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호展 / KWAKYOUNGHO / 郭泳昊 / sculpture   2012_0615 ▶ 2012_0628

곽영호展_갤러리 팔레 드 서울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통의동 6번지 Tel. +82.2.730.7707 www.palaisdeseoul.net

곽영호의 하늘 나무 Cosmic Tree ● 시인 김현승은 그의 시에서 사람과 가장 닮은 피조물을 나무라고 했다.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 나무이다. /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 소년들과 같다." 조각가 곽영호에게도 나무는 사람과 가장 닮은 피조물이다. 시인이 나무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곽영호는 베어진 나무, 버려진 나뭇가지에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한다.

곽영호_자세_브론즈_67×29×15cm

수년전, 향나무를 베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나무에서 사람 모습을 본 것이 계기가 된 이후 그는 직접 나무를 깎아 사람을 만들기 보다는 자연에 이미 내재된 형태를 발견하는 것에 조각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다이스트가 오브제를'선택'했던 것처럼 곽영호에게 선택은 창작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그에게 나무들 속에서 한 나무를 선택하는 것은 많 은 사물 속에서 단순히 한 개를 골라내는 것과는 다르다. 곽영호에게 나무는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품들과는 달리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생명체다. 그의'선택' 은 뒤샹의 오브제처럼 임의적(arbitrary) 선택에 의해 작품을 비개성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반대로 작품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곽영호의'선택'은 앙드레 브르통이 말한'객관적인(objective) 우연성'의 속성을 지닌다." 주체 속에서 작용하는 리비도가 현실에서 그 욕망의 대상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의 욕 구에 따라 현실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곽영호의 선택은 객관적 우연성에 의하여 개성을 지닌 생명을 발견하고 맞닥뜨리고자 한다. 프랑스 역사학자 다니엘 알레비가 프랑스 중부지방의 농가를 방문했을 때, 농부 한사람이 참나무로 포도주통을 만드는 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나무 는 쇠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에서 그것을 가려내야 하지요." 농부의 말처럼 나무는 옹이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다르고 휘어짐과 뒤틀림에 따라 달라지고 굵기에 따라 달라진다. 가지 하나에도 각각의 개성과 성격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곽영호가 한 나무를 선택하는 것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하나의 세계를 선택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선택된 나무들의 껍질을 벗기고 깎으며 최소한의 인공적 작위만을 거치면 그의 작품이 탄생한다. 곽영호는 지나친 작위로 나무를 제압하려하기 보다 는 최소한의 조각행위로 최대한의 자연미를 구현한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도 이 세상에 던져진 목적이 있듯 모든 사물은 그 목적을 가진다. 그의 조각하는 행위의 본질은 나무를 깎고 새겨 형상을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목적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곽영호는 자신을 버릴 줄 안다.

곽영호_자세_브론즈_79×30×15cm

과거로부터 자연을 존중했던 조각가들은 물질에 이미 내제되어 있는 형태를 존중하고 그것을 드러내려 하였다. 프랑스 조각가 알랭은 나무에 애초부터 어떤 형상들이 내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조각가라면 나무에 담겨진 형상들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알랭은 말하기를 "지팡이나 나무뿌리에 마리오네트 얼굴을 새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이해 할 것이다. 조금씩 그 자체와 닮아가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서는 그 일이 크게 신중을 요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유사성은 사라지고 모델의 모습은 없어진다"고 하였다. 때문에 알랭은 나무를 조각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조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차라리 사람은 사물이 원하는 것을 조각한다고 말하고 싶다." 알랭의 조각은"자연 속에 이미 새겨진 친근한 조각 앞에서 손이 칼을 잡게 하는 일종의 자연조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자연을 존중하는 조각가들은 물질을 완전히 제압하거나 길들이려하지 않고 원형과 날것으로서 물질이 충분히 자신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버려진 책상이나 의 자 같은 목재들을 모아 작업했던 루이스 네벨슨은 그녀의 조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때때로 (창작의) 권리를 갖는 것은 물질이다. 또한 때때로 그 권리를 갖는 것은 나다. 그것은 시소놀이를 허용한다. 나는 항상 음악처럼 한 끝과 그 반대 끝을 사용한다. 나는 물질이 내가 느끼는 것에 따라, 물질의 무게에 따라, 물질의 고유한 움직임에 따라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네벨슨의 언급처럼 곽영호의 조각은 작가의 창작의지와 감각의 질서가 물질과 어울려 작용과 반작용을 이루며 어떻게 작품화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 연주의 조각가의 임무는 물질의 본성과 특성, 그로부터 발현되는 형태들이 드러나도록 돕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은 작가의 의지와 손으로 만들어지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드러내는 주관적 존재다. 작가와 작품은 서로를 규정하고 서로를 드러낸다. 자연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결정 지워진 형태의 드러냄이라는 관점에서 판독되는 곽영호의 조각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생명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거나 극대화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종종 잊고 있지만 조각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예술적 미는 곧 생명을 담아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피그말리온의 신화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피그말리온의 신화적 관점에서 본다면 곽영호의 작품은 미의 완전한 구현이라는 조각의 기본에 가장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곽영호_파이프_브론즈_84×56×17cm

