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 Lee and The Line of Duration

이일展 / ILLEE / ?? / painting   2012_0619 ▶ 2012_0715

이일_BL-119_캔버스에 볼펜_190.5×297.2cm_2009

작가와의 대화 / 2012_0623_토요일_02:00pm

참석 : 이일, 정준모(미술평론가) * 선착순 80명, 예약 불가

갤러리 현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사간동 80번지 Tel. +82.2.2287.3500 www.galleryhyundai.com

갤러리현대에서는 재미한인작가 이일(b. 1952)의 개인전 『이일과 선의 영속성』을 선보인다. '볼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일은 1977년부터 뉴욕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한국에서 갖는 이번 16년 만의 개인전에는 볼펜선 만으로 화면을 채운 작품들과 함께, 빈 볼펜 혹은 대나무 등으로 표면을 긁어낸 신작들을 선보인다. 또한 그의 작업세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해 정준모 미술평론가와 이일 작가가 직접 대화를 주고 받는 시간(2012년 6월 23일, 오후 2시)을 마련하였다.

이일_BL-095_캔버스에 볼펜_221×365.8cm_2008

…(전략)… 이일의 작품에 나타난 무한한 길이의 선은 단지 길게 그린 선이 아니라 작가의 긴 호흡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의 이런 특색은 대부분의 회화 작품들 또는 통일된 선이나, 형태, 문양으로 구성된 다른 작품들과 탄생부터가 다르다. 이일의 작품은 마치 춤과 같다. 즉 이일이 긋는 선은 조화롭게 살아 움직이며 지나간 자리가 남긴 흔적으로, 그의 작품은 정지된 시각적인 그래픽아트가 아니라 생명력 있는 움직임 그 자체이다.

이일_BL-110_캔버스에 볼펜_188×188cm_2008

이일의 작품이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선을 그리는 대표적인 도구였던 붓이 독점했던 틀에서 벗어나 볼펜을 사용함으로써 무한의 공간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평론가 에드워드 레핑웰(Edward Leffingwell)이 이일의 작품에 대해 "전달체계(delivery system)"라고 멋지게 정의했듯이, 이일의 작품에는 새로운 시각적 리듬이 흐르고 있다. 이 리듬은 고밀도의 석판처럼 단단하지만, 우아하고도 환상적으로 중심에서부터 밖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이 움직임은 마치 행성과 소행성의 궤도나 입자가속기 안에서 원자를 구성하는 미세한 입자들이 터지는 찰나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 「BL-119」(2009)나 최신작인 「BL-1202」(2012) 같은 작품들을 보면, 흑암 같은 중심부-원래는 청색인 이 중심부는 고밀도로 검게 보인다-에서 시작된 선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무한히 퍼져나간다. 한편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중력의 어떤 힘에 이끌려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는 선들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몇 가닥 선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잘려나간 실, 혹은 철사처럼 공중에 갑자기 멈춘다.

이일_BL-089_종이에 볼펜_95.5×144.5cm_2006

이일이 작품의 매체로 볼펜을 선택한 것은 자유롭게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가 볼펜에 매료된 것은 볼펜이 역사가 없는 도구라는 사실 때문이다. 어떠한 예술사적 전통에도 속하지 않는 도구를 가지고 작업했기 때문에 이일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드로잉 방식으로 새로운 시각언어를 만들 수 있었다. 전통적인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일의 이런 시도는 후기 미니멀리즘 작가인 도로시아 록번(Dorothea Rockburne)이나 앨런 새럿(Alan Saret), 그리고 전통적인 화방에 혐오감을 보인 까닭에 1960년대 초기에 볼펜을 사용하여 독일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연작으로 그렸던 독일 작가 시그마 폴케(Sigmar Polke)와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화가 안지올라 가티(Angiola Gatti)의 볼펜 작품은 어떤 면에서 이일의 작품정신과 가깝지만, 흥미롭게도 두 작가는 각각 볼펜에 내재된 서정적인 잠재력을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 순수 예술 도구가 아닌 공산품이라는 볼펜을 사용하는 이일의 작품이 미술사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법과 수많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일이 자주 언급하듯 빽빽하게 그은 볼펜 잉크 선들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초상화에 나타난 어두운 배경과 유사하며, 이일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종횡으로 그어진 선들에서 대가들의 에칭에서 볼 수 있는 크로스 헤칭(crosshatching: 동판 기법으로 인그레이빙이나 에칭에서 서로 다른 평행선들이 일정 각도로 교차한 것을 지칭하며, 주로 입체감을 표현하거나 음영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을 감지할 수 있다. 이일이 작품에 사용하는 동판 기법은 그가 뉴욕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공부했던 부분이고, 그의 초기 작업이 추상화를 에칭용 송곳과 유사한 못으로 새기듯이 작업했던 방식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빛과 어둠, 즉 명암에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인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이 엿보이며, 광적인 선의 구도는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의 연작 판화인 『감옥(Carceri)』에 나타난 대가의 에칭 기법을 연상케 한다.

이일_TIRW-12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08.3×276.9cm_2012

지난 30년 동안 볼펜만을 사용한 화가 이일을 독일의 조형가인 조셉 앨버스(Josef Albers)처럼 일종의 순열의 매력에 빠져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이일은 화가로서 초기 작업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구조, 방법 및 관계 등을 모색해왔다. 최근에 그는 빈 볼펜으로 작업하며 종전의 작업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2012)부터 그는 대형 캔버스의 어두운 배경 위에 수천 개의 하얀 필라멘트로 연결된 반짝이는 100여 개의 빛의 구들을 그렸는데, 대표적으로 「TIRW-1201」(2012)에 나타난 이미지는 거미집 무리나 거대한 불꽃놀이를 연상케 한다. (혹자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을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이일이 평소 방식을 멋지게 역 발상하여 나온 결과인데, 우선 흰색 아크릴 물감을 여러 겹 바른 뒤에(그의 작업방식은 언제나 이렇듯 세심하다.) 그 위에 어두운 색의 유화 물감을 두텁게 덧씌운 뒤, 빈 볼펜으로 유화 물감 위에 선을 긋는다. 잉크가 나오지 않는 빈 볼펜 끝으로 어두운 색의 유화 물감 위를 가로지르면, 유화 물감이 벗겨지고 그 아래에 있던 아크릴 물감이 드러나며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가느다란 흰색의 선으로 되는데, 같은 강도로 계속 그어대면 환상적인 느낌으로 반짝이는 성단이 탄생된다.

이일_IW-10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08.3×297.2cm_2010

…(중략)… 이일의 회화나 드로잉은 고정된 틀에 넣어 잴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전적일 만큼 기존의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어디가 바탕이고 어디가 형태인가를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며, 드로잉의 매체와 회화의 매체를 구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고정된 틀 속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이일은 속박과 팽창을 결합하여 완성한 작품으로 그의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 문제의 본질적인 연속성을 제시한다. ■ 라파엘 루빈스타인

Vol.20120619h | 이일展 / ILLEE / ??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