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남북–풍경으로 이어지는 우리 땅

고양 600년 기념展   2012_0613 ▶ 2012_072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612_화요일_05:00pm

참여작가 박정렬_손장섭_서용선_선우영_정창모_황재형

관람료 성인_3,000원 / 학생_2,000원 / 단체 1,000원 무료_2세 이하,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및 장애우

관람시간 / 화~목,일요일_10:00am~06:00pm / 금,토요일_10:00am~08:00pm / 월요일 휴관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816번지 Tel. +82.031.960.0180 / 1577.7766 www.artgy.or.kr

풍경의 발견과 회화적 해석하기-고양 아람누리의 『풍경남북』 전시를 위하여풍경의 발견 고양 아람누리 아람미술관에서는 고양문화재단 주최의 『풍경남북』이라는 이색적인 전시를 개최한다. 그동안 풍경화라는 이름의 전시는 적지 않게 많았다. 하지만 남북의 합동 풍경화 전시는 그렇지 않았다. 풍경 그것도 한반도 남북의 풍경을 한 자리에 모아 비교/보완하는 전시는 분명 이색전시이기에 충분하다. 『풍경남북』을 위해 초청된 화가는 북녘의 정창모와 선우영, 그리고 남녘의 손장섭, 황재형, 서용선, 박정렬 등이다. 이들 화가의 작품은 이미 개성적 세계의 구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들 남북의 화가를 통하여 우리는 어떤 풍경과 만날 것인가. 여기서 풍경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진정 무엇인가. ● 조선왕조의 풍경은 산수화라는 단어로 집약하여 화면에 담겼다. 산수화는 실재하는 풍경이라기보다 회귀하고 싶은 이상향에 가까웠다. 겉모습의 단순 묘사에 그치기보다 철학적 깊이가 적지 않았다. 서양의 풍경화와 차원을 달리했던 것이다. 서양의 풍경화가 풍경의 단순 재현에 무게를 주었다면, 동북아시아의 산수화는 형상보다 정신성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같은 자연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풍경화라 부르지 않고 산수화라 불렀다. 산수, 산은 움직이는 않는 것의 상징으로 보았고, 물은 움직이는 것의 상징으로 보았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그렇다면 산수는 이 세상을 총체적으로 집약하는 상징 언어라 할 수 있다. 자연의 외형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이 담고 있는 내면세계를 바로 보아라. 산수화가 주는 교훈이다. 겉모습에 연연하지 말고 정신세계의 깊이를 바로 보아라. 그렇다. 이 점이 서양의 풍경화와 출발부터 다른 점이다. ● 문제는 조선왕조 산수화의 바탕에 중국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연을 그리면서, 그리니까 마음을 그리면서, 중국식 화법을 중심 척도로 삼았다. 물론 중국 일색에 반기를 든 화가가 없지 않았으나 대세를 거역할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해도 할 말이 없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하니 조선의 유생들은 눈물을 흘렸다. 중국의 정통성을 조선에서 지키자는 충정이 샘솟았다. 하여 조선 중화주의니 뭐니 야릇한 말이 튀어나왔다. 중국 중심주의의 극치이다. 그것 참, 요즘 학자라는 분들도 이 점을 제법 강조하면서 어깨에 힘을 준다. 조선 중화주의 만세! 일부 학자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국의 움직임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 대국? 세월이 흐르면서 대국의 이름만 바뀌었던가. 중국, 일본, 미국? 이 부분에서 주체적 중심잡기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같은 자연을 보더라도 관점이 중요하다. 같은 풍경이라도 주체적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 18세기 겸재 정선 혹은 단원 김홍도의 존재는 찬란하다. 진경산수라고 불리는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우리 미술사를 화려하게 꾸며준다. 여태껏 중국식 화보에 의한 중국적 자연을 그리다 조선의 산천을 화면에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경정신은 우리의 산하를 새롭게 보는 시각을 자아냈다. 겸재나 단원은 중국식 산수화 같은 심산유곡에서 금강산이나 한강 같은 우리의 산하로 시선을 돌렸다. 실경을 화면에 담고자 한 화가의 의지는 거룩했다. 물론 진경산수라 하여 실제의 현장을 똑같이 그리는 것은 아니다. 겸재의 그림을 가지고 현장 답사를 할 때, 그림과 현장의 풍경이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경산수일지언정 풍경 자체를 사진 찍듯 똑같이 재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역시 진경산수라 해도 정신성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도 풍경을 사진 찍듯 재현하는 것에만 만족하는 그림은 평가에서 절하되기 십상이다. 