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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52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_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TV12 갤러리 TV12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81-11번지 B1 Tel. +82.2.3143.1210 www.television12.co.kr
블랙으로의 수렴, 또는 블랙으로부터의 발산 ● 배윤환의 「black gymnasium」전은 전시부제만 보면 온통 시커멀 것이라는 예상을 할 법도 하다. 그러나 정반대이다. 온갖 색은 다 나와 있고, 그만큼의 다양한 종류의 매체가 동원되었다. 블랙이 가지는 무게감이나 침울함도 많이 변형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블랙은 중요 부분에 포인트를 주지만, 정작 그 비중이 크지는 않다. 「black gymnasium」전에서 블랙은 하얀 캔버스나 종이, 또는 화이트 큐브에서 작품이나 작가의 현전을 과시하는 존재론적인 범주, 가령 공백과 대비되는 존재의 상징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그림자처럼 어떤 존재의 증거나 흔적에 더 가깝다. 블랙은 흑백논리처럼 세상을 나누는 가장 손쉬운 이항대립의 한 항목이 아니라, 모든 다양성을 싸안으려는 전략적 코드에 가깝다. 모든 색을 섞으면 나오는 블랙은 그 자체 안에 여러 가지 색이 잠재해 있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빛의 색을 모두 합하면 흰색이 나오지만, 검정을 얻기 위해서는 빛의 색들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색을 섞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색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늘 다른 색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색의 영향도 여러 가지 색, 즉 색채 배색을 전제로 한다. 색은 하얀 배경 위에서보다 검은 배경 위에서 더 빛을 발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배윤환의 블랙은 하나이면서 전부인, 즉 모든 색과 존재를 동시에 언급하는 역설적인 것이다. 블랙으로부터 솟아나온 다채로운 색이 빈 공간을 가득 매우면서 존재는 관계로, 그리고 과정으로 흩어진다. 동시에 블랙은 존재의 해체나 죽음을 야기할 완전한 흩어짐을 막는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그는 최대한 펼치면서도 최소한의 경계는 유지하려 한다. 그에게 블랙은 씨의 막처럼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보호막이자 추동력이다. 2011년부터 초부터 시작한 블랙 시리즈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블랙을 하나씩 현실화시키는 과정이다. 현재는 블랙이지만 다음에는 무슨 색이 될지 본인도 모른다. 블랙은 통상적으로 죽음이나 공포 같은 묵직한 이미지와 밀접하지만, 그는 자신 안의 블랙처럼 블랙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 블랙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면모에, 애매함까지 추가된다. 알록달록 백화만발한 세상에서 블랙은 창조자이자 파괴자이다. ● 작가에 의하면 검은색은 '다른 모든 색을 조율하고 진두지휘하는 권력자'이다. 그러나 권력은 억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은 지식과 쾌락을 생산한다. 단지 블랙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우연찮게도 블랙은 흑석동 작업실이나 헤이차오에서의 레지던시, 무엇보다도 그가 심취했던 미술사의 대가들이 공통적으로 블랙의 대가들이라는 점 또한 작용했다. 배윤환의 작품에서 블랙은 우선 강력함이라는 코드로 다가온다. 그것은 자신 안에 흘러넘치는 분열적 에너지를 수렴하고 싶은 욕망의 발로이다. 모든 것을 움츠리게 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올 1월에 한 작업인 「black GYM」을 보면, 마치 화산 폭발하는 것처럼 화면 양쪽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강한 음악에 맞추어 뚱땡이 아저씨부터 반인반수까지, 도저히 어떤 합리적 기준으로는 분류할 수 없는 다양한 존재들이 각자 운동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다. 놀이터이자 수련장인 체육관은 전쟁이나 재난 현장과도 다를 바 없이 정신산란하다. 메탈이나 펑크 음악, 그리고 만화 같은 하위문화의 코드가 관통하는 가운데, 보다 강해지고 싶은 남성적 욕망이 편재한다.
