.

이예린_Lingering Dinner Table, 머리카락 드로잉_설치_2007

네 번째 방 ● 이예린의「Lingering Dinner Table」(2007)에서는 테이블 위에 식기, 포크, 촛대 등이 놓인다. 이때 식기, 포크 등이 모터가 달린 봉에 매달리게 되고, 와인잔 등의 유리잔에는 음의 높낮이를 표현하기 위해 각기 다른 양의 물이 담기게 된다. 모터에 달린 봉이 돌아가면서 식기들은 유리잔에 자연스럽게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게 된다. 식사 시간에 소음(騷音)을 내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자제하여야 했던 식기들은 그 움직임을 통해 음(音)이 되어 연주를 하게 된다. 듣는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맛보는 것과 같이 능동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식탁 위에서의 식기들은 새로운 내부 공간 안에서 일상성이 사라짐으로써, 어떤 음들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정하고, 그 주관성을 통해 전체성으로부터 탈출한다. 「머리카락 악보」(2007)에서 신체의 한 부위로써 긴 시간성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유일하게 선(線)적인 머리카락은 하얀 종이 위에 놓여짐으로써 악보를 그리는 재료가 되고, 음표로써 작가 자신의 눈동자들을 찍은 사진 조각이 그 위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질료성을 벗어난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음의 흐름을 표현하는 기호로써, 그리하여 그 음들이 듣는 것이 아닌 보는 것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하나의 표식으로써 자신의 좌표를 옮긴다. 연주가 불가능한 악보일지라도 기보법 자체로 음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 있다. 현대 음악에서 연주의 기법이나 악기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변화의 다양성과 우연성을 위하여, 악보 자체로 소리를 상상하게 하는 악보가 그것인데, 이예린의「머리카락 악보」역시 연주는 불가능할 지라도, 어떤 음악적 풍경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김승영_기억의방-헌시_혼합재료_가변크기_2003

지하의 방 ● 물리적인 음(音)이 아닌 심리적 매개체로서의 음(音), 즉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소리, 체온, 이미지, 체취 등-은 과거의 영감을 이 자리로 인출하도록 하고, 지나간 상태의 흔적으로 향하는 통로가 된다. 김승영의「정원」(2012)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의자와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외부 공간으로부터 내부 공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바깥의 정원이 아닌 지하라는 있음직하지 않은 곳으로 이동함으로써 하나의 전치(displacement)를 보여주는「정원」은 자신의 용도성보다는 상징성로써 다른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우리는 때로 그 이유를 명료하게 판단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참되다고 확신할 때가 있다. 분명 김승영의 그것은 의자들의 배치일 뿐 누군가의 자취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어있는 자리로부터 새로운 기표와 기의들이 우리로 하여금 의자 너머의 풍경들을 상상하게 한다. 다만, 체온이 사라진 의자 위에서의 막연한 감각들, 즉 관념만 자리하고 실체는 알아볼 수 없는 그러한 결핍들로 인해 우리 의식 속에 뿌리내린 내부의 풍경이 비집고 들어온다. 우리와 관계된 누군가의 자취는 곁에 자리한 다른 관람자와는 공유될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의 풍경들이다.

배민경_Singing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_부분

마지막 방 ● 마지막으로 배민경의「Singing」(2012)은 문지방을 경계로 이 곳이 다른 영역으로 펼쳐짐을 알리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배민경은 평창동 지역을 배회하면서 버려진 시계, 나뭇잎, 작은 돌맹이들을 주워와 시계의 시침에 사물들을 메달아 놓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양철통 안에 넣음으로써, 사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작은 시침소리들만이 들려올 수 있게 하였다. 가벼운 무게의 사물들에 의해 시침들은 앞으로 향하지 못하게 되고 양철통 안에서 같은 시간들을 반복한다. 앞으로 향하지 못하는 시침들이 머무는 방은 이 곳의 다름은 몽상으로부터의 수렴이 아니라 어떤 불면처럼 지상 위에서 지상의 것과 관계를 맺지 않는 멀어짐에 있고, 이 곳의 시계가 이 곳의 계절처럼 반복으로부터 탈주되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혼재되어 있음을 알린다. 이 장소는 시작과 끝처럼, 한쪽의 매듭이 다른 한쪽으로 이어지는 타원의 사슬처럼 이 곳의 좌표와 영역들을 펼쳐놓는다. EX-TERIOR ●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인간의 정신세게를 상징계, 실재계, 상상계로 구분 지으면서, 이미지의 세계인 상징계와 실제적인 세계인 실재계,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으로 상상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아트라운지 디방은 갤러리라는 상징적 공간,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적인 공간임과 동시에 허구와 가상의 세계의 겹들이 배치된 미로 같은 곳으로 변모한다. EXTERIOR의 일상적 사물들은 자신들의 친숙함으로부터 벗어나 그 외부 영역으로의 낯설음을 향한다. 하나의 동그라미. 하나의 영역. 그 외부 영역으로의 이동은 자신의 원형을 간직한 채 벗어나는 최초의 장소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며, '누구'라는 주체로 인하여 주인 없는 집, 그로 인해 주인들이 겹치는 장소로의 변모는 물리적 공간과 상징적 공간의 제도에 기표화된 갤러리 그리고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디방'이라는 갤러리의 변형을 의미한다. ■ 박정연

Vol.20120719d | EXTERIOR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