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525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리지카이 Li Jikai 李继开_시옹위 Xiong Yu 熊宇 쩡더롱 Zheng Delong 郑德龙_찌아강 Jia Gang 贾刚 인쥔 Yin Jun 尹俊_인쿤 Yin Kun 尹坤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화사한 인공정원 살고 있는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다음과 같은 달콤한 논리에 고착되고 있다. '새로움은 욕망을 생산하고, 그 욕망은 이윤을 생산하며, 이것은 아름답도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점철되어 있는 이 한 문장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면, 그 새록새록 한 의미들이 기생충이 알을 까듯이 수십 만 가지의 행태로 생활 속에 침투했음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중국의 당대예술에서 70년대 생 작가군을 이야기 하자고 한다면,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이 중국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서술해야 할듯하다. 아시다시피 문화대혁명은 중국현대사의 사회적 문화적 격동으로 중국사회에 교육의 파괴, 전통 도덕의 파괴, 문화유적과 전통 유산의 파괴, 소수민족 문화 핍박등으로 인해 중국인들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주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중국현대사를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물론 중국 당대 미술사 역시 그러하다. 앞선 세대의 주류 중국미술흐름인 냉소적 사실주의(Cynical realism), 정치적 팝(Political pop), 그리고 염속미술(Gaudy Art) 역시 이러한 중국의 격동의 현대사와의 상관관계가 있다. 단지 사회상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방법이 세대간, 경험의 차이로 달리 표현되었지만, 여전히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현재까지 지울 수 없는 중국인민들의 예술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1989년 중국에서는 천안문사태와 같은 또한 번의 격동의 시절이 있었지만, 이번 전시의 70년대의 작가군의 작품과의 상관관계를 밝힘에 있어 필자는 문화대혁명이 중국사회에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해 더 많은 주력을 기울여 서술하고자 한다.
1. 격동기 중국 (1966-1976: 문화대혁명) ●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은 근대에서 현재까지의 중국인민들의 사회, 문화, 역사 등에 엄청난 파급력을 끼쳤으며, 현재의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시는바와같이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진행되어져 왔으며, 사회적 정치적 격동기의 현대 중국사라고 할 수 있다. 공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 대혁명 즉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중국인민들 대부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경제활동이 일명 혁명활동 우선으로 정지되었다. 무엇보다도 현대 중국의 역사를 대참사로 이끈 것은 전통과 교육, 문화유산의 파괴였다.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기간 동안은 체계적인 교육이란 없었다. 이 기간 동안 대입시험은 잠정 폐기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은 농촌의 노동교화소로 가거나,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바로 중국을 떠나 망명하였다. 또한 도시의 젊은이들은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곳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포기한 채 공산당 선전교육만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당시 많은 이들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기 때문에, 학력은 초등이나 중학교 교육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이 잇는 사람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고, 후에 덩샤오핑 지지자나 서방측 목격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부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세대를 산출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 다음으로, 당시 마오의 사상은 전통 도덕과 관습을 제치고 중국에서 모든 것을 이끄는 중심논리가 되었다. 어린 홍위병의 권한은 군, 공안, 그리고 사법기관을 좌지우지 하면서, 중국의 전통예술과 전통사상은 구시대의 폐단으로 치부되면서, 그 자리를 마오쩌뚱 사상이 차지하기에 이른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당시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또는 구타하는 일이 흔히 일어났으며, 문혁의 지도부는 이러한 일들을 즉 전통을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 위와 같은 교육의 부재와 전통사상과 전통예술의 부정은 자연스럽게 문화유적과 전통 유산의 파괴를 낳았다. 이 기간 동안 건물, 공예, 서적 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었다. 공예품이나, 서적, 그리고 서양의 악기 등은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괴는 사실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으며, 중국 역사가들은 이러한 문화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종종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마오쩌뚱의 어록이 신앙이었던 당시에 종교의 탄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종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으로 홍위병들이 몰려와 사찰에 불을 지르고 승려들을 쫓아내는 폭력이 발생했다. 또한 당시 전통문화는 구습타파와 마오사상에 저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점술, 풍수지리, 전통의례, 중국고전학 그리고 음력 설 등이 폐기되거나 약화되면서, 마오 제 1일 주의만이 이 기간의 믿음이며, 신앙이며, 법이며, 규칙이 되었었다. ●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교육파괴, 전통도덕과 관습 파괴, 역사적 유산 파괴)라는 즉 문화대혁명이라는 기치아래 벌인 만행들은 당시의 사람들의 인권유린으로 이어졌다. 즉 혁명에 맞지 않는 이라는 명확한 기준 없이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의 첩자, 개, 수정주의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였으며, 수많은 지식인과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아사하거나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즉 계급투쟁과 정치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인재와 역사 그리고 문화가 소실된 시기였다.
