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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청아아트센터 CHUNG-A ART CENTER 서울 송파구 방이동 89-22번지 보성 100주년 기념관 Tel. +82.2.406.2524 www.gallerychunga.com
작가 김형종은 현대 도시인의 일상이미지를 통하여 집요하면서도 은밀하게 현대 도시인의 삶을 관망한다.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그는, 판유리를 'water Jet cutter' 기법으로 잘라내어 인물이나 동물, 오브제의 실루엣 작업을 해오고 있다. 우리는 이들 이미지에서 남과 여의 모습, 아이와 두 어른이 있는 가족의 초상 등,다양한 일상이미지를 보아왔다. 그러나 같은 방법의 작업이지만, 이번 프랑스의 전시에서는 좀 더 특별한 이미지를 전개한다. 그것은 바로 108명의 다양한 인물상이다. 한 명, 두 명이상, 네 명, 다섯 명...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들... 이들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그들이기도 하다. 발이 닿는 부분을 지표면이라고 한다면, 이 걷고 있는 사람들 중에 땅에서 발이 약간 떠있거나, 땅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벽에서부터 바닥 혹은 땅으로 이동하며, 대부분 땅에서 제각기 방향이 같거나 다르거나, 움직이고 있거나 혹은 걷고 있다. 이들은 작가 자신이 일상 에서 경험한 인물상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은 일상, 다시 말하면 현실과 존재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세계는 언어의 그물망이며, 해석의 그물망이다. 모든 세계는 이미 그 나름대로 해석되어 있다. 이 해석은 일상성의 방식으로 전개되며 이러한 일상의 해석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그들(사람들)'이다. 그는 이 실존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데, 하나는 '존재해야한다'는 '존재 이행'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 자기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는 '각자성'이다. 인간의 각자 자기의 존재를 떠맡아서 존재해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실존'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각자 자기의 존재를 존재하는 것이 바로 '실존의 세계'이다. 김형종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일상 이미지들 역시 '그들'로 드러난 일상이미지라고 해석하여도 무방할것이다.
동양에서 108은 일반적으로 현실을 상징하기도 한다. 특히 불교적 전통에서 108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수(數)의 염주(念珠)를 만들어 신행(信行)을 한다. 이것은 인간의 번뇌를 108종으로 세분한 것이지만 세상의 근원은 하나이다. 일심을 잃지 않도록 하고, 또 잃더라도 빨리 되찾는 것, 다시 말하면 백팔번뇌를 끊는 길이 곧 수행인 것이다.
김형종의 작업에서 108개의 유리 인물상은 빛과 색의 개입에 의해 고정되기 보다는 유동성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들은 걷고 있다. 논자는 이 인물상의 움직임을 보면서 가장 일상적인 직립보행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했다. 조각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로댕Rodin의 작품이나 자코메티Giacometti의 그것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농부를 모델로 하여 표현한 로댕의 작품「걷고 있는 남자」는 두 다리에 무게를 실어 균형을 잡는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로 만들어 졌다. 양다리에 무게를 지탱하고서 농부가 걷는 자세를 취했을 때, "이건 정말 걷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외쳤다고 로댕은 회상한다. 포즈가 너무 곧고 독특하며, 진실해 보였던 것이다. 로댕은 거대 서사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상 보다는 단순한 일상의 인간 존재를 표현한 것이다. 상황 속의 인간을 보여주는 자코메티의 조각에서「비를 맞으며 서둘러 걷고 있는 나」와「시청광장」은 걸어가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인물들은 가까이 가든, 멀리 떨어져 있든지 언제나 그만큼의 거리를 지니고 있는 거리감을 개입시키고 있다. 미술사에 위대한 획을 그은 이 두 조각가의 작품들은 실존적이고 현상학적인(Phénoménologique) 인물이다.
그러나 김형종의 인물상들은 빛의 유희로 인한 시각적 환영을 연출하고 있다. 이들은 안정되기 보다는 불안한 느낌을 수반하는 형이상학적인 이중상(二重像)으로써, 커팅하거나 채색한 유리의 물성이 회화적 평면성과 결합하여 만들어 내는 사유의 공간이다. 음과 양, 채움과 비움 등 이중적 존재 문제를 야기 시키는 장소, 즉 기억과 흔적을 지닌 장소이다. ■ 이봉순
Vol.20120612a | 김형종展 / KIMHYUNGJONG / 金亨宗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