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dowy figures

장양희展 / CHANGYANGHEE / 張樣熙 / printmaking.installation   2012_0627 ▶ 2012_0710

장양희_Female #1_혼합재료_90×70×9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210a | 장양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27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월~토요일_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지표도 좌표도 없이 떠도는 인간들 ● 인간의 얼굴을 이루는 수많은 해부학적 심리적 판들을, 잠재적 평면이 중첩된 예술인 판화와 교차시키는 장양희의 작품에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얼굴이 드러난다. 장양희가 가시화한 이 시대의 얼굴은 익명적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드러난다기보다 사라진다고 해야 옳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과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에 예술에 의해 포착된 얼굴의 실상은 역설적이다. 이러한 익명성의 세계는 '세계가 더 이상 세계가 되기를, 또한 인간이 인간되기를 그만두고 있다'(장 뤽 낭시)는 데서 온다. 그러나 익명적 구조에 의해 인간이 사라졌다고들 하지만, 구조를 만들고 동시에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면, 인간은 여전히 현실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여전히 이야깃거리가 많은 소재이자 주제가 된다. 작품소재가 된 인물들은 작가의 지인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시장이나 쇼핑몰 등을 지나가는 대중들이다. ● 전시장 한 모서리를 차지하는 설치작품 [crowd]는 투명 필름 위에 디지털 프린트된 대중들의 모습이 블라인드처럼 만들어져 3차원 공간 속에 드리워진다. 그들은 지표도 좌표도 없이 공중에 붕 떠 있다. 'shadowy figures'(전시부제)전을 관람할 관객들 역시 투명한 구조 속에 스며든 대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대중들은 어떤 시공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감은 희미하다. 그들은 잘게 잘린 투명 필름처럼 유령같이 떠돌면서 무엇과도 쉽게 결합하고, 쉽게 분리된다. 예술작품이라는 형식 속에서 단순한 조합은 융합으로 고양되기를 기다린다. 실존주의자들은 조합과 융합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사회성을 정의한다. '조합은 단순히 다수의 개인들의 모임이며, 융합은 동요 가운데 있는 전체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고양되는 자유 의식'(사르트르)이다. 그러나 뜨거운 역사적 사건들이 점차 사라지는 차가운 일상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실존주의자들의 희망은 더욱 거리가 느껴진다.

장양희_Male #1, Female #3_콜라그래피_각 90×68cm_2012

그 옆 벽에 걸린 작품은 대중들을 그림자처럼 보여준다. 네가티브 필름처럼 흑백이 반전된 군중들이 검은 판 위에 떠돈다. 6개로 나뉘어진 검은 포맥스 판들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속될 공간을 예시한다. 그림자처럼 보이는 군중들은 감시 카메라나 열 감지 기능이 있는 첨단 무기의 시야에 들어온 피사체처럼 단지 몇 개의 기호로만 구별될 수 있는 희미한 윤곽을 가질 뿐이다. 빛과 그림자 속에 잠겨있는 대중들 속에서 장양희는 고립된 존재들을 본다. '대중 개인주의'라는 말도 있지만, 이 고립된 존재는 주체는 커녕 개인조차도 될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자율적 주체나 내면적 개인이란 여전한 희망사항으로 남아있다. 그 희망이 과연 정당한지도 알 수 없다. 실은 주체나 개인 자체가 재검토되어야 한다. 모리스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고립된 존재로서의 개인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한 자유주의의 허약한 개념으로, 표상된 대로의 실존일 뿐이라고 본다. ● 그에 의하면 가장 개인적인 것은 한 사람이 간직한 자신만의 비밀로 남아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개인이라는 테두리를 부수고 나눔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 실존이 근본적으로 부단히 의문에 부쳐진 실존이라면, 인간 실존은 그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만을 이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가시적인 것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수 있는 공동체는 없다. 결국 유한한 자들의 만남이 문제가 된다. [밝힐 수 없는 공동체]와 대화적 관계를 이루는 [마주한 공동체](장 뤽 낭시)에서는 유한성을 '완전한 내재성의 불가능성'으로 규정한다. 낭시에 의하면 완벽히 스스로에게 정초하며, 자신에게 갇혀있고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적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제약된 존재이다. 이렇게 제약된 유한한 존재가 발견하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장양희_Faces_혼합재료_각 45×45×6.5cm_2012