여기에서 블랙은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배트맨처럼 강한 존재로 변모시킨다. 귀여운 듯 익살맞은 괴물들은 강해지고 싶은 남성적 욕망을 풍자하는 캐릭터들이다. 강력함을 획득하려는 여정에서, 블랙이 가지는 푹 가라앉는 침울함은 강한 도약을 위한 일시적 후퇴처럼 보인다. 블랙은 배트맨같은 멋진 영웅도 낳지만, 고릴라처럼 야만적 영웅도 낳는다. 그것은 질서의 수립자나 수호자가 아니라, 깽판을 부리는 반(反)영웅이다. 영웅이든 반영웅이든, 그들은 세상 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어지럽힌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행동에 어울리는 방식은 생전 처음 크레파스를 잡은 아이처럼 그린 것들이다. 4개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초」, 「황」, 「홍」, 「청」은 비록 이야기의 결말은 융합과 화합이지만, 색, 형태, 글자들이 서로 엉기고, 심지어는 냄새와 소리까지 가세하면서 화면의 중심이 부재한 전면(all over)구도로 확장시킨다. 거기에서는 모든 요소들이 각자 동일한 강도로 말함으로서 아무것도 명확히 들리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잡다(雜多)한 형태 외에 색의 소리, 소리의 색이 공명한다. ● 검은 고릴라는 주변의 무질서를 극대화시킴으로서 권력자로서의 맹위를 떨친다. B4 정도 사이즈의 누런 판화 지들에 그린 드로잉들은 한 장에 하나씩 그려져서 인지, 상대적으로 질서가 잡힌 듯 보인다. 그러나 벽에 붙여놓든 쌓아놓든 서사의 순서는 없으며, 각자의 강렬한 영토를 만들어내며 팽팽하게 공존한다. 판화지에 그린 작품들은 블랙이라는 공통점만 가지는 다양한 필기구들이 동원된다. 판화지에 어울리는 먹으로 베이스를 깔고, 그 위에 검정색 오일파스텔, 크레파스, 싸인 펜, 얇은 펜으로 그린 것들은 꿈, 또는 백일몽이 바로 전사된 듯 생생하다. 거기에는 일관성 없으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들이 서식한다. 여기에 관철되는 일관성은 매체의 통일성, 그리고 어떤 형식의 작업을 하는 중이건 상관없이 늘 지속해온 수행일 뿐이다. 그는 같은 도상을 반복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작은 드로잉 작업들은 큰 작업도 꽉 채워줄만한 무한한 원천이 된다. ● 큰 작업을 할 때도 처음의 명확한 의도를 끝까지 관철하지 않는 그의 스타일은 이러한 작은 드로잉들의 결정적인 역할을 가늠하게 한다. 명확한 목표 없이 행해지는 크고 작은 드로잉들은 자동 기술적이지만, 무의식적이라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심사숙고할 겨를도 없이 몸에서, 또는 손에서 불쑥 나오는 것이지만, 추후에 퍼즐을 맞추어 보면 의미는 있다. 그에게 작업이란 자신의 재발견이자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무위의 행동이나 유희와도 다르다. 검은 필기구로 그려지는 드로잉이 자연스럽게 '블랙'이라는 코드와 연결된다면,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에나멜 페인팅에서 블랙은 미쳐 날뛰는 색깔들을 더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한술 더 뜨기 전략에 활용된다.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작정을 하고 시작 하며, 여느 때와 달리 망치지 않기 위해서 사전 스케치도 하는 완결성이 강한 에나멜 페인팅은, 일기 쓰듯 낙서하듯 하는 드로잉과 대조되는 듯하지만, 여기에서도 젓가락으로 마블링을 하는 등, 우연성이 수용될 최대한의 여지가 마련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 에나멜 페인팅은 검은색 고릴라가 '잉크 아일랜드'에서 색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초록을 찾은 여정이 