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721_토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성남_김창겸_송윤주_윤현선_이보람 이지현_조현익_한기창_황순일
기획 / 홍성미 후원 / 경기도
관람료 / 대인 3,000원 / 소인 2,500원 경기도민_대인 2,000원 / 소인 1,500원 경기도민 30인 이상 단체관람 시 무료관람
전시 도슨트 / 매주 토, 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일미술관 GAIL ART MUSEUM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삼회리 609-6번지 Tel. +82.31.584.4722 www.gailart.org
'가지 않은 길' 삶과 죽음의 사이 혹은 죽음이 삶에게 ●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가지 않은 길」에서 숲속에 난 두 길에 대해서 언급한다. 시인은 갈랫길에 맞닥트리고 그 중 한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미처 가보지 못한 길을 아쉬워한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되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 중 한 길을 취하고 다른 한 길을 버린다. 그렇게 버려진 길들이 삶의 공백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반쪽일지도 모르고, 결여는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결여를 찾아 존재를 보충하고 완성하려는 기획과 관련이 깊고, 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탐색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가지 않은 길은 사실은 가지 못한 길일지도 모른다. 미처 가보지 못한 길들이 봉인된 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봉인된 길들의 결정판이 죽음이다. 누가 죽음의 봉인을 뜯을 것인가. 누가 죽음으로부터 살아 돌아와 산 자들에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들려주는 죽음의 이야기는 산 자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바꿔놓을 것인가.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고독한 이유가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에 인간은 삶과 죽음의 연속적인 계기를 자연스런 사실로 받아들였었다. 그랬던 것이 인간이 점차 문명화되면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문명의 관성이 맞춰지고, 삶과 죽음과의 연속적인 관계도 덩달아 소원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은 삶에 의해 최고의 금기로 선고된다. 삶과 죽음과의 연속성의 계기가 삶에 의해 깨지고 파기된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장에서 죽음은 깨끗이 사라지고 지워진 것인가. 아직 잔치에 취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죽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죽음은 실재계의 형태로 삶의 깊숙한 곳으로 하강하고, 이따금씩 표면으로 부상해 삶을 불안하게 하고 위험에 빠트린다. 삶의 주군이 죽음임을 주지시키기 위해 이따금씩, 간간히, 그리고 돌발적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이처럼 삶과 죽음과의 소원해진 관계를 누가 회복할 것인가.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도대체 죽음은 삶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죽음은 삶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여기에 이번 전시의 의미가 있고, 전시를 통해 호출된 죽음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김성남, 신성한 숲. 숲에는 영이 살고 있다. 칠흑같이 어둔 캄캄한 숲속을 지나쳐본 사람이라면, 투명한 나뭇잎이 아치를 이룬 숲속에 누워본 사람이라면, 울긋불긋한 색띠를 치렁치렁 휘날리며 서 있는 아름드리 신목을 올려다 본 사람이라면 숲이 영임을 실감할 수가 있다. 물활론과 범신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에 깃든 신령스런 숲의 신화가 미신으로 낙인찍힌 이후에 조차 숲의 신령은 조금도 훼손되지가 않았다. 인간의 인식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숲을 호명하지만, 사실 숲은 인간의 호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이 숲을 호명하기 위해 동원한 개념은 다만 인간의 일일 뿐, 이를 도구로 인간은 결코 숲 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김성남은 이처럼 인간의 인식이 가닿을 수 없는 숲을, 신령스런 숲을 그린다. 그리고 순례자를 그 숲속으로 들여보낸다. 여기서 숲은 일종의 거듭나기와 정화의식 그리고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문명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본성을 치유하고 위로받고 회복하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간다. 때론 그렇게 들어간 숲속에서 물거울을 만나고, 그 물거울에서 저마다의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창겸, 실재의 죽음. 장 보들리야르는 현대인이 이미 가상현실 속을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 속을 살고 있다고 보고, 감각적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가상현실 속을 살고 있다고 본다.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라, 실제로는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일종의 유사현실 내지 허구적 현실감이랄 수 있을 것인데, 그 현실감 속에서 현실은 가상으로 둔갑되고 실제는 게임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마치 게임을 하듯 폭탄투하 단추를 연신 눌러대는 전투기 조종사의 도덕과 윤리를 탓할 수가 없게 된다. 