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소녀에게 묻다

송휘원展 / SONGHWIWON / 宋輝元 / sculpture   2012_0627 ▶ 2012_0702

송휘원_소녀, 소녀에게 묻다_합성수지_18×16×15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송휘원展 유투브 동영상 보기_www.youtube.co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9258 gana.insaartcenter.com

대안의 소통을 위한 유년기로의 회귀 ● 송휘원의 『소녀, 소녀에게 묻다』전에는 자기 스스로와 대화적 관계를 이루는 작품들이 있다. 타인이 아닌 스스로와의 대화는 현대적 삶을 특징짓는 소외에서 온 것이지만, 그녀의 대화는 침울한 독백 대신에 따스한 상상으로 가득하며 어린시절의 꿈과 순수를 간직한 작가만의 캐릭터를 통해 자연, 동물과의 소통을 주제로 작업한다. 상상 역시 개인을 지배하는 강력한 현실이며, 예술이란 어느 정도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대리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의 세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에게 소외의 시작은 태릉 근처의 구 주택가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을 급히 마감 지은 강남의 아파트 생활이었다. 아마도 자식들 교육 때문에 이주했을 강남 아파트촌은 어린 송휘원에게 애들이 없는 놀이터와 일찍이 시작된 경쟁관계로 기억될 뿐이었다. 작가에게 유년기는 되풀이해서 기억하며 머물고 싶은 일종의 원형적 시공간이다.

송휘원_cat bathtub_합성수지_22×31×16cm, cat1 27×22×12cm, cat2 20×27×11cm_2012
송휘원_amimal in a fantasy_합성수지, 스테인리스 스틸_60×46×12cm_2012
송휘원_내안에서 잠기다_합성수지, 대리석_50×25×20cm×2_2012

그녀는 아직도 10세 이전의 세계로부터 감성의 원천을 공급받는다. 타인으로부터 소원해진 아이는 현실이 아닌 상상에 몰두하게 된다. 이러한 부류는 성인이 되어도 현실원리가 쾌락원리를 대체하기 힘들다. 작품 속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귀여운 분신이 등장하여 행복한 상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작품 속에서 사이버 세계는 아파트의 세계처럼 자연이나 인간애로 극복해야할 무엇으로 나타난다. 이전 작업에도 자연이나 인간은 주인공이었지만, 보다 추상적이었다. 2006년의 개인전에는 꽃잎, 자궁 같은 이미지가 순환되는 추상 돌조각 작품을 발표했다. 자연의 법칙과 순리를 형상화한 작품들에서, 자연과 인간은 보다 큰 역사적 주기 속에서 거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지만, 지금은 보다 아기자기하다. 크고 멋있는 것보다는 작고 귀여운 것으로의 선회이다. ● 같은 해 자신을 닮은 동글동글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동심을 표현한 구상 조각으로 변화했다. 이 전시에서 빛과 색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빛이나 색은 정통적인 조각의 노선에서 벗어나, 디자인(공예)이나 회화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빛과 색 역시 현실보다는 상상과 관련되기에 약화되어 있다. 색칠한 표면을 갈아내서 빈티지 느낌을 준 색의 흔적이나 파스텔 톤의 소녀상들은 명확히 기억할 수 없는 희미한 기억과 관계된다. ● 메인 작품에서 좌대 역할을 하는 아크릴 기둥들을 채운 노랑 빛은 따스함을 발산한다. 17개의 소녀 상반신 상들이 기하학적 구조와 결합된 작품은 그녀들의 꿈꾸는 세계를 비추어준다. 색만 다른 복제 상들은 앳된 얼굴과는 달리, 명상하는 부처 같은 자세를 취한다. 그녀들은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어 현실 속에서 행동하고 뿌리내린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다리가 붙어있는 작품은 하얀색 상반신에 오석이 결합된 것인데, 이 역시 움직임과 연관된 동작은 아니다. 오석에는 인터페이스를 상징하는 미디어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식물 문양에 의해 잠식된다. 작가는 미디어를 통한 간접적 소통에 대해 회의적이며, 자연을 더 신뢰 한다. 미디어와 자연은 표면적 코드와 본질적 실체처럼 대조 항을 이룬다. 아크릴 기둥들의 높이는 다 달라서 소녀들은 서로의 눈을 맞추지 못한다. 그들은 상호작용하기 보다는 각각의 상념에 빠져 있다. 소녀들의 표정은 비눗방울이나 휘파람을 부는 듯 느긋하고 여유롭다. 무엇인가 작동 중임을 알리는 듯한 빛의 기둥과 파스텔 톤의 반신상은 차가운 현실을 따스한 기운으로 채워준다.

