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62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고은정의 작품세계 "멜랑콜리와 애도, 감춤과 드러냄" ●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중요성을 부여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실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환기되는 비의적 세계입니다..." 작가를 만나고 온 날 나는 푸코에게 보낸 마그리트의 편지를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작가에게 보낼 나름대로의 회답이 떠올랐던 것이다. 사실, 대기의 흔적과 역동을 그리겠다는 작가의 생각은 미술사에서 그다지 낯설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상주의 회화가 빛을 화면에 고착시키려했던 의지와 작가가 대기의 움직임을 화면에 구축해보겠다는 의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실, 미술사는 이러한 무모한 도전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바다, 시선과 응시 ● 바다는 작가의 고향이었다. 고향이라고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노스텔지어의 대상은 아니다. 유년시절, 바다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었을까? 마치 전쟁과도 같았던 유년의 시기에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는 바다였던 것일까? 바다를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바다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유년시절 바다는 꼼짝없이 눈에 들어오던 주변 풍경 중 하나였다. 바라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바라보아야만 했던 어떤 끈질긴 인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바다풍경을 무시로 바라보고, 바다와 대기와 빛과 구름을 넋놓고 헤아려보면서 존재에 대한 질문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무시간 속으로의 여행이었다. 이 때 바다와 대기는 작가 속으로 들어와 물활론적 교섭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바다와 대기와 자신이 서로 타자가 아닌 하나의 조화로운 합일의 순간들을 맛보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무의지적인 그림자로, 무의식의 지층에 쌓여만 갔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본대로 만들어진다. 그 사람이 본 것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유년시절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노출되는 시기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봐야만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시기다. 그런 까닭에 유년시절은 그 자체로 엄청난 무의식의 보고가 된다. 작가에게 있어 바다와 대기는 이미 경험 이전의 세계, 즉 선험이며 체화된 환경이 되었다. 작가에게 익숙한 풍경은 사유를 재촉하지 않으며, 언제나처럼 그저 관조하게 만든다. 여기서의 관조는 바라보는 자신이 바다와 대기로부터 타자화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상호관계가 맺어지는 바라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선과 응시가 서로 교차하는 역동적 관조쯤 되겠다. 이처럼 고은정은 생각을 통해 표현을 추구하는 화가는 아니다. 만약 그가 생각을 통해 표현을 추구하는 화가였다면 아마도 풍경이 대기 속에서 드러날 때의 수수께끼, 즉 매순간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비의적 세계를 놓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고은정의 바다는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런 비의적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드는 기묘한 힘이 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화면 속에 대기의 움직임, 즉 바람, 대기, 빛, 수증기, 증발 등의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려는 신념에 가까운 의지때문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 움직임은 느슨하지 않고 긴장되어 있으며, 때로는 두려움과 공포스러움의 경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게 작가가 그려내는 대기의 움직임은 프로이트가 말한 삶충동과 죽음충동의 경계를 환기한다. 그 상태는 살고자하는 의지를 죽음까지 밀어붙이려는 주이상스(jouissance: 고통 속의 쾌락)를 생각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와 숲은 작가가 아무리 배제하려고 해봤자 드러나게 마련인 감정의 유출, 즉 심상의 풍경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풍경을 존재이게 하는 것, 수수께끼같은 ● 고은정의 작품은 태초의 바다에 던지는 최초의 시선 같았다. 작가가 그린 그림은 아직 풍경도 대기도 아닌, 얼마간 그 경계 어디쯤 서있는 작품 같다. 대기의 흐름과 움직임을 그리기 위해서는 풍경을 버려야하고, 풍경을 얻기 위해선 대기를 버려야하는 것일까? 사실, 바다와 숲과 같은 풍경은 공기와 대기와의 어쩔 수 없는 동거와 공생이 이루어낸 하모니가 아닐까? 어쩌면 이때 마그리트가 푸코에게 말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서 환기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에 대해서 숙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대기를 그렸으나 대기보다 풍경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다음에는 대기만을 더 집중적으로 구사해내고자 풍경을 거세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하여 선과 형태라는 회화의 기본적 요소로 돌아간다. 대기를 대기답게 그려 보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떤 대상을 가장 그 존재답게 만들어주는 '아우라'를 부여해주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예컨대, 바다를 가장 바다답게 만들어주는 것도 대기요, 숲을 정령이 가득한 생명의 숲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대기이다. 그러니까 작가에게 대기는 존재를 가장 존재답게 만들어주는 생명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기를 그리겠다는 그녀의 야심은 어떤 세속적 욕망이 아니라, 어떤 존재(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징으로서의 신 혹은 절대적 존재)와의 만남을 드러내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기록되어야하지 않을까? 있으면서도 없는 것, 없으면서도 실로 강력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대기는 어쩌면 자신의 실존적 삶의 방식과도 통하는 것이었으리라. 이처럼 존재란 우리가 존재의 경험을 갖도록 우리에게 창조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은정이 사용하는 푸른 색채는 깊고, 어둡고, 진지하다. 아마 작업을 지속하는 동안 화가는 대기와 빛 사이의 광도를 낮추고, 너무 지나치게 눈에 띄는 색조를 누르고, 동시에 전체적 콘트라스트를 낮춘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색채는 절제와 금욕 그리고 애조와 우울 등 푸른색이 암시하는 상반된 심리적 정서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니 고은정의 작품에서 멜랑콜리의 인상을 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색채는 형태보다 훨씬 더 감성적이며 근원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낭만적 감상주의 즉 센티멘탈리즘이나 멜랑콜리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짐짓 두려워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색채는 작가의 작품의 또 다른 딜레마다. 색채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지 않는 한 고은정의 작품은 그 자신이 그렇게 우려해마지 않았던 감정의 토로에 지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담담하고 견고해지려고 해도 색채는 더 역동적으로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물론 색과 형태는 따로 놀지 않고, 늘 서로 들러붙어있다고 할 수 있다. 색채가 견고해질 때 형태도 견고해진다는 말이다.