이발소 그림이라고 폄하되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풍경에 대한 해석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 풍경은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아니 풍경은 발견해야 한다. 매일 같이 보는 풍경이라 해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바로 관점의 문제요, 해석의 문제이다. 해석에 따라 풍경의 의미는 달라진다. 네덜란드의 정신 병리학자 반덴베르크는 「모나리자」가 서구 최초로 풍경을 그린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 "모나리자는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풍경에서 소외된 (회화에서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녀 뒤쪽의 배경에 있는 풍경이 유명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풍경이기 때문에 풍경으로 그려진, 최초의 풍경인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풍경이고, 인간 행위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중세의 인간들이 몰랐던 자연, 그 자신 속에서 자족하고 있는 자연이며 인간적 요소가 원칙적으로 제거된 자연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본 가장 기묘한 풍경이다." (『The Changing Nature of Man』) ● 모나리자가 풍경에서 소외된 최초의 인물? 흥미로운 지적이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풍경의 초기 단계, 아직 풍경보다 기독의 말씀이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중세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여 서구사회에서 풍경화의 권리를 얻는 시기는 19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루소는 그의 『고백록』에서 알프스 자연과 자신과의 합일 체험을 기술했다. 그 이전의 알프스는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했었는데,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 이는 풍경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장애물'에 불과했던 알프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등산가를 알피니스트라고 부르게 되는 단초의 제공인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전달하는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그 가운데서도 「풍경의 발견」 부분은 흥미롭다. 가라타니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문학의 리얼리즘은 풍경 속에서 확립된다고. 그러니까 리얼리즘이 묘사하는 것은 풍경 또는 풍경으로서의 인간이지만 그러한 풍경은 본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소원화된 풍경으로서의 풍경'으로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걸음 더 나간다. 리얼리즘이란 단순히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풍경을 창출해 내야만 한다는 것. (풍경은) 실재로서 존재했지만 아무도 보지 않았던 풍경을 존재시키는 것. 따라서 리얼리스트는 언제나 '내적 인간'이란다. ● 일본에서 '풍경'이 발견된 것은 메이지 20년대라고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풍경의 발견, 물론 풍경은 '발견'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하지만 풍경으로서의 풍경은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풍경의 발견'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선적(線的)인 역사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왜곡되고 전도된 시간성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풍경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 왜곡을 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여기서 왜곡을 나는 해석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자 한다. 아무튼 풍경은 발견되는 것. 그러니까 풍경은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일지라도 역사학자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 의미부여를 다시 받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역사 혹은 풍경, 이들은 발견되어지고 또 해석되어지는 인간 사회의 중요한 동반자이리라.