그에게 현실은 이미 가상이며, 실제는 게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들리야르는 어쩌면 이라크 전쟁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전쟁일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9.11 폭파장면을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창겸의 그림이 그렇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하나같이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왜곡도 없고 과장도 없다. 다만 배열과 배치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처럼 현실감을 배반하지 않음에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에 대한 선입견을 이용해 공감을 끌어내는(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완전한 가상현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감각적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가상현실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경험하고 경험되어지는 세계,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워지려하는 세계에 우리 모두는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송윤주, 세상사. 삶을 살아가다보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참 많은 일들을 겪는다. 상식적인 삶을 살고 영위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인데,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고, 돌잔치를 하고, 회갑잔치를 하고, 사람이 죽고, 새 생명이 태어난다. 삶의 크고 작은 분기점들에 해당하는 이 일들은 대개 일정한 예식을 갖추고 거치기 마련인데, 특히 결혼과 귀천과 회갑연이 그렇다. 남남이 만나 무촌지간이 되는 것이며, 하늘로 넋을 떠나보내는 제의, 그리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을 축하하는 것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리라. 송윤주는 이런 소시민적인 삶의 단면을 그리고, 그 소박하고 소소한 정경을 그린다. 그런데 정작 그의 그림 속엔 다만 추상적인 한문자와 기호가 있을 뿐,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한문자는 상형문자이며, 따라서 암시적으로나마 글 속에 그림이 들어있다. 기호도 마찬가지. 굳이 따지자면 서화동체로 나타난 전통적인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풀어낼 근거를 찾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흔히 전통적인 문자도에서부터 타이포그래피에 이르기까지 문자를 그림으로 옮긴 소위 그림문자를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인 경우가 많은데, 작가의 그림은 그 연장선에서 자신만의 좌표를 찾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윤현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사람들이 뛰어내린다. 빌딩 위에서 뛰어내리고,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고, 한강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고, 청계천변 위로 뛰어내린다. 학생이 뛰어내리고, 주부가 뛰어내리고, 연예인이 뛰어내리고, 공무원이 뛰어내리고, 사장이 뛰어내리고, 실업자가 뛰어내리고, 신불자가 뛰어내린다. 삶의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잉여인간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멀쩡한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아주 이따금씩은 삶이 공허한 사람들이 뛰어내린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자살하는 사람들이다. 윤현선의 사진은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세기말적인 풍경이고, 묵시록적인 풍경이고, 자본주의가 그려낸 풍경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런데, 그 날개가 꺾였을 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이카루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추락이었고 죽음이었다. 작가는 묻는다. 누가 이카루스들의 날개를 꺾었느냐고.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이 삶을 살게 한다. 그 소박한 이상이 좌절되었을 때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 지금 여기는 혹 자살을 권하는 사회는 아닌지, 작가는 반문한다.
이보람, 희생양. 유감스럽게도 유토피아는 없다. 모든 건전한 제도는 희생양 위에 축성된 것이다. 사람들은 폭력을 폭발하고 싶고 폭력을 보고 싶어 한다. 그 폭력 욕망에 내어줄 희생양을 적시적소에 제공하지 못하면 제도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 그렇게 제도는 희생양을 내어주고 폭력욕망을 잠재울 수가 있게 된다. 필요악이 아닌, 그저 인정해야 할 현실일 뿐이다. 누군가가 희생양으로 지목되어야 하지만, 적어도 나만은 피해가기를 바랄 뿐이다. 인터넷에는 이런 희생양 이미지로 넘쳐난다.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죽어 마땅한지 그 이유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나에게 일어난 일도 아니고, 대개는 나와 무관한 익명적인 이미지들이 아닌가. 이보람은 인터넷으로부터 이런 희생양 이미지들을 취해와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 그 과정에서 희생양 이미지 본래의 적나라한 폭력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진다. 깨끗하게 표백되고 소독된 이미지가 혹 동참을 요구해오거나 연대책임을 물어올지도 모를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현실을 한갓 이미지로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실재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 이미지를 통해 한 차례 걸러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 무감하고 무책임하게 만든다. 일종의 면죄부를 발부해준다고나 할까. 작가는 이처럼 현실을 한갓 이미지로서 소비하는 현대인의 속 편한 현실인식을 건드린다. 