장양희의 작품에서 명암의 대조는 얼굴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작품에서도 연속적이다. 아크릴 판을 레이저로 파서 얼굴을 드러나게 한 작품인 [faces] 시리즈는 뒤가 터진 아크릴 박스 안에 하나하나 얼굴 초상이 안치되어 있다. 최초의 사진은 여러 단계를 거친 재현의 결과 얼굴의 실루엣과 등고선만 남은 채 흐릿하게 변모되어 있다. 특히 레이저 인그레이빙(laser engraving) 과정을 거치면서 생겨난 노이즈는 마치 바코드처럼 얼굴 위에 가로줄, 또는 세로줄을 죽죽 그어 놓는다. 복사의 복사 과정을 거치면서 원본은 흐릿해진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을 상대편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표면으로 다가오기에, 그 와중에도 대략 성별, 나이, 차림새, 기분 등이 감지된다. 인물 위를 가로 지르는 선들은 작가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자, 입력된 정보가 정확히 출력되지 않은 기계적 결함의 산물인데, 역설적으로 그것이 각각의 개별성을 담보해 준다. ● 장양희의 작품은 개인의 의지를 벗어난 이러한 예기치 못한 균열과 틈 속에서 또 다른 의미와 가치를 발견한다. 검은 아크릴 판에 새긴 168개의 초상들로 거대한 기둥을 만든 작품은 레이저로 많이 파인 허연 부분이 어느 각도에서 보면 더 정확한 생김새를 알려준다. 부조처럼 얇게 파인 판들은 네거티브/포지티브 이미지가 교차되듯이 시각성과 촉각성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개별성을 무시하는 기계적 배열방식은 공중에 붕 뜬 사람들처럼 지표와 좌표를 삭제해 버린다. 인간의 물적 실체를 최대한 비운 작품은 종이 위에 찍은 콜라그래프(collagraph)이다. 초상 위로 쓱쓱 지나간 붓 자국은 얼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듯하다. 바니쉬를 두껍게 바른 부분은 레이저가 팔 수 없기에 얼굴을 가로지른 거친 붓 자국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얇은 종이에 찍어 하늘하늘하게 늘어뜨린 전신상은 익명성과 비실체성이 더 강조되어 있다. 가방을 맨 여학생인 듯한 뒷모습인데, 여러 장의 종이로 연결되어 있고 두 이미지도 약간 엇겨 배치되어 있다.

장양희_Face_종이에 레이저조각_240×180cm_2012

인물을 돌려세우고, 지우고, 조각조각 잇고, 엇기는 과정들의 총체적 효과는 실체가 비워진 인간상들이다. 더 나아가 작가는 레이저로 인간상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종이 위에 레이저 인그레빙을 한 초상은 8개의 같은 크기의 패널로 나뉘어 합체되어 있는데, 확대 복사한 이미지에 또 한번의 기계적 과정을 거치면서 노이즈는 극대화되고 미세한 재들로 표면이 덮인 형상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을 예시한 철학자 미셀 푸코가 말했듯이, 모래 위에 새겨진 인간상처럼 밀려오는 바닷물에 쓸려가 버릴 듯하다. 작품들의 면면은 이미 쓸려가는 와중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라짐들이 꼭 부정적인 것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사라짐을 열렬히 환영하는 이들도 있다.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현대철학에 의해서 거세게 비판받은 바 있다. 그러나 장양희의 작품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무덤덤한 중성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뤽 페리와 알랭 르노는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인간 존엄성의 옹호자 혹은 해방의 기수로서 자처해온 근대 철학의 인간중심주의(humanism)적 발상이 오히려 억압의 원인으로서, 혹은 그 공범자의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1968년 이후의 철학은 반(反)인간중심주의의 물결을 이루었다고 진단한다. 저자들은 1960년대 철학의 집합 신호를 주체성에 대한 해체로 본다. 이러한 철학이 아니더라도, 현대의 일상생활은 주체의 자율성이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매 순간 확인시켜 준다. 뤽 페리는 [미학적 인간]에서도 근대사회의 논리는 인간들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 공리에 의해 기초가 이루어진 통합의 논리일 것이지만, 근대의 보편적 주체는 사이비 개인화를 통해 결국 예속과정으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현대 철학은 인간중심주의와 주체성에 대한 문제 제기들로 가득하다.

장양희_Females_콜라그래피_각 240×68cm_2012

미술에서도 인간을 완전성의 척도로 삼은 고전주의는 미술 학원의 무익한 석고상에서나 발견될 뿐이다. 장양희의 작품에서 인간은 개별적이든 다수로 존재하든 익명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익명성의 바탕에는 작품 제목에 포함되어 있듯이, 군중이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봉은 [군중의 심리학](1895년)에서 군중 시대의 도래를 근대 과학과 산업의 발명에 의해서 존재와 사고의 완전히 새로운 조건들이 창조되었다는데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과학과 산업은 인간을 개별적 입자로 만들고, 이 입자들의 이합집산을 추동하는 원리는 결국은 경제적 합리주의지만, 합리주의의 이면에는 비합리주의가 깔려 있다. 극우파인 르봉은 군중의 무의식을 강조했고 도래하는 파시즘을 준비했지만, 오늘날의 파시즘은 편집증에 빠진 광적인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보화 사회의 익명적 구조에 의해 작동된다. ● 사회학자들은 구조를 '주체 없는 과정'으로 정의하며, '사회적 질서란 결국 소유권의 배분에 근거하는 표상에 따라서 각각의 행위자들이 계급화 시키고 계급화 되어가는, 분류화 시키고 분류화 된 판단들의 총합에 불과한 것'(피에르 부르디외)이 되었다. 인간 주체라는 근대의 강한 개념은 개인으로 와해되며, 이러한 와해의 바탕에 대량생산 및 소비사회, 그리고 대중매체가 있다. 고독한 군중, 대중 개인주의 등은 집단적이지도 않고 개별적이지도 않은 모호한 대중의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장양희에게 익명적 대중은 최초의 참조대상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인간은 그 원초적 기의가 배제되고 흔적들로 남는데, 흔적을 만드는 것은 사진, 포토샵, 디지털 프린트, 디지털 인그레이빙 같은 미디어이다. 오늘날 인간은 인간과 맞대면하기보다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간접적으로 매개된다. 그러나 인간 사이를 이어 주고 채워주는 미디어는 투명하지 않다.