정창모_노을_한지에 채색_49×175cm_2000
정창모_천화대 비정비봉폭포_한지에 채색_124×167cm_1997

한반도 풍경과 회화적 해석하기 ● 전시 『풍경남북』은 분단 이후의 정치/사회/문화적 입장의 차이를 보여준다.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풍경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 물론 같은 사회 안에서도 직업이나 신분의 계급계층에 따라 풍경의 의미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분단 이후 북녘 땅은 '혁명의 보루'로 대체되었다. 미술 장르조차 새롭게 하여 조선화 분야가 주종을 이루었다. 여기서 조선화라 함은 '힘 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기법을 특징으로 한다. 조선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채색화이면서 사실적 묘사, 그러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기초로 한다. 그래서 조선화의 특징을 선명성과 간결성으로 집약하기도 한다. 같은 풍경이면서도 이렇듯 표현방법의 통일성은 자못 천편일률이라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녘의 화가가 화폭에 담은 풍경은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어 흥미를 유발시킨다. ● 정창모(1931-2010)는 전북 전주 출신으로 외할아버지 효산 이광열의 영향으로 화가의 길에 입문했다. 그는 6.25전쟁 시기에 월북하여 개성에서 야간미술연구소를 다니면서 역시 월북화가인 임군홍의 지도를 받는 등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1957년 26세의 나이로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했고, 정종여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그의 장기는 조선화의 몰골화법으로 풍경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1970-80년대의 15년동안 약 2천점에 이르는 작품을 제작했고, 『화조화 기법』, 『풍경화 기법』과 같은 실기 기법서적도 출판했다. 그는 만수대창작사 풍경화실 실장(1975) 이래 국가 최고의 영예인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1989). 평생 3천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한 바, 그의 작품 1백점은 국보급으로 인정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002). 그의 대표작은 「북만의 봄」, 「금강산계곡」, 「만경대의 봄」, 「백두산의 봄」, 「분계선의 옛집터」 등이다. 그는 2000년 8월 남북이산가족 상봉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 정창모의 작품세계는 만수대창작사에서 발행한 『인민예술가 정창모작품집』(2004)을 통하여 자세히 알 수 있다. 개인화집 출판에 익숙하지 않은 평양 미술계의 사정을 감안할 때, 정창모 개인화집이 주는 비중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이 작품에 수록된 정창모의 작품들은 초기의 인물 중심 소재에서 점차적으로 순수 풍경화로 집중했음을 알게 한다. 조국산천의 다양한 풍광이 독득한 채색화 방법으로 재해석되어 있다. ● "정창모는 풍경화에서 자기의 개성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의 풍경화에서는 부드럽고 세련된 전통적인 몰골법의 필치를 실경재현의 수단으로 능숙하게 활용함으로써 색조가 부드럽고 시적인 정서를 짙게 풍기게 한다. 정창모의 그림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준법이다. 그의 풍경화에서 창조된 준법은 긴 여운을 남기면서 깊은 정서를 풍기는 것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그가 관록 있는 풍경화가로 알려지게 하였다. 그는 로년기에 몰골법을 더 깊이 연구하면서 화조화와 정물화의 보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위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성두원, 「통일의 념원 가슴에 안고」, 정창모작품집) ● 후배 선우영은 정창모의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특징으로 독서와 사색을 들었다. 정창모의 독서량은 매우 많은 바, 그 범위 또한 매우 다채롭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사색을 즐긴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내가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정창모작품집』) 역시 좋은 작품은 독서와 사색을 기초로 하여 탄생되는 것인가. 정창모의 풍경은 산하의 풍광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만년작에서는 먹을 많이 사용하는 등 기왕의 선명성과 차별을 갖게 했다.

선우영_금강산 만물상봉마다 단풍이 붉게붉게 물들다_한지에 채색_67×136cm_1998
선우영_칠보산 학무대_한지에 채색_45×69cm_1995

선우영(1946-2009)은 원래 공예 기술을 배우다 평양미술대학에서 산업미술을, 그리고 유화 기법을 습득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73년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에 들어가면서 조선화 화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세필 묘사에 능한 그는 청계 정종여에게 조선화 수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종여는 1930년대 이후 남한 미술계에서 독자적 화풍을 보이면서 활동한 바 있는 월북화가이다. 선우영은 1989년에 공훈예술가, 1992년에 인민예술가 칭호를 얻는 조선화의 중요작가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 60여 점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대표작으로 「범」, 「매」, 「호도해안포 영웅들」, 「감 풍년」, 「고구려 처녀」 등이 있다. (졸저,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 ● "조선화 부분에서 지금까지 다른 미술형식이 미치지 못하는 섬세한 형상을 수많이 창조하여 왔지만 선우영의 작품에서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밀도를 가진 세화를 창조한 례는 아직까지 없었다. 여기에 세화가로서 선우영이 조선화 형식 발전에 기여한 남다른 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우영의 세화기법은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현미경적으로 사물을 그리는 현실주의, 자연주의, 초현실주의와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그의 세화 그림들은 대상의 본질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들어 성격화함으로써 이여(爾汝)의 창작방법이 추구하는 형상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진다. 그의 세화들은 정서적 감정을 가지고 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더욱 강조되고 불필요하고 부차적인 것들은 생략된다. 따라서 필수불가결의 부분과 요소들은 더욱더 선명한 자태를 드러내며 아름다운 모습과 특징을 부각하고 있다."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 선우영은 섬세한 표현으로 일가를 이루었는 바, 그의 작품은 필수불가결의 부분만 선명한 자태로 집약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역시 이는 풍경의 재해석 부분과 맞물리는 표현이다. 그의 「칠보산 강선문」(2003)의 경우, 대담한 구도에 바위와 수림의 치밀한 표현기량은 조선화의 장점을 실감나게 했다. 「박연폭포」(2004)는 만년작임에도 불구하고 폭포수의 괴력이 화면 가득 담겨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거대한 물길의 측면에서 수직의 바위를 화면 앞으로 끌어 당기고 중심부에 폭포의 양감을 멀리 숲을 배경으로 하여 부각시킨 작품이다. 작가의 독자적 시각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는 역시 풍경의 발견 혹은 해석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화가는 폭포를 통하여 조국 산하의 역동성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손장섭_DMZ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400cm_2010
손장섭_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400cm_2007~8