혹 그 속 편한 현실인식이 때론 이기주의일지도 모르고, 그 자체가 또 다른 희생양을 생산하는 계기이며 구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지현, 텍스트 혹은 의미의 죽음. 이지현은 멀쩡한 책을 훼손한다. 훼손하되, 한 땀 한 땀 수놓는 자수처럼 정성스럽게 훼손한다. 책을 펼치면 활자가 가득하다. 작가는 그 활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바늘로 뜯어내는데, 책장에서 완전히 뜯어내 분리시키지는 않는다. 뜯겨진 상태 그대로 책장에 붙어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뜯어 올린 활자들은 무슨 보푸라기처럼 부드럽게 보이고 유기적으로 보이고 부품하게 보인다. 시각적이고 의미론적인 차원의 텍스트를 해체해 질감이 두드러져 보이게 하고, 책 혹은 종이의 물성과 질료가 강조돼 보이게 한 것이다. 책은 의미의 집이기 이전에 활자의 집이고 종이의 집이다. 의미를 해체해 책 혹은 종이 고유의 질료를 되돌려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의미와는 무관한 작업인가. 작가는 텍스트를 뜯어내되 완전히 뜯어내 분리시키지는 않는다. 텍스트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한 것이다. 그렇게 해체된 텍스트는 텍스트이되 읽을 수가 없는 텍스트이다. 작가는 사진도 책과 마찬가지로 뜯어낸다. 그렇게 뜯겨진 채 붙어있는 사진에서 작업의 의미연관은 좀 더 명확해진다. 흐릿한 그리고 원본과는 꽤 다른 이미지를 여전히 알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진에서처럼 외관상 읽을 수가 없게 된 텍스트 역시 의미의 삭제 내지 소거로서보다는 행간읽기와 이면읽기에 대한 표상으로 볼 수가 있을 터이다.
조현익,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 죽음은 삶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모든 존재에 딸려있다. 그런 만큼 유독 삶이라고 해서 그림자가 없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이 없는 양 살고, 최소한 내 일이 아닌 양 살아간다. 그림자는 잠시도 떼어놓을 수가 없는데, 매순간 자기의 존재를 알려오는데도 그렇다. 아마도 삶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 삶의 그림자라고 한다면,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죽음의 베일이며 처벌의 베일을 드리우지 않은 에로스는 없다. 욕망은 금지로 인해 강화된다. 금지가 없으면 욕망도 없다. 유혹하면서 금지하는 것, 금지하면서 유혹하는 것이 욕망의 준칙이며 아이러니이다. 조현익의 그림엔 여자가 등장한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에서 유래한 여자는 에로스를 상징하고, 타나토스를 상징하고, 유혹하면서 금지하는 욕망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상징한다. 작가는 여자를 떠나보낸다. 죽은(마음으로부터 지운) 여자를 위해 촛불을 밝히고 국화꽃을 바친다. 이런 제의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선뜻 떠나줄 것 같지는 않다. 작가의 뮤즈(예술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욕망의 화신이며 죽음의 화신은 이처럼 뮤즈가 돼 작가의 삶이며 예술을 맴돌 것 같다.
한기창, 아모레파티. 한기창의 작업은 트라우마가 작업으로 승화된 사례를 보여준다. 생사를 넘나드는 교통사고와 이에 따른 치명적인 외상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연스런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했고, 작업 역시 그 연장선에서 풀어내게 했다. 자신의 외상과 직면함으로써 외상을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과 작업이 서로 별 개의 영역과 범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체성과 현실성과 설득력을 얻는 존재론적 작업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자신의 외상을 반성하고 반추하는 과정에서 유래한 작업이 뢴트겐 정원이며 스테이플 산수화다. 대개는 흑백 모노톤의 엑스레이 필름을 이용해 꽃밭이며 정원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며, 캔버스 천 대신 압박붕대 표면에 스테이플로 고정시켜 산수화로 재구성해낸 작업이다. 의학과 죽음과 치유의 기호를 삶의 기호로 탈바꿈시킨 역설적인 작업의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근작에선 그 주제의식을 아모레파티 곧 운명애로까지 확장 심화시킨다. 니체에게서 차용해온 이 말은 운명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를 예시해준다. 흔히 운명은 수동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니체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자기를 갱신하는 구실이며 계기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능동태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점에서 차별된다. 그리고 주문을 걸어온다. 자기를 궁지로 내 몰아라, 그러면 내면이 열릴 것이다, 라고. ● 황순일, 레퀴엠. 칠흑 같은 무대 위에 국부조명이 켜진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주인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오늘 공연의 주연은 사람이 아닌 정물이다. 비닐봉지로 보아 지금 막 정육점에서 사온 육질이 좋은 고기며, 먹음직스런 게, 그리고 탐스런 채소와 과일들이다. 그런데, 어둔 조명 탓에 보이지 않던 세부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부패된 고기며 과일들의 상태가 눈에 들어온다. 육질이 짓물러지면서 진액이 흘러나오고, 한입 베어 문 과육에는 부패의 자국이 여실하다. 저대로 부패가 더 진행된다면 구더기도 생기고 파리도 날아다닐 터이다. 여기서 고기며 과일은 탐욕을 상징하고, 부패된 고기며 과일이 그 탐욕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바니타스 정물화의 현대판 버전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인생무상과 욕망의 덧없음이 바니타스 정물화의 메시지에 해당한다. 정물에서 비켜나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무대를 보면 설핏 스피커가 눈에 들어온다. 스피커는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장치이다. 이로써 작가는 바니타스와 메멘토모리의 전언을, 삶에 보내는 죽음의 경고를, 레퀴엠을 들려준다. ■ 고충환