장양희_Crowd_혼합재료_180×455cm_2012

장양희의 작품에서 이 불투명성은 최대한 강조되고,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 흔적을 강조한다. 인간은 축소되고 축소되어 언어와 언어, 구조와 구조, 제도와 제도 사이의 틈과 파편들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한다. 상징적 구조의 산물인 주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분열성, 이에 함축된 근본적인 타율성은 작가가 가시화하는 인간상에 편재해 있다. 그러나 이전에 강하게 확신되었던 인간 본질과의 불일치나 차이는 허무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동일성을 이루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동일성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데리다에 의하면 '사유해야 할 것은 동일성의 밖에 놓여있는 은밀한 차원이 아니라, 동일성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차이의 작용 또는 유희'이다. 장양희의 작품에서 서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으로서의, 그들을 서로 구별해주는 것으로서의 차이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우연이나 실수의 흔적들이다. ● 흔적은 '토대도 근본적인 원리도 기원도 아니며'(데리다), 차이의 결과이다. 차이는 '무한한 또는 무한대로의 시간화 작용'(데리다)이다. 장양희의 작품에서 시간화는 입력된 속도를 정확히 재현하지 못하는 디지털 인그레이빙 과정에서, 그리고 설치를 통해 만들어진 연극적 무대에서 관철된다. 인간에 내재된 동일성이 차이로 해소, 또는 해체되는 과정에 깊이 개입되는 것은 시간성이다. 절정의 순간, 한 공간에 고정된 기념비적 인간상은 덧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잠기게 된다. 장양희의 작품의 독특한 점은, 이러한 시간성이 영상이나 서사가 아니라, 아크릴 판이나 종이 같은 공간적 매체들 위에서 구현되었다는 점에 있다. 내용적으로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에 접근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장 뤽 낭시는 [마주한 공동체]에서 다수라는 말은 명백하게 세계인민의 다수성 뿐만 아니라, 상위의 단일체제를 벗어나 차이들을 확산시키며, 소규모의 그룹들, 개인들, 무리들, 주민들 내로 흩어져 퍼져 나가는 다양성을 환기한다고 지적한다.

장양희_Crowd_아크릴판에 레이저 조각_336×60×60cm_2012

그 점에서 다수는 대중 혹은 군중이라 여겨졌던 것을 교정하고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의 다양성이 형태화(구조화) 되기를 기다리는 대중이 아니라, 산종(종자가 갖는 증식성), 또는 분산화(불모의 파편화)같은 흩어짐 가운데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흩어짐 속의 군중의 익명성은 더 이상 부정적이지 않다. 익명적 얼굴 또는 인간이라는 소재나 주제의 차원을 넘어서 작가가 만들어 내는 작품 자체가 익명적이다.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모르는 자와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겨냥하고 있지 않는 작품의 익명성이라고 본다. '부정의 공동체,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바타이유)들을 다시 세우는 것은 작품의 익명성이다. 개인, 주체로서가 아니라, 익명적, 비인칭적 관심으로 참여한 관객들이 거기에 있다. 그(녀)를 알지 못하지만 도처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장양희의 작품에 나타난 인간들의 비개인적성, 비인칭성, 중성성은 작품 스스로에게도 해당된다. 변화된 주체나 개인의 상황은 작가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다만 '모두를 위한 말이자 각각을 위한 말이기에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말, 즉 언제나 도래해야 할 무위의 말이 울려 퍼지는 공간'(블랑쇼)을 가리킬 뿐이다. 의미 전달에 내재된 환상, 즉 의미가 발신자로부터 출발하여 수신자에 이른다는 투명성이나 합일성의 가상은 무너진다. 현대 예술이 그리는 인간상은 특정한 주체가 아닌, 유한한 무명씨이다. 이 무명씨는 폐쇄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내재성도 없다. 개인의 모든 특수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현전을 다루는 장양희의 작품에는 이상적, 본질적 인간(성)의 모델이라 불리 우는 것들이 사라진다. 더불어 세계와 합일 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가상, 그리고 절대의 상태로 고양될 수 있다는 오류와 환상만을 낳기 쉬운 낭만적 예술가상 또한 사라진다. ■ 이선영

Vol.20120627l | 장양희展 / CHANGYANGHEE / 張樣熙 / printmak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