담긴 10개의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첫 번째 그림인 「ink island_finding green 1」에서 뮤지컬 무대 같은 장소에서 바나나 왕의 미션을 부여 받은 고릴라는 모험에 가득한 여정을 통과하고, 용기 안의 물감들과 음식 이미지가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네 번째 그림 「ink island_finding green 4」에서 초록색 새를 만나지만, 결국 마지막에서 자신의 등 뒤에 이미 초록이 있음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이다. 고릴라의 여정만큼이나 화려한 색채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블랙은 다른 색과 더불어 빛난다. 이 시리즈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떠난다는 친숙한 서사 구조보다는, 검은색 무대 막이 젖혀지고 기이한 괴물들의 왕국이 펼쳐지며 복잡한 선과 색의 흐름과 소리, 육해공을 망라하는 차원의 이동 등에 더욱 주목하게 한다. ● 색색의 풍선처럼 붕 뜬 세계는 「spring soldiers」에서 다시 블랙에 의해 균형이 잡혀진다. 검은색 고릴라는 봄 동산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선포한다. 파괴는 고통과 공포의 비명을 야기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에 대한 황홀 또한 낳는다. 여기에서 확실한 자신의 주장이 담긴 이전의 작업 노트와 일기장 등이 불태워진다. 그것은 멸종동물이나 우표처럼 사라지는 중이다. 작가는 자신의 기본적 작업 스타일인 '무작위성'을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이 전시에서 블랙은 다양한 색을 블랙홀처럼 수렴시키는 선언 문 같은 역할을 한다. 이에 더하여 자신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글자들 또한 죽 써보았다. 그러나 에나멜+에폭시+원고지+우표+견출지+크레파스+펜 등이 동원된 그의 선언문 조의 작품은 본래의 무작위성에 또 다른 무작위성이 첨가된 것 같은 형국이다. 그가 사용하는 다양한 재료처럼 '억양이 바뀔 뿐, 말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했을 때의 맛', 그 탐식가적인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 거의 분열증에 가까운 산만함에 대해 작가는 고민을 많이 하지만, 작품이 단지 그 결과물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작품은 그러한 분열증을 치유하는 방편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예술작품이 광기의 증후인가 치유인가에 대한 오래된 문제는 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작가의 표현 욕구는 글이나 말처럼 단선적인 질서를 통해서 일관되게 펼쳐야 하는 주장 대신에 다성성(polyphony)으로 귀결된다. 다성성을 시각화하면 괴물이 된다. 그의 작품에서 이국적 동물 또한 낯설고 이질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괴물에 포함된다. 모든 색이 다 모여 있는 듯한 화방, 꽃밭, 정글 등은 세상에 대한 축도이며, 여기에서 블랙 괴물은 구축된 질서의 파괴를 추동하는 캐릭터이다. 잡다하게 휘발되어 버리는 힘들을 모두 모아 강력하게 뭔가를 실행하고 싶은 욕망이 블랙에 투사되어 있다. 그것은 야생의 검은 표범을 타고 있는 「정글북」의 주인공 모글리 처럼 세상의 또는 자신의 다채로움을 향유하면서도 제 뜻대로 제어하고 싶은 욕망인 것이다. ● 마치 동화책의 원화처럼 다소간 딱딱하게 걸려 진 작품설치는 자신의 이야기가 사적이고 소소한 것에 한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도 투사되어 있다. 