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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718_수요일_05:00pm_갤러리 팔레 드 서울 초대일시 / 2012_0725_수요일_05:00pm_갤러리 소
2012_0718 ▶ 2012_0724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통의동 6번지 2층 Tel. +82.2.730.7707 www.palaisdeseoul.net
2012_0725 ▶ 2012_0810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소 Gallery SO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빌딩 201호 Tel. +82.2.548.9648
회화적 글쓰기의 다이어그램-'말이 사유의 이미지이듯이, 사유는 사물의 이미지이다.' (조지프 트랩, 시에 대한 강의) ● 종이 위에 그린 글자들, 혹은 써내려간 그림 이건희 작가의 작업을 봤을 때 느끼는 가벼운 곤혹스러움은 작가의 작업을 어떻게 개념적으로 규정해야 할지에 대한 다소간의 난감함이다.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간 그림 같기도 하고, 동시에 종위 위에 그린 글자들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를 그저 말장난 같은 수사학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작가의 작업이 글과 그림, 문자와 이미지 사이의 꽤나 오래된 진중하고도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연결점, 혹은 단서 또한 있으니 작가의 작업이 종이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여느 작가들과 달리 이러한 종이에 대한 접근과 사유가 작업의 중심축을 형성하면서 작업이 가진 스펙트럼과 깊이를 더해갔다는 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 한지에서 출발한 작가는 종이의 기능성, 아니 그 존재론적 위상에 천착한다. 종이의 물성이 갖고 있는 여러 조형적 실험을 거듭하던 작가는 이에 더해 기록매체로서의 종이에 대한 사유를 펼쳐가기 시작했다. 독특하게도 하나의 매체(medium)로서 종이를 사유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도 그다지 놀랄 일 만은 아닐 터, 첨단 매체 테크놀로지의 범람 속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했을 뿐 종이 역시 무언가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주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두께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사람들과 세상을 매개하고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작가가 이렇게 매체로서의 종이를 고려한 것은 기록 및 전달 매체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종이의 변모된 위상 때문인 것 같은데, 그 기저에는 종이가 가진 감각적인 측면, 곧 조형적인 위상과 소통상의 측면도 관련이 있는 듯싶다. 종이는 기본적으로 메시지를 담는 바탕, 그릇이기에 중성적인 위상으로 자리한다. 정보전달의 차원일 경우 정보이외의 요소들은 일종의 노이즈로서 간주되기에 배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정성을 다해 직접 만든 편지 속에는 보낸 이의 애틋한 정성으로 표현된 마음과 그 태도가 함께 메시지와 함께 담겨져 있음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작가 역시 작업에서 소통의 기본적인 기능은 물론, 정보전달에서 배제된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요소들을 주목한다. 배제된 것들을 다시 복원시키는, 일종의 보이지 않았던 것을 다시 가시화시키는 전략인 셈이다. 특히 한지의 경우 캔버스와는 달리 예로부터 글이나 그림을 함께 담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고유의 독특한 물성으로 인해 그 자체의 조형적인 미감이 탁월한 매체였다. 물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근현대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한지의 이런 측면을 부각한 작업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고 작가 역시 작업 초기에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한지가 갖고 있는 한국적인 조형적인 미감과 물성에 주목한 것이다. 직접 한지를 제작함으로 다양한 물성을 실험하는 한편, 의도된 것들과 의도되지 않은 우연, 흔적 등이 함께 담겨지는 한지의 독특한 조형성을 경험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 속에서 작가가 지속적인 관심을 둔 것은 문자와 이미지의 형상성, 조형성에 관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파편화된 종이의 콜라주로 된 작업은 그 자체로 종이의 물성효과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작가는 여기에 문자의 흔적이나 기호의 파편을 연결하여, 비가독적인 기호들이 난립하는 지금의 시대적인 상황을 조형적으로 유비해낸다. 기록매체의 시대적인 변모에 따른 소통의 현재적 상황에 지속적인 관심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과감한 시도와 변신마저 마다하지 않았는데, 당시의 새로운 기록매체라 할 수 있는 디스켓, CD 인터넷 주소들, LED 등을 작업에 끌어들이면서 개념적인 미술의 면모는 물론 공간설치 등의 확장된 미술작업을 더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외시적인 변화일 뿐 그 근간에 있어서는 여전히 문자와 이미지의 문제, 그를 담아내는 소통의 문제에 대한 집중을 놓지 않았다.
