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WER OF STEEL

도태근展 / DOTAEKEUN / 都泰根 / sculpture   2012_0613 ▶ 2012_0619

도태근_Position - Form Ⅰ_스틸_3m이내 설치_2012

초대일시 / 2012_06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30am~07:0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산은 그대로 있자고 하나 비바람이 놔두질 않는구나. ● 사각 철재 파이프로 집을 짓는 뼈대처럼 사각형 틀을 세웠다. 지붕처럼 윗면은 경사를 주었다. 그런데 비슷한 형태이지만 서로 크기가 다른 뼈대가 하나 더 있다. 경사가 더 있거나 혹은 경사가 없는 조금 작은 구조물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집을 짓는 구조가 이중으로 된 것처럼 하나의 구조물이 더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같은 재료로 다만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을 뿐이다. 여기에 둥근 파이프들을 자르고, 깎고, 다듬고, 용접해서 만든 작은 철판을 와이어로 뼈대구조물에 매달았다. 이 철판들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집게로 누른 자국, 가위로 자른 자국, 흠집이 표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만 날카롭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다듬어진 것들을 구조물 꼭대기에서 동일한 지점까지 내려오게끔 매달았다. 이런 일련의 작품들은 서로 조합하면 전체가 하나로 되기도 하고, 그 각각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언제든지 작품은 서로 독립적이었다가 혹은 연쇄체적인 부분의 하나가 되기도 하는 비-자율적 작품형식을 가지고 있다. ● 이처럼 도태근 작품은 미술장르에서 흔히 말하게 되는 묘사와 색은 없다. 그의 작품에는 오직 철이라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격(物性)과 그것이 만든 구조(構造)가 있다. 거기에 숨겨진 유기적 형태에는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이미 위에서 말했던 집의 뼈대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작업과 그 결과물인 작품이 추구하고 있는 이데아(Idea)나 에이도스(Eidos)라고 할 수는 없다. 일순 관람객의 눈에는 혹은 표면의미로 이해하기에는 무엇과 비교해서 그 형상(形象)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람객은 철로만 구조를 이루고 있는 도태근의 작품을 낯설게 마주칠 뿐이다. ● 도태근 작업은 표면구조로 보면 재료나 구성형식은 이전에 몇 번의 개인전에서 발표했던 작품들과 이번에 발표하는 작품들 사이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철을 재료로 하는 것도 그렇고 큰 틀 안에 마치 커다란 철판에서 무심히 뜯어낸 조각들을 와이어에 매단 형식도 이전의 작업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무언가 진전되고 보다 구조화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제작방법과 형식에서 혹은 물성을 변화시키고 작품을 매다는 구조형식을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알기위해서는 당연히 그의 작품변화에 관해서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작품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후설의 현상학(phenomenology)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의 의식밖에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선험적 환원(transcendental reduction)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즉 물질형식이 나의 의식현상으로 들어와 순수현상(fine phenomena) 그 자체로 환원되면서 새로운 인식의 차원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가 만든 작품의 형상 혹은 인위적 힘으로 가해진 물질형상이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원-형태(prototype)로 되돌아갈 수 있는 형상 환원(eidetic reduction)을 통하여 그가 의미하고자 하는 본질을 직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것이 무슨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더 명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태근_Position - Form Ⅱ_스틸_3m이내 설치_2012
도태근_Position - Form Ⅲ_스틸_3m이내 설치_2012
도태근_Position - Form Ⅳ_스틸_3m이내 설치_2012

도태근의 작업은 5회 개인전에서 발표했던 작품과 6회 개인전에서 발표했던 작품에서 제작방법에서 약간 차이를 드러낸다. 5회에서는 작품형태 자체가 추상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철로 제작한 것들은 다시 브론즈로 전환시켜 물성을 변화시킨 것이 하나의 주된 그의 작업과정이었다. 철이 가지고 있는 물성, 즉 딱딱하고 차가운 물성에서 브론즈가 가지고 있는 부드럽고 섬세한 물성으로 전환시켜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이것은 철로 제작한 것을 다시 브론즈로 재제작하는 과정을 거쳤는가하는 것이 의미있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일단 단순하게 답하면, 아마도 철의 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철의 물성을 브론즈의 물성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곧 다른 차원의 인식과정으로 나아가라는 지시의미가 아닐까. ● 하지만, 이런 방법은 6회에서는 철이라는 물성을 브론즈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생략하고 그 자체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신에 작품을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변화를 꾀했다. 5회에서는 좌대 위에 작품을 놓는 방식으로 전시장에 놓이던 것이, 즉 조각 작품을 놓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었지만, 6회부터는 작품을 하나의 커다란 틀 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각각의 작품을 매다는 형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구조 틀 꼭대기에서 일정한 길이와 간격으로 와이어를 설치하고 그 끝에 매달은 것이다. 구조 속에서 자유로이 움직이고 싶으나 구조에 갇혀있는 아니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추측하게 한다. ● 또 7회에서는 이런 작품을 갇혀진 공간 속에 집어넣어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밀폐된 직사각형을 만들고 작은 사각형 창을 내고 그 속에 작품을 집어넣는 형식으로 구조 혹은 틀이 작품과 하나가 되는 형식으로 작품을 전시했던 것이다. 이렇게 표면의미 구조는 틀과 작품이 결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갇혀진 조금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 혹은 반대로 보면 완벽한 보호처럼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한 형식을 보여 준 것이 바로 7회 개인전에서 보여준 작품 형식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보여줄 작품 형식은 이미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다.