기획의 변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장 애절한 건 무엇일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존재이다. 즉, 사는 것이 아니면 죽은 것이다. 현실은 행복하지만 언제나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생명이 존재하는 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카테고리가 아닌 한 범주 안의 삶의 과정이며 전개이다. 우리의 죽음은 멀고도 참으로 가깝다. 갑작스런 주변의 '시한부 삶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그리고 자신을 일깨워 주는 죽음의 미학?...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죽음'은 삶의 미학을 완성시키는 마침표이며 더 나아가 인간에게 예술로서 남기도 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사랑하다 죽는다. 기약이 없는 이별로서의 죽음. 플라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 찾아낸 유일한 길이 사랑이라고 했다. 나는 죽지만 타자와의 합으로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절대로 미지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신화를 창조하고 종교로 인해 삶을 지배 받으며 스스로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 바니타스(인생무상)나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죽음을 삶의 경고하기 위한 타자로서, 주체를 형성시켜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최근 고인이 된 스티브잡스도 "아무도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라고 하였으며 '죽는다'는 생각은 곧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삶 속에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고 한다.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비싼 보석으로 해골의 웃는 모습을 표현하여 끝까지 욕망을 놓지 못하는 인간의 부질없는 탐욕을 보여주는 죽음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렇듯 삶과 죽음에 대한 화두는 오래 전부터 미술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사가 되어왔다. ● 이번 전시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삶과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현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현대의 관점에서 시각적 이미지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구성되었다. 2012년 오늘의 시각에서 생명과 삶,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생성에 관한 것들과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 김성남, 김창겸, 송윤주, 윤현선, 이보람, 이지현, 조현익, 한기창, 황순일 총9명의 작가 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인간의 현재, 일상 생활의 기록부터 삶과 죽음의 시각, 과학적 근거까지 다양하고 폭넓게 보여주며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기록에 대한 삶의 드로잉'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 김성남은 죽어가는 생명을 끌어들이며 희생을 통한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사회적 의미와 함께 던진다. 김창겸은 'still life',에서 '정지된 삶'과 '죽은 자연' 의 이중성, 그리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 관심을 가지며 영상 설치 작업에서는 '실재'와 '환영'의 본질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송윤주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모습들을 상형문자화하여 표현한다. 그리고 윤현선은 인간의 근본적 본질인 삶, 숭고해야 할 죽음, 사랑...조차 사회에 부각되고 들추어지는 것들과 그것의 파생된 것에 대한 잡음들을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준다. 전쟁이나 테러, 범죄를 다룬 보도사진에서 희생자를 차용해오는 이보람은 그 이미지의 속성을 제거하거나 생략하기도 하면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이미지를 연관, 시각적 교란을 통한 역설을 제시한다. 이지현은 법정스님의 저서인 「무소유」의 책을 뜯어내 옷 만들기를 한다. 작가의 고단한 노동력으로 책은 새로운 존재인 옷으로 부활한다. 조현익은 삶과 죽음,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의 지점을 확인시켜주기도 하면서 삶의 이중성과 이율 배반성을, 한기창은 작가의 강력한 트라우마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시작되었으나 작업 자체가 치유이며 수행이다. 황순일은 삶 자체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찬란했던 순간들도 언젠가는 한줌의 흙으로 스러져갈 삶의 허무함과 같은 바니타스를 이야기한다. 전시에서의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 죽음자체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나 치열한 삶에 대한 기록과 기억, 삶과 죽음의 공존, 인간의 실존적 표현까지를 폭넓게 읽어내고자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어디에도 정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해답 대신 죽음은 한정된 가능성이 아닌 무제한적인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일러주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각자 살아가는 속도와 순간들을 기억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며 삶에 대한 깊은 고찰의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 ■ 홍성미
Vol.20120707e | 가지 않은 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