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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523_수요일_06:00pm
주최 / 서울시 주관 / 서울문화재단_금천예술공장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서울문화재단 서울시창작공간 금천예술공장 PS333 SEOUL ART SPACE GEUMCHEON 서울 금천구 독산동 333-7번지 3층 Tel. +82.2.807.4800 geumcheon.seoulartspace.or.kr blog.naver.com/sas_g geumcheon.blogspot.com
거주지 유랑기 ● 「제장마을 숲- 자화상」에서, 그러니까, 김보중-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산 정상에 올라, 안개가 휘감고 있는 저 아래 풍경을 고고히 바라보는 방랑자가 아니다. 그는 숲속 나무들 사이를 꿰뚫고 동네를 탐사하며 건물들을 살피는데, 그러는 동안, 발과 지팡이도 쉬지 않는다. 내려다보는 대신, 때때로, 그는 올려다본다. 그리고 산동네 자락에서 하늘로 까마득히 이어지는 좁은 계단 끝, 소실점을 삼켜 버리는 바로 그 곳에, 정상 말고 옥상을 놓는다. 그는 방랑이 아니라 거주를, 아니, 여기 거주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나그네와 유랑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임을 그린다. 이번 개인전에서 그는 그런 거주지에 관한 묘사와 규범의 회화를 제시하고 있다. ● 이번 전시에 출품된 네 점의 「녹색 옥상」들은 오래된 저층 아파트 꼭대기에 으레 있음직한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낡은 건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콘크리트 균열들이 여기 저기 보이고 옥상 바닥에는 방수제인지 페인트인지를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작가에게는, 균열 보수처리 과정의 에폭시 자국이나 불규칙한 페인트 칠 그리고 그것들이 옥상에 고인 물 위로 반사되면서 만들어 내는 다양한 무늬와 패턴들이, 회화적 흥미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회화적이란 말을 단지 회화의 표면 곧 물질과 색채, 스트록으로 구성되는 '화질'의 차원에 한정하기보다는, 당연히, 건축물과 그 사이트로 표상되는 세계 속으로 예술이 개입하는 하나의 경로 및 방식에 대한 이해로 듣는다.
알다시피 건물에 금이 가고 틈이 생기면 곧바로 이는 신체의 안전과 재산상의 손실을 알리는 경보로 작동한다. 이 인덱스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숨겨야 한다는 부정의 기호이기 때문에 보수처리를 한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표면을 재도장 하는 게 상례이다. 그런데, 김보중의 그림에서 그 균열은 가려지기는커녕, 한껏 도드라져 나름의 존재를 세게 어필한다. 한편, 이들 그림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녹색은 다중이용시설에서 주로 안전과 구급, 진행의 방향을 알리는 용도로 쓰이며, 자연을 대표하는 색인지라 군인들의 위장복이나 동물의 보호색으로도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 상징이 「녹색 옥상」들에서는 안전보다는 붕괴의 전조로, 위장보다는 정체의 노출로 전도되고 있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그의 그림은 역사가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 우리가 지워버리고 싶은 불안, 은폐하고 싶은 '콘크리트 공화국'의 속성들을 'un-camouflage'하고 있다. ● 원래 콘크리트는 압축강도compressive strength가 높은데 비해 인장강도tensile strength가 낮은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인장강도 때문에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인장력tensile stress를 견뎌내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그럴 때마다 이 재료로 구축된 건축체가 터져버려 크고 작은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비유로 가져다 쓸 수 있다면,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이루어진 한국현대 사회체the socius는 물론이고 그와 분리 불가능한 거주자들의 공동체도 역사상 전례 없이 높은 압축강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해얄지. 동시에, 놀랍도록 취약해진 인장강도로 인해 조금만 밀어내거나 잡아당겨도 쉽게 터져버리고 마는 엉성한 기억의 구조물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해얄지.