문자와 이미지, 칼리그람의 유희 ● 기술발전에 따른 매체의 진화, 수많은 시각 테크놀로지의 포진으로 현대는 이미 넘쳐나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미지로 뒤바뀌어 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동시에 그 모든 이미지들이 또한 의미로 작동되는 문자, 텍스트로 부단히 번역되고 있으니 이미지와 텍스트의 그 오랜 관계는 여전히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이다. 서로를 넘다들며, 간섭하고, 혼융하면서 샴쌍둥이처럼 한 몸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전히 그 사이에는 심연과도 같은 간극이 자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가 예전 같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그림문자, 픽토그램, 칼리그램은 물론 이모티콘과 같은 글과 그림이 혼융된 이미지, 변양태들이 등장하면서 양자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사유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온전한 문자나 이미지가 아닌 그 흔적화 되고 파편화된 양상들이 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관심도 이러한 후기 문자시대, 곧 문자가 의미로서만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화 된 양상까지 가져가면서 발생하는 지금의 소통의 상황들에 놓여 있다. 기록 매체의 변환에 대한 탐색 중, 인터넷상에 떠도는 알 수 없는 이미지, 읽혀지지 않은 문자들을 주목한 작가는 이를 더욱 확장함으로써, 시각적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글과 그림이 혼융된 이미지로서의 문자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 관심을 갖는다.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흩어져 화면을 이루는 「Rebus」 연작들이 그 결과들이다. 때로는 깨알 같은 글자들이 바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글자들이 화면상의 배열로서 조형성을 강조하는 이 작업들은 기본적으로 약호화 되지 못한 기호들의 난립으로 인해 소통조차 어려운 지금의 시대를 향한 것들이다. 동시에 그림으로 그려진 문자라는 의미에서 지금의 문자적 상황이 이미지의 문제와 더욱더 착종되었음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새롭게 달라진 상황 속에서 문자와 이미지의 문제, 의미와 조형성의 문제를 다룬다.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스스로가 표상한 것의, 사물의 보이는 방식 혹은 사물의 본질적인 존재 방식의 직접적인 전사로서 자신을 꾸미는 일종의 글쓰기이며, 그래픽적 기호일 뿐이다.'(W.J.T., 아이코놀로지, 임산 역, 시지락, 2005, p.45) 다시 말해, 기호가 아닌척하는 기호인 것이다. 이미지조차 의미로 소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지의 타자로 여겨졌던 문자 역시도 달라진 지금의 상황 속에서 종종 이미지로 전환되어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칼리그래피,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디자인상의 문제를 포함하여 아이코노텍스트(iconotext)와 같은 제3의 텍스트의 등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가 역시도 작업에서 문자로 작동하는 이미지 혹은 이미지화된 문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미지가 갖고 있는 조형적인 면모에 더 방점을 두고 있긴 하지만, 작가의 관심의 기저에 자리하는 지금 시대의 달라진 소통방식의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중요한 축을 이룬다. 파편화된 기호들이 끊임없이 연쇄하는 지금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소통의 풍경들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의미작용의 끝없는 차연(différance)이나 우리의 지각을 심연으로 밀어 넣는 시니피앙의 공허한 범람들이 문제들이 되겠지만, 작가의 경우 그러한 상황이 엮어가는 문자와 이미지의 자유로운 유희의 측면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나 싶다. 이를 테면 문자와 이미지의 자유로운 유희가 만들어가는 조형적인 상황들, 이미지의 풍경들 말이다. ● 「Rebus」 연작들은 일종의 칼리그램처럼 조형성과 결합된 문자들이 가득한 이미지의 풍경을 보여준다. 직접 제작한 수제 한지 위에 깨알 같은 문자들이 바탕을 이루기도 하고, 의미를 탈각한 문자들이 화면 속에서 배열, 중첩되기도 하면서 산포된다.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떠다니는 전자 매체 시대의 풍경 같기도 하지만 바탕을 이루는 한지의 질감이나 문자 이미지가 갖고 있는 조형성이나 표현성, 배열상의 구성미 역시 마찬가지로 부각되는 작업들이다. 이미지와도 같은 글자들의 자유로운 유희가 엮어내는 구성 자체에서 회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작가의 경우 이러한 구성이 의도된 것 못지않게, 의식과 무의식이 뒤엉킨 작가의 일상의 심적 상태마저 담아내니 그 예기치 않은 조형성은 더욱 도드라진다. 그리고 문자와 이미지들이 서로를 유희하면서 이루어내는 칼리그램의 효과마저 이에 덧붙여지기 때문에 잔잔한 화풍에도 불구하고 이들 이미지들이 발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은 꽤나 극적인 편이다. 칼리그램은 이미지와 문자 사이의 간극을 유희적인 형상으로 지우는 전략이니 말이다. '칼리그램은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복제하기와 분절하기, 모방하기와 의미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들을 놀이로 지워버리려고 든다.'(미셀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김현 역, 민음사, 1995, p.35) 하지만 양자의 간극은 사실 지워진 것이 아니라 서로 환원 불가능한 채 자리하는 새로운 공간을 남기게 되는데, 작가의 작업이 그러한 공간의 한 예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갖고 있는 형상성, 회화로서의 존재론적인 지위 때문이다.