북녘화가들에 비해 남녘화가들의 소재 선택이나 표현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손장섭, 황재형은 1980년대의 민주화 현장에서 미술활동을 펼친 진보적 화가였다. 그들은 조국의 산하를 새롭게 해석한 바, 그것은 여태껏 횡행하던 보수적 아카데미즘과 커다란 차별상을 보여주었다. 물론 한반도에서 풍경화가 새롭게 부각된 것은 1920-30년대이다. 이 시기는 도로망의 구축 등 교통의 발달과 이에 따른 경승지의 숙박시설이 점증하던 시기였다. 교통과 숙박시설의 발달은 곧 관광산업을 일으켜 세운 바, 그것의 당연한 결과로 풍경화의 시대를 탄생하게 했다. 여행하는 화가, 그들은 명승지를 화면에 담기 시작했고, 이같은 분위기는 일반인으로 하여금 명승지 관광이라는 새로운 생활환경을 촉구하기도 했다. 풍경화의 재인식, 여기에 근대적 산업사회와 궤도를 함께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하여 관광 레저산업의 발달과 풍경화의 친연성은 새로운 미술환경과도 연결되기도 했다. 손장섭은 근래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 "(현실과 발언) 이후엔 역사화 같은 것을 많이 했죠. 사건들, 그 전에는 4.19 그림을 그렸고, 그 이후에는 광주항쟁과 같은 역사화를 그렸죠. 그 다음에 자연을 훼손하는 것 같은 것 그림이 나왔지만, 주요 사회문제가 되는 것들을 주로 그렸어요. 금강산은 이중섭미술상을 받고 난 다음에 금강산을 갔었어요. 금강산 다녀와서 그걸로 작업을 했죠. 분단상황, 6.25, 광주항쟁, 4.19 ... 사건 일어난 것들 역사화를 많이 그렸어요. 그림이 우리가 배울 때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배웠는데, 그림이 결국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 거죠. 그림이라는 것은 바로 주변의 사건들, 생활들이죠. 엄밀히 얘기해서, 그림이 꽃을 그리는 것뿐만이 아니고, 인간이 사는 모습들을 그림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게 되었죠.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내 주변의 생활에 가깝게 접할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에요. 내 얘기를 해도 좋고, 사회하고 연관된 것, 그리고 개인사도 필요하고."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현실과 발언 30년』에서) ● 손장섭은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현장을 화면에 담았다. 그것은 역사의식의 조형적 발로였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 동인 참가 이후, 혹은 민중미술 활동 이후, 그의 화면은 역사와 풍경으로 집약되었다. 그는 철조망과 외인부대 주둔지로서의 풍경을 예리한 시각으로 담았다. 손장섭의 풍경은 분단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그는 "우리시대가 아직도 모순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철조망의 현장임을 확인하게 한다." (졸고, 손장섭 전시평, 『월간미술』, 2012, 5)