송휘원_푸른 물결.. 나를 이끌어주네_합성수지_32×25×6cm_2012
송휘원_푸른 물결.. 나를 이끌어주네_합성수지_37×45×4cm_2012

부조 작품에서도 같은 얼굴을 여러 번 반복한 작품이 보이는데, 그것은 여러 상상 세계에 빠져 있는 동일한 인물의 분신처럼 보인다. 작품 속 캐릭터는 아이와 소녀, 동물 등이며, 식물계를 상징하는 나무 둥치도 등장한다. 작가에게 동물은 인간세계와의 단절이 야기한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며, 우호적으로 나타난다. 타조나 돌고래를 타고 노는 소녀상, 물속에 빠진 자신을 구해주려 손을 뻗는 곰 등은 그 예이다. 작품에서 인간은 동물화 되고 동물은 인간화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종들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세계는 유토피아적 상상에 많이 등장하곤 한다. 유토피아라는 단어에는 '없는 장소'라는 의미가 있지만, 공간을 시간으로 전환한다면 유토피아는 어린 시절이 될 것이다. 어린 시절처럼 완전히 보호받는 세계 속에서 현실과 상상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의 관계처럼, 주술이나 애니미즘 같은 사유전능의 세계는 역사의 유년기에도 나타난다. ● 그 시절이 지나가고서도 이러한 통일(또는 혼돈)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공간은 꿈 또는 예술이 거의 유일하다. 그래서 예술은 아무리 냉소적인 스타일을 견지한다 해도, 상상세계 특유의 온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상상의 세계에서만 살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품의 소재로 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양수처럼 아이를 보호해주는 소우주이며 또한 익사의 위험을 줄 수도 있는 이중적 상징으로 나타난다. 대리석으로 깍은, 물 위에 서서 뭔가를 밀고 나오는 소녀는 물속 같은 상상에서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듯하다. 작가와 동물과의 동화관계를 염두에 둘 때, 벽에 설치된, 물에서 나오는 양머리 부조 또한 그렇다. 그러나 많은 작품에서 여전히 물은 아늑한 상상의 거처이다. 물은 분리보다는 통합적이라는 점에서, 현실보다는 상상에 가깝다. 소녀 머리가 출렁이는 물결이 되고 그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얼굴은 사람인 부조 작품은 동물과 소녀, 물과 상상의 유대관계를 증거 한다. ● 물은 일상적인 사물과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욕조 안의 캐릭터는 고양이와 소녀의 결합체이며, 욕조의 다리는 사람 다리이다. 수영복을 입은 소녀들은 물에 떠다니는지 공중에 날아다니는지 모호한 상상 속 절대 자유를 구가한다. 환상 속에 있는 현실성, 현실 속에 있는 환상성을 생각해 볼 때, 환상과 현실은 상반되는 두 세계라기보다는 동전의 양면이다. 예술 작품이란 결국은 사실이 아닌 허구를 말한다. 아무도 그림 속에 그려지거나 돌로 조각된 떡을 먹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이 허구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19세기적인 사실주의를 극복하려는 현대예술가들은 가장 실제적인 것은 '나 스스로 철저히 만들어낸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알랭 로브그리예)를 생각했다. 허구로서의 예술은 단순한 거짓이나 가상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는 다른 대안의 세계이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상상력은 자기 주인들을 이성보다 훨씬 더 충만 되고 완전하며 만족스럽게 해준다'

송휘원_animal series_합성수지_46×30×20cm, 45×40×3cm, 46×52×7cm_2012

상상이라는 대안의 세계는 보이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즉물적 태도를 충만한 의미로 전환시킨다. 송휘원의 대안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은 아무런 방해받음 없이 소통한다. 상상은 유한의 세계를 무한의 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확장 뿐 아니라, 응축도 일어난다. 그 어느 것이든 이성이 구별한 명확한 경계는 사라진다. 명백함보다는 모호함인데, 예술은 모호함을 거짓과 기만보다는 풍부함 쪽에 가까이 하게 한다는 미덕이 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수록, 이러한 대안 세계의 현실성은 더욱 커진다. 퍼트리셔 워는 [메타 픽션]에서, 삶을 허구화하는 까닭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는 그 이야기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대역해 줄 다른 사람들을 찾는다'(아이리쉬 머독)고 인용한다. 허구로서의 작품에는 현실을 지배하는 실증주의나 기능주의가 아닌, 유희의 공간이 펼쳐진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회귀하려는 유아의 시공간은 바로 놀이의 세계와 중첩된다. ● 놀이의 세계에서 분신과 변신은 흔히 일어난다. 놀이라고 해서 무한자유는 아니다. 예술처럼 놀이도 놀이 수행자가 정한 규칙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술과 놀이는 그것만을 위해 정해진 시공간 속에서 행해진다. 마치 17개로 이루어진 장기판의 말처럼 생긴 이 전시의 메인 작품은 정지된 이미지 가운데에서도 상상, 또는 규칙에 따르고 있는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퍼트리셔 워는 모든 예술이 또 다른 상징적인 세계들을 창조한다는 면에서 놀이라고 말한다. 픽션은 근본적으로 '--인체 함'의 한 세련된 방식이고, 그것은 놀이의 기본 요소이다. 작품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미 작가가 놀았던 게임이므로 관객 역시 그 게임을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미해야 하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와 해방의 한 형식으로의 놀이가 있다. 송휘원은 심오한 의미가 있는 위대한 작품보다는 놀이 같은 작품을 지향한다. 예술, 또는 삶에 기대되는 바의 지고한 의미와 목적 대신에 유희와 자유로움을 선택한다. 그것은 단지 깨고 나면 허무한 무위가 아니라, 새로운 의사소통의 수단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 이선영

Vol.20120626e | 송휘원展 / SONGHWIWON / 宋輝元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