회화적 글쓰기의 다이어그램 ● 기록매체의 변환에 따른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들의 범람 속에서 소통조차 단절일 수 있는 시대적 상황에 주목한 작가였지만, 그럼에도 작가일 수밖에 없었던 법, 작가의 관심은 아무래도 이들 상황이 직조하는 이미지의 특수한 상황에 더 이끌렸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가장 최근의 'rebus' 연작이라 할 수 있는 수제 한지 위에 아크릴로 바탕을 이루고 다시 그 위에 깨알같이 그날그날의 자신의 일상을 일기처럼 써내려간 작업의 경우, 읽을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개념적인 면모들로 인해 지금 시대의 비가독적이고 부유하는 문자의 상황을 유비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빚어진 조형성과 독특한 물성 효과를 직간접적으로 의식하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담겨지게 되는 그때그때의 기분, 무의식 등의 이른바 일상의 아카이빙 작업은 작가의 삶의 태도와 체취마저 담아낼 수 있는 회화 고유의 존재론적인 면모들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기록매체로서의 종이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연동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종이 위에 기록되는 언어란 축적된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체취와 행위의 흔적이 존재하는 사유의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이건희, 문자 작업에 있어 물성과 형상성에 대한 연구, 홍익대 미술학 박사, 2010, p.122) 결국 기록매체로서 종이가 가지고 있는 진정성을 비단 정보의 차원만이 아닌 다감적인 소통이라 본 것 같고, 그러한 위상이 변모된 상황 속에서 이를 잇고 복원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삶의 흔적, 사유의 이미지마저 담아내려 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아울러 지금 수많은 문자들과 이미지들이 난립하여 의미의 과잉과 부재를 반복하는 지금 시대의 흔적들 또한 담아내려 했던 것 같다. 아크릴로 화면 가득 깨알같이 써내려간 글자들의 경우, 옛 종이위의 글씨와는 다른 맛을 풍기는 인공적인 느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 알 수 없는 흔적들, 혹은 그 집적들 자체가 시니피앙의 범람 자체가 지금 시대의 풍경을 이루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매순간의 작가의 일상을 드러낸 작가만의 언어이겠지만 달리 본다면 이는 그저 하나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는, 읽혀질 수 없는 문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순간순간의 심정에 따라 그 형태 또한 달라지고, 또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니 그 자체로 끊임없이 새로운 변형들이 생성되는 지금의 문자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들이기도 하다. 어떤 특정한 의미 전달이 아니라 시대의 흔적들인 셈이고 그런 면에서 디지털 매체 시대라 할 수 있는 지금 시대의 문자와 이미지의 상황을 가시화시키는 다이어그램이라 할 만하다. 동시에 이 다이어그램은 작가의 심적 이미지와 그 상태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들 작업을 하면서 종종 요란한 세파의 아우성조차 잠잠히 여겨지게 될 정도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니 말이다. 마치 동양화나 한국화의 그것처럼 그림 '그리기'를 통해 육화된 감각과 몸의 흔적 또한 작업에 전할 수 있었으니 가능한 일일 것이다. 글씨 속에 그림이 담겨 있고, 그렇게 덧칠된 그림들은 다시 또 다른 알 수 없는 기호가 되고, 이미지가 되어간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그 끝도 없고, 늘 진행 중인채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아니 계속 자라나는 글자, 그림이야 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본다면 작가야 말로, 회화의 존재론적인 측면을 강하게 견지하는 작가일지도 모르겠다. 이를 테면 문자 작업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담지 않은 문자의 조형성에 대해 관심을 두어온 것은 화가로서의 일반적인 관심도 한 몫 하는 것이겠지만 언어나 문자로 의미화 되지 않는 것들인, 형상 자체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인 듯싶다. 이는 의미보다는 감각과 경험을 우선시 하는 것이며, 언어화되지 않는 지각된 세계의 불투명성, 우연성, 환원될 수 없는 차이에 대한 관심과 선호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근작에서 보이는, 작업의 결과 자신도 의도하지 않게 표현된 알 수 없는 형상들이야말로 작가가 부지불식간에 향하려 했던 회화적인 것들의 강한 흔적들이 아니었나 싶다. ● 지극히 개념적인 회화로서 동시대의 문자, 이미지의 상황을 드러내는 작가이지만 동시에 회화의 존재론적인 측면도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기에, 작가는 천생 화가일 뿐이다. 다만 예쁜 그림처럼 보이는 그림을 싫어한다고 하니, 결국 그림을 통해 자신의 세상에 대한 사유의 이미지, 흔적을 부단히 담아내려 노력할 뿐이다. 작가의 회화적 글쓰기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일종의 데리다식의 '에크리튀르(écriture)'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이 때문인데, 의미 체계 속에서 이미 고정된 글이 아닌, 표식, 흔적, 부호처럼 기존의 의미작용을 가로지르는 작가 특유의 문제의식, 무엇보다도 조형적인 면모를 부각하기 때문이다. 이미지 과잉의 지금 시대의 사유는 사실, 언어적이고 동시에 회화적인 기호를 동시에 조작하는 활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야 말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사유의 이미지를 펼치는 사람에 다름 아닐 것이다. 화면의 바탕에 불과하던 종이의 비가시적인 의미들과 조형적인 물성에 주목하여 이를 다시 세상을 향한 소통 매체로 발전시키고, 문자와 이미지를 둘러싼 지금의 시대적 윤곽들에 대한 사유를 계속해서 작업으로 가시화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 민병직
Vol.20120718d | 이건희展 / LEEGUNHEE / 李建羲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