황재형_暮冬의 저녁_캔버스에 유채_145.5×227.3cm_2004
황재형_어머니, 어머니_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_193.9×130.3cm_2005

황재형은 이른바 광부출신 화가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80년대의 민중미술시대에 '두렁'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을 분명하게 들어냈다. 그는 처자와 함께 막장인생의 현장인 광산촌으로 들어갔다. 작가에게 있어 노동현실의 구체적 체험은 무엇보다 가치 있는 부분이다. 황재형은 풍경을 제3자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관조하기보다 풍경이라는 현장에 뛰어들어 풍경을 온몸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그의 작품은 좁은 미술계용이라기보다 인류 공동체의 이상과 인간해방을 위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졸저, 『우리 시대를 이끈 미술가 30인』, 참조) ● 황재형이 해석한 우리의 산하는 '질 흙과 뉠 땅'이다. 여기서 흙과 땅은 바로 우리의 산하를 의미하는 바, 그것의 알몸에 해당하는 대체어이기도 하다. 그는 폐허가 된 광산촌에서 계속 살면서 문화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폐광 진경'으로 세계 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오래간만에 개최한 가나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황재형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태백을 중심으로 한 을씨년스러운 광산촌 풍경은 정말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두툼한 물감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된 그의 풍경은 현장 재현 이상의 메시지가 강하게 스며 있었기 때문이었다. 풍경의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황재형은 탄광촌을 재인식하도록 대중에게 독자적 목소리로 각인시켰다.

서용선_웅석봉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1×91cm_2011
서용선_팔당3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04

서용선은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버리고 작업현장으로 돌아간 특이한 화가이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의 자연과 역사를 힘에 넘치는 붓질로 화면에 담는 작업을 해왔다. 조선초기의 수양대군 사건을 재해석한 일련의 작업들은 서용선 회화세계의 독특한 브랜드이기도 했다. 서용선의 풍경은 강렬한 색채와 필체를 특징으로 한다. 「지리산」 시리즈의 경우, 세부 묘사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커다란 부분만 생동감 넘치는 붓질로 형상화한다. 약동하는 자연, 거기에 살아 꿈틀거리는 역사의 현장이 있다. 서용선의 풍경은 결코 유한마담의 거실을 꾸미기 위한 나약하고 장식적인 작업이 아니다. 그는 음유시인처럼 풍경의 미세한 부분을 발탁하지만, 결코 음풍농월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서용선의 작품은 기운이 넘치면서 활달한 풍경의 단면을 보게한다.

박정렬_전북 정읍시 감곡면 승방리 밭_장지에 자연채색_138×720cm_2011
박정렬_청산도 도닥리_장지에 자연채색_138×720cm_2010

박정렬은 석회와 자연색으로 시골풍경을 즐겨 그려왔다. 그의 화면은 특화되지 않은 시골의 한 구석, 그러니까 그곳은 마을 입구의 산등성이일 수 있고, 논밭의 구석일 수 있다. 그가 굳이 명승지 이외 이렇듯 이름 없는 장소에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조국산하에의 무한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표현방법은 섬세한 세필로 차분하게 대상을 묘사한다. 그렇다고 화려한 색채를 올리는 것도 아니다. 차분하면서도 다소곳한 그의 조형방법은 낯익은 풍경들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부담감 없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풍경들, 거기에 한국인의 자연관과 공유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이 땅에서 풍경화를 그린 화가들이 어찌 위의 화가들뿐이겠는가. 풍경을 재해석한 유능한 화가들, 역시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풍경남북』은 몇몇 작가의 경우로 한정하여 우리 시대의 '풍경'을 재음미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같은 풍경 전시는 계속 이어져도 좋을 것이다. 풍경은 늘 재해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주체에 따라 의미 또한 달라질 것이다. 하여 우리는 풍경의 발견과 그것의 회화적 해석하기에 인색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해석은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풍경의 발견, 우리는 이 부분에 방점을 찍어 풍요로운 풍경의 세계에서 거닐기를 축원한다. ■ 윤범모

Vol.20120613e | 풍경남북–풍경으로 이어지는 우리 땅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