그는 '개인적 일기가 아니라, 사회적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좋아했던 대가인 고야, 뷔페, 르동, 도미에, 도레 등이 대부분 블랙을 잘 썼을 뿐 아니라, 근대 계몽의 빛으로도 완전히 밝히지 못한 반쯤은 어둠에 잠긴 그들의 몽환적인 작품들이 사회적인 메시지 또한 강하게 내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블랙은 판화에서 기인한 것이 많았지만, 사회적 모순이 집중되기 시작한 근대 여명기의 짙은 그림자를 반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가는 화려한 궁정화가이면서 시대의 부패와 악습을 함께 옮겨낸 고야, 특히 「Caprichos」 시리즈에 전율을 느낀다. 그의 드로잉 북이나 「블랙 카프리초스」 시리즈는 고야의 노선을 따른다. 그가 살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를 풍자한 그림 아래에다 그에 걸 맞는 글을 써넣는 방식이다. 휙 써 갈긴 글자들은 그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그렸을 드로잉을 보충한다. ● 동시에 빈티지 느낌의 바탕은 블랙에 내재한 멜랑콜리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에바 헬러는 검정이 주는 감정을 탐색하는 대목에서, 그리스어로 검정은 멜라스(melas), 노랑은 클뢰(chloe), 이 둘을 합치면 멜랑콜리(melancholie)가 된다고 지적한다. 예전에는 멜랑콜리한 사람의 피는 검다고 믿었듯이, 블랙과 멜랑콜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멜랑콜리를 연구한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검은 태양」은 네르발의 시 중 '멜랑콜리의 검은 태양이 새겨져있다'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았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을 노래한 우울한 네르발이 dom Pernety의 「신화 연금술 사전」을 읽었다고 말하면서, '우울은 완전한 용해의 참된 기호이다. 그래서 물질은 태양광선을 받으며 비상하는 원자들보다 더 미세한 분자들로 용해되고 그 물질의 원자들은 영원한 물로 변한다. 철학자들은 이 용해 상태에게 죽음, 지옥, 바닥없는 저승의 심연, 암흑상태, 밤, 무덤, 가려진 태양 또는 일식과 월식이라는 이름을 붙었다'고 인용한다. 여기에서 '멜랑콜리는 물질의 부패를 의미'한다. ● 이 명칭을 검은색을 지닌 물질에 붙인 것은 '멜랑콜리라고 부르는 인간의 체액이 새까맣게 탄 검은 담즙처럼 보이고 그것이 슬프고 음울한 기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명확한 형태와 색채는 곧잘 망가지고 도취 속에 용해되곤 하는 배윤환의 작품은 욕망의 형태나 대상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는 멜랑콜리 환자의 증세와 유사하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이러한 우울증 환자는 자아와 생체까지도 용해시키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파괴적 희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울증의 곧잘 공격성과 연관된다. 배윤환의 작품에서 침울하게 찌그러져 있던 검은 고릴라가 사나운 공격 모드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죽음을 부르는 이 파괴 충동은 어디서 오는가? 「검은 태양」은 우울증 환자들의 수많은 꿈과 환몽에서 나타나는 멜랑콜리 증세에서 식인행위(cannibalism)를 발견한다. 그것은 내가 없애버리고 싶은 견디기 힘든 타자를 생생하게 더 잘 소유하기 위해 입안에(질이나 항문도 이 통제 작업에 동원될 수 있다) 넣고 싶어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고 본다.