그런데 서두에서 인용한 김현승의 시에서 사람과 가장 닮은 피조물로 나무를 언급했지만 사람과 나무가 가장 닮은 것은 그 형상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늘을 지향하고 비상을 꿈꾸는 그 본성에 있다.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성장하는 존재다. 오로지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나무의 향일성 (向日性)은 하늘을 동경하고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을 닮았다. 김현승의 시는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 머리를 두르는 것은 /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 사랑하기 때문일까?"라고 이어진다. 사람과 나무는 그 모습 뿐 아니라 향일성의 본성이 닮았다. 바슐라르 역시 "인간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혼돈된 복합적 힘들이 이제 곧바로 서려고 애쓰는 존재이다"고 말하고 있다. 나무와 사람은 하늘을 꿈꾸는 존재인 것이다. 곽영호의'사람나무'또한 무수한 이파리를 날개처럼 팔락이며 비상을 시도하는 나무들처럼 언제나 날기를 꿈꾸는 존재다. 더 나아가 곽영호의 '사람나무'들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자의 존재다. '사람나무'들은 종종 한 개 또는 두어 개의 솟대들을 머리에 이고 있다. 그의 작 품들에서 등장하는 솟대들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넘어 하늘과 땅을 중재한다는 뜻을 갖는다. 곽영호 자신도 솟대를 사용한 의미에 대해 "하늘과 인간을 중재하는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곽영호_소리_브론즈_46×16×13cm

솟대를 머리에 인「사람나무」작품은 고대 세계인들의 관념에 자리 잡았던 하늘나무(Cosmic Tree)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아시아 뿐 아니라 북유럽이나 북아 메리카 등에서도 고대인들은 나무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인간과 신, 세속과 신성을 중재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하늘나무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수직적 중심의 신성한 존재다. 하늘나무가 지구의 수평적 중심으로 받아들여 질 때는 세계수(世界樹) 즉, World Tree의 의미를 갖는다. 세계수(Word Tree)는 생명의 나무로서 대지의 풍요와 생명을 만들어내는 근원으로 인식된다. 고대인들은 인간의 생명도 이 나무에서 기인한 것으로 믿었다. 곽영호의 작품은 하늘과 땅의 중재자로서 하늘나무이자 또한 지구의 중심인 생명수로서 세계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일찍이 하늘나무와 세계수를 상상했지 만 지금까지도 그 나무는 전설과 신화 속에서만 존재해 왔다. 하지만 곽영호는 끊임없이 대도시의 빌딩 숲 속에 그의 하늘나무들을 심고 있다. 그것은 시인 안 도현이「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에서 시의 언어로 불렀던 내용을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 새순 소록소록 돋고 /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 가랑잎 우수수 지리 / 그런데 만약에 /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안도현은 대도시의 인간들 대신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를 닮은 심성 고운 아이가 태어나겠지만 반대로 자작나무 대신 인간을 옮겨 심으면 지 구가 모두 공동묘지가 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결국 곽영호는 지구가 모두 묘지로 변하지 않도록, 그리고 미래의 새로 태어 날 아이들이 나무처럼 하늘을 동경하는 고운 심성을 지닐 수 있도록 대도시에 그의 하늘나무들을 옮겨 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조각은 그러므로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늘과 연 결시키고자 하며 이 지구가 묘지가 되지 않도록 기원하는 신성한 의식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이 나무를 닮도록 기원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그의 목조각들은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몰두하며 하늘을 동경했던 심성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다.

곽영호_자세_브론즈_82×29×18cm

곽영호는 가족을 부양하며 사회인으로서 생활해 나가느라 부득이 오랜 기간 조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고 있던 그는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조각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조각을 떠날 수 없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창작활동을 지속해왔다. 숱한 사회생활의 난관에도 불구하고 조각에 열정을 쏟고 있는 곽영호의 분신과도 같은 목조각들을 보면 프랑스 철학자 주프르와의 말이 떠오른다. "바람이 몰아치는 산 위의 한 그루 나무를 볼 때 우리는 무감동 하게 있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광경은 우리에게 인간을, 그 인간이 떠안은 인간 조건의 고통과 수많은 슬픈 상념을 떠 올려 주기 때문이다." 주프르와의 표현처럼 곽영호의'사람나무'는 거친 폭풍의 언덕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 나무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바람에 맞서는 강인한 나무다. 세상에 서 있는 모든 나무들은 한 번 쯤 거친 폭풍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폭풍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폭풍을 견딜 수 있는 꿋꿋함이다. 프랑시스 잠은『정원 단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허공 속에서 균형을 찾으려 애쓰는 나무들을 꿈꾼다... 한 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무화과나무의 삶도 빛을 찾아 나선 삶이니, 어려움을 겪어 가면서도 올곧게 서려는 바로 그런 삶이다." 곽영호의 하늘나무는 바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올 곧게 서려는 나무다. 어떤 난관 속에서도 곧게 서려함으로써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또한 인간은 날기보다는 날기를 소망하고 하늘을 지향함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곽영호 조각의 의미다 ■ 전강옥

곽영호_자세_브론즈_67×29×15cm

자연앞에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로 예술또한 자연의 일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작품의 소재를 자연에서 찾아 선택하였으며 나의 이러한 작업은 계속되어질것이다. 우연히 길이나 산,들에서 만나는 버려진 나무들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무를 보고 느끼는대로 나의 생각을 입혀나간다. 자연에서 얻은 나무가 나의 작업의 시작이며 나무에 작가 곽영호의 자그마한 힘을 보태어작품으로 승화시켜나가는 작업이다. 또한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 갈길을 모색할수 있는 작품이 되도록 노력할것이며, 솟대는 인간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마을 또한 가정의 수호신이며 풍요의 상징과 축하의 의미도 담고있다. 작가 곽영호와의 연결고리 로써의 상징적인 존재로 이용되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가교의 역할도 하고있다. 또한 전통과 현대를 연결 하는 다리역할도 하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작품을 보며 모든 사람이 조금이라고 행복하고 즐겁기를 바라며... ■ 곽영호

Vol.20120615k | 곽영호展 / KWAKYOUNGHO / 郭泳昊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