멜랑콜리와 애도 ● 라캉에 따르면, 우리들은 모두 무엇인가의 결여이다. 나는 라캉이 말한 그 결여를 애도하는 가장 창의적인 방식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애도란 슬픔을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다. 슬픔을 소진하는 길은 슬픔을 기꺼이 슬퍼해주는 일이다. 수많은 슬픔의 이유가 있겠지만, 슬픔의 가장 큰 본질은 "근원적인 것의 상실"일 것이다. 충분히 슬퍼하면 슬픔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애도가 가진 가장 큰 긍정이요, 아름다움이다. 모든 예술가의 작품에는 얼마간 우울과 멜랑콜리의 감수성이 내재되어있고(특히 서양미술사의 근원적 정서는 멜랑콜리이다), 거기에는 충분치 못한 애도가 원인으로 자리한다. 고은정의 작품은 스스로 작품과 개인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아무리 에둘러 표현한다해도 자신의 결여와 상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고백은 더 이상 현실적이거나 세속적이지 않으며, 좀더 비의적인 존재론적 사건의 얼개로 짜여져 승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작가가 고집스럽게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이것은 라캉식으로 표현하면 상상계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상징계의 거부에 다름 아니다. 상징계란 법과 질서와 이성의 세계, 부성으로 상징되는 체계를 가진 세계이다. 대기의 바다와 숲은 그녀가 상징계를 거부하고, 원초적 합일의 세계,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의 세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곳은 아직 상징화되지 않은, 우발적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선도 악도 아닌, 신도 인간도 아닌, 차라리 상징과 은유를 뛰어넘는 초월적이며 선험적인 공간이자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리는 대기 속 자연은 J. 크리스테바의 코라(chora)를 연상시킨다. 라캉의 제자이기도 한 크리스테바에 오면, 라캉의 상상계는 코라로 진화한다. 크리스테바는 코라를 전-형상적(pre-intelligible)이며, 전-이데아적(pre-formal)이며, 무의식의 최초의 자궁으로 파악한다. 그녀는 코라를 '낯선 공간'으로, 특정한 '본능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보통 코라를 비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억누르고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술가들은 그런 억압해야만 하는 장소를 그리워하고 맞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대기의 바다, 대기의 숲을 그려보겠다는 열망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 즉 코라에 대한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코라는 자신을 영원히 보듬어 주거나 안도하게 해주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곳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종의 생성과 변화가 일어나는, 자아의 가능성의 대한 열린 지표인 것이다. 이 때 코라는 신성이 거주하고, 치유가 일어나는 열린 영역이 된다. 작가가 바다와 숲과 대기를 만들어 마치 정령처럼 숨고, 숨쉬고 싶은 역동적 공간을 만든 것이야말로 그런 공간에 대한 향수를 담은 것이다. 이제는 아주 간단히 그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도약하는 일만 남았다.
이제 예술이 생애를 요청할 때다! ● 예술은 한 인간의 삶과 분명한 연관을 갖는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삶이 그의 작품을 모두 설명해 줄 수도 없으며, 예술이 반드시 삶과 경험 속에서만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예술이란 이를 초월한 경지, 즉 "어떠한 특정한 예술작품이 어떤 특별한 생애를 요청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예술작품은 마치 영원한 획득물처럼, 예술가의 정신 속에 분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기도 하며, 각기 분리된 삶들을 통합하게도 하는 것이다. 좋은 그림이란 처음에는 우리에게 말을 잊게 하고, 그 다음에는 보는 방식을 잊게 한다. 설명이 필요 없는 경지다. 아마 모든 작가들은 그 경지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고은정 역시 자신의 작품이 그 앞에 선 관객에 의해 완성되며, 스스로 자라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회화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관객에 따라 그 스스로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사소한, 그러나 거대한(?) 소망이 이번 전시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더불어 작가의 늦은, 더딘 행보가 더욱더 예술이 요청하는 삶으로 한발짝 다가서는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무엇인가의 결여이다. 나는 그것을 애도하고 있는 중이다"_자크 라캉 ■ 유경희
Vol.20120627f | 고은정展 / KOEUNJEONG / 高銀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