상실하기 보다는 차라리 조각내고 분해하고 자르고 삼키고 소화하는 것이다. 멜랑콜리 증세인 식인적 상상은 상실과 죽음의 현실에 대한 부인(否認)이다. 부인은 분열을 작동시키고 표상과 행동의 활력을 저하시킨다. 지고한 창조자이자 버림받는 고아, 즉 저주받은 천재라는 근대에 확립된 예술가상에는 멜랑콜리라는 심리적 기제가 깊이 새겨져 있다. 전자매체에 의한 화려한 스펙터클의 사회가 펼쳐졌어도 근대 예술가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시대에, 멜랑콜리와 예술의 관계는 여전히 진행형의 문제이다. 배윤환의 「black gymnasium」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심연으로 푹 꺼져 들어가는 듯한, 또는 그 반대인 도약이 내포된 블랙의 무한한 스펙트럼과 관련된다. 스펙트럼이 접혀지면 블랙, 그것이 펼쳐지면 이세상의 다양한 색이 된다. 그것은 삶과 죽음만큼이나 간격이 있고, 또 그 긴밀한 순환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 어디서부터 분리되어 나온 지 알 수 없는 파편들과 논리적 의사전달을 가능케 하는 시간성의 삭제 등은 그 구체적인 표현이다. 「검은 태양」에 의하면 정신 분석가는 분열증이나 환각상태를 보이는 경계례 환자들(borderlines)에서 정신적이고 신체적 통일의 붕괴를, 혹은 비 통합을 해독한다고 말한다. 붕괴와 해체라는 지표는 죽음의 욕동의 최종적 표지이며, 기재 불가능한 분해와 향락의 마지막 문턱에서 형식은 탈 형식화 된다. 살아있음을 보증하는 선적 시간은 질서를 잃는다. 작가는 끊어진 듯 이어지는 각 작품에서 모종의 서사를 시도하지만, 주의 산만한 언어는 중심 잃은 시간성 속에 살아가게 한다. 특히 글자들을 꼴라주한 정신 사나운 작품들이 그러하다. 이 파편적 시간성 속에서 총칭적 진실을 사라지고 자신의 진실만이 두드러진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는 자신의 진실 속으로 내던져지고, 자신의 진실에 의해 완전히 장악 당한다고 본다. 광기를 통해 인간은 자신만의 진실 속으로 전락한다. ● 광기의 진실은 논리적 연관성이 없는 무의식적 자동성에 있다. 인간에게 광기의 진실은 이유가 없는 것이다. 광기는 그 자체로 말이 없다. 그러나 광기는 위대한 귀환의 언어를 말한다. 그 귀환은 현실의 수천갈래 길을 한없이 걷는 오랜 모험여행의 서사적 귀환이 아니라. 순간적 섬광에 의한 서정적 귀환이다. 섬광처럼 명멸, 또는 폭발하는 색채의 다발과 이러한 현실적 힘을 잠재적으로 포괄하는 블랙은 침묵을 넘어서는 광기의 언어이다. 그것은 종말의 언어이자 또 다른 시작의 언어이다. 마치 어둠과 빛의 관계처럼 말이다. 배윤환의 오마주 대상인 고야에게서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 감옥에 내던져진 광인의 광기가 아니라, 스스로 어둠 속에 빠져든 사람의 광기를 본다. 푸코에 의하면 고야가 그린 「이성의 잠」의 주제는 고전주의적 비이성을 둘러쌌을 어둠이다. 그러나 이 어둠 속에서 인간은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깊고 고독한 것과 소통한다. 이전시대 화가인 보슈나 브뤼겔의 경우와 달리, 고야에게는 형태들이 무(無)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 즉 그것들은 가장 단조로운 어둠에서만 뚜렷이 드러날 뿐이고, 어떤 것도 그것들의 기원과 종말 그리고 본질을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바닥이 없다. 여기에서 광기의 어둠은 한계가 없고, 모든 것의 종말과 시작이다. 푸코는 고야의 경우처럼 사드의 경우에도 비이성은 어둠 속에서 계속 잠깨어 있지만, 이 깨어있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힘과 관계를 맺는다고 본다. 비이성의 과거 모습이었던 비존재는 이제 파괴의 힘이 된다. 사드와 고야를 통해 서양세계는 폭력 속에서 이성을 초월하고 비극적 경험을 되찾는다. 사드와 고야 이후로 비이성은 모든 작품에서 근대 세계에 대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둠에 갇힌 근대 예술가에게 언어와 정신착란이 서로 얽힌다. 이러한 광기의 작품들에 의해 때로 이 세계가 정화된다는 점은 근대 이후의 시대에도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윤환의 「Black Gymnasium」은 편집과 분열을 넘나드는 근대와 근대 이후의 예술 언어에 널리 걸쳐 있는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 이선영
Vol.20120524a | 배윤환展 / BAEYOONHWAN / 裵倫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