사실, 김보중의 이번 전시 작품들을 스튜디오에서 보았을 때, 그림의 틈 사이로 어떤 노스탤지어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더랬다. 어린 시절 살았던 저층 아파트의 작은 공원과 도로, 여름방학이었던가 소설 『금각사』를 읽을 때 방안 한 가득 들어왔던 햇빛, 새로 이사 간 고층(이라고 해봤자 12층이었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 있었던 공동 수영장의 반짝이던 수면과 아이들의 함성, 그리곤 추운 한 겨울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방문하곤 했던 불광동 큰집과, 그 산동네의 긴 계단을 오르면서 힐끗 봤던 연탄재 옆의 사잣밥. 균열은 이렇게 난데없는 추억 속으로 나를 빠뜨렸지만, 그 그림들의 강한 현존성으로 인해 곧바로 나는 현재로 건져 올려진다. 과거를 헤집고 다니다가 지금으로 타임슬립하여, 그림 속 공간이 40여 년 전 시간대에 속한 곳이 아니라 현재도 엄연히 공존하는 장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김보중은 최근 삼 년간 그가 직접 가보거나 살았던 곳을 그린 그림들을 이번 전시에 출품한다. 되돌아보니 도시화와 난개발이 막 시작되던 그 즈음에 이미,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시공간 체험이 우리 몸에 새겨진 것 같다. 확실히 내 부친은 '시범' 아파트에 살던 식구들을 불광동 산동네에 데리고 가는 것을 편케 생각지 않으셨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불광동 산동네에는 북한산힐스테이트 단지가 들어섰고, 재개발조합장이 사망한 후 몇 년째 사업이 표류하고 있는 건너편 재개발지역에 내가 살고 있다. ● 김보중의 회화는 의식과 기억 그리고 몸의 균열을 서둘러 봉합하고 그 위에 회칠하려는 예술 유형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말처럼 세상을 보수화하거나, 평등과 연대성을 주장하는 글처럼 세계를 비현실화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글이나 말과도 또 다르게, 그의 그림은 다만 역사와 개체, 당대의 시공간과 기억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과 분열을 감각적으로 충만하게 구현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들은 사실을 감추거나 없애버리려는 기성 언어의 수사rhetoric보다는, 현실과 맞닥뜨려 자기 근육을 수시로 수축이완하며 강하게 준동하고 있는 소년의 신체를 닮았다고나 할까. 아마도 이것은 『우리시대의 비극론』에서 테리 이글턴이 말한 대로,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물질적으로 생존하려는 욕구만큼이나 강고하고 집요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한편,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 건물에 난 균열만큼이나 공통되게 우리 눈을 끄는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사물과 자연의 그림자들이다. 가령, 오래된 건물의 벽면과 형체를 그대로 노출하여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는 『꿀』의 어느 방을 그린 그림(「이태원-빈방」)에서, 중첩된 프레임 안에 있는 경찰관은 방 안까지 연장된 자신의 그림자 때문에 무게감을 갖게 된다. 경찰관 모형은 납작한데 오히려 그 실루엣은 입체적이니 말이다. 또 다른 그림, 「대부도-포도밭추수 이후」에서는 햇볕을 받아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는 나무줄기의 뒤엉킨 그림자들이, 그림 전면을 덮고 있는 붉은 흙과 함께, 왠지 불길한 기운을 더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근교도시의 밤풍경을 그린 「용인 야경」에서, 커다란 나무 아래 빛나고 있는 가로등의 노란 조명과 바닥에 넓게 깔려 있는 그림자는 순간 그곳을 숭고하게 보이게도 한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풍경화나 정물화 장르에서 그림자가 주는 다양한 회화적, 심리적 효과나 그것의 알레고리적 요소를 해당 장소의 특이성에 맞추어 변주시키고 있다. ● 그러다가,「녹색 옥상」들에서 균열과 페인트 자국이 그랬던 것처럼, 나무 그림자가 건물 벽면에 다채로운 무늬와 패턴을 만들어 내고 있는 풍경(「안창마을- 푸른 벽」)에 다다르면, 그림자는 그 자체로 틈새와 금이 된다. 단단한 회화의 지층에 균열이 가게 하는 이 그림자는 이제 육신의 네거티브로서, 줄곧 우리가 외면해 왔던 죽음을 직시하게 한다. 그의 그림에서 죽음은 무덤을 닮은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안창마을-푸른 벽」), 녹색이라는 보호색으로 덮여있기도 하다(「안창마을-녹색 벽」). 어느 쪽이던 간에, 영원히 살 것처럼 위장하며, 의식 저 아래로 깊이 담가 버리려고만 하는 바로 그 죽음의 실존을 그는 그림이라는 공동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네 점의 이면화二面畵diptych(「안창마을-핑크 벽」「안창마을-좁은 골목」「북아현동-좁은 골목」「북아현동-낡은 옥상」)는 종교적인 형식이나 그와 연관된 내용을 차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쩐지 생 이후를 묵상하게 한다. 빛과 그림자, 주름과 무늬, 금과 면, 원경과 클로즈업이 병치되어 있는 이 그림쌍pair에서 느껴지는 적막함과 쇠락함은 살아있는 인간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부재 가운데 화면에 포착된 아름답고 처연한 찰나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두 장으로 된 그림들은 그 연결 틈 사이에, 다만 생존! 을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타자화해온 죽음의 시야를 감추어 두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 그림들을 이면화裏面畵라고 불러도 좋겠다. ■ 백지숙
Vol.20120523h | 김보중展 / KIMBOJOONG / 金甫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