도태근_Position - Form Ⅴ_스틸_3m이내 설치_2012
도태근_Position - Form Ⅵ_스틸_3m이내 설치_2012

이렇게 그가 작품을 놓는 형식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모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지점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지(擔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주체(subject)의 탈-중심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조심스럽게 의심한다. 인간이 만든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회적 현상 속에서 의식(sense)의 주체였던 인간 즉 수백 년 동안 이어져왔던 이성의 존재로서 인간이 가졌던 폭력적인 주체의식을 배제하려던 구조주의(structuralism)가 도태근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딱히 구조주의가 아니더라도 결과만을 놓고 보면 거만한 주체로서 인간 이성을 배제하고만 역사적인 사건은 많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를 우주에서 특권적 지위를 박탈해버렸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우주관은 인간의 영원한 소망이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꿈을 좌절시켰고, 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주체의 사고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다윈의「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 in the Struggle for Life」(원제목이 이렇게 긴 줄은 처음 알았다)에서는 인간을 생물학적 진화의 전체적 연쇄를 이루는 작은 부분으로 개념화하면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치에서 인간을 끌어내렸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 것이다. 또 프로이드는 인간의 이성이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율적인 주체라고 여겨온 자아개념을 무의식(unconsciousness)이라는 것으로 송두리째 격하시켰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밝히고 만 것이다. ● 구조주의가 온갖 철학과 학문이 자연환경은 물론이고 사회와 문화현상의 중심에 인간을 자리매김하려 했던 것은 주관주의(subjectivism)이며 환상주의(illusionism)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부터 인간의 주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나 스스로 자유로운 의지로 나의 삶을 산다는 우리들의 환상주의 혹은 낙천적인 의식은 말 그대로 억견과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구조(structure)라는 것은 무의식의 질서이며 이와 같은 무의식적 구조가 인간실존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우리는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 속에서 익명의 객체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상징체계를 만드는 공통된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 질서를 우리 스스로 체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는 인간의 의식과 무관한 실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와 의식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으며,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이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객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 도태근의 작품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커다란 구조에 매달린 객체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심층적 서술구조(narrative structure)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커다란 사각형 파이프로 구조를 세운 것은 바로 사회적 문화적 상징체계와 다름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몰라도, 아니 우리 세계를 이루는 보편적 질서를 스스로 알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커다란 구조와 동일한 것이다. 거기에 매달린 스스로 자유롭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즉 주체가 아니라, 구조 속에 묻힌 객체로 상징되는 것이 바로 이리저리 뜯겨져 매달린 작품들이다. 그들은 절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날고 싶기도 하고, 앉고 싶기도 하고, 눕고 싶기도 하지만 객체로서 완벽한 자유는 없다. 오직 구조 속에서 스스로 체현하지 못하는 보편적 질서에 함께 휩쓸려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산이 그대로 있고자 하지만 비바람이 내버려 두질 않는 것처럼 구조 속에서 우리는 고독한 것이다. ● 현대사회는 독립된 개인으로 산다기보다는 회사원, 누구 아버지, 엄마 혹은 일반시민, 학생으로 살아간다. 익명의 무명씨는 주체가 사라진 낮선 세계에 홀로 피투(thrownness, 被投)된 단독자로서 스스로를 만나게 되고 일순간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 함몰된다. 일상생활에서 이 같은 체험은 일순간 관심의 흐름이 단절되면서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멈추면서 그 무명씨를 찰나적으로 사로잡게 된다. 이런 상태 즉 불안 상태에 있는 존재에 대한 상징체계로 도태근의 작업은 구조 속에 또 다른 작은 구조물을 매달아 놓게 된 심층적 기제가 작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임창섭

도태근_Position - Form Ⅶ_스틸_3m이내 설치_2012

이번 전시회는 이전작업형식의 연계해서 비형상과 비형상들의 대립된 구조들을 결합하여 철 조각작품을 설치하여 보여준다. 기능화된(원형쇠파이프)에 1차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가하여 나타난 형상표면위에 드로잉 하여 쇠를 자르고, 접고, 붙이고, 두들겨 나의 다양한 조형언어의 기호들을 재결합하여 새로운 시각적 형상들을 만들어 낸다. 만들어진 형상들은 기하학적 프레임의 공간속에 매달고, 띄워서 설치하였다. 즉, 재료가 갖는 물성의 변용과 공간해석(사물의 위치)에 대한 관계성으로 작품을 보여 주고자 한다. ■ 도태근

Vol.20120612d | 도태근展 / DOTAEKEUN / 都泰根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