2. 중국현대사의 격동기와 당대미술의 상관관계 ● 앞서 서술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며, 자주 언급되는 중국 당대 미술사의 주류 즉 완세주의, 정치적 팝, 염속예술 그리고 현재 70년대 생 주류작가들에게 칭해지는 잔혹세대 혹은 만화세대 일명 자아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문혁시기에 청소년기를 맞고, 천안문 사태때 청년기를 맞은 세대와 문혁기간 이후 출생하여 천안문사태때 청소년기를 맞은 세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또한 문혁이후의 개방과 개혁시작 그리고 천안문사태 이후의 자유화물결과 급속한 자본화 현상은 당대 중국 현대사와 인민들의 사상에 많은 혼란을 가중시켰음은 가히 짐작이 가능하리라 본다. ● 사실 중국 현대사에서는 사상과 언론 문화의 통제를 겪어왔다. 80년대가 되어서도 중국예술가에게 주체적인 예술 활동을 권한은 없었다. 전문 예술가들은 정부기관에 소속되어 학생을 가르치거나 부과된 작업을 제작하고 월급을 받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사회가 아닌 자아 표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표현의 제약이 심했다. 그러나 사상개방과 함께 서방의 사상이 젊은이들에게 확산되면서 점차 개인의 내면세계를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사회와 분리된 고독한 자아, 인간 존재의 의미 등에 관심이 점차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상개방은 아시다시피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시시각각 긴장과 완화의 과정이 반복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작가들은 심각하게 개인과 사회 권력간에 대립하는 중국의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이성과 본능의 대립 속에서 고독과 허무, 비극적 자조적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샤오깡(Zhang Xiaogang), 쪼춘야(Zhou chunya), 위엔민쥔(Yue minjun), 왕광이(Wang guangyi), 쩡판즈(Zeng fanzhi), 양샤오삔(Yang shaobin) 등이 이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작가 군이다. 즉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와 같은 격동기에 청년기를 보낸 작가들은 관념주의와 이상주의에 대해 회의적이고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즉 1960년 전후에 태어난 문혁과 개방 그리고 천안문 사건 그리고 거대한 자본시장의 변화에 내몰린 이 세대들은 수차례 배신과 유린을 경험했고, 이로 인해 어떠한 신념이나 이상을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의 작품들은 냉소적이고 허무적의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90년대이후 급속한 경제발달로 인한 배금주의가 싹트면서, 그 세태를 중국의 현대사의 잔혹한 시절의 상징이었던 문화대혁명시기의 포스터와 마오서적을 이용한 문화적 정치적 상업적 권력의 혼재된 작품을 쏟아 놓기에 이르렀다. ● 시기별 사적으로 뚜렷이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중국당대주류 예술 중에 염속예술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염속미술은 완세주의와 정치적 팝이 발단된 상업문화가 확산되면서, 조금 더 자본에 가깝고, 대중적 속성을 지닌 중국 현 대중의 통속성을 다루는 작가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주로 60년대 후반 출생의 작가군이 대부분으로, 이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저속함, 어리석음을 묘사했으며, 명확한 풍자나 비판보다는 찬양과 비판을 오가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작가군에는 펑정지에(Feng zhengjie)가 대표적이며, 그외 쫑삐아오(Zhong biao), 왕칭송(Wang qingsong) 등이 자리하고 있다.
3. 1970년대 생 자아세대의 특징 ● 서두부터 2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현대사, 그리고 앞선 당대예술가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이 많이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회와 예술의 관계가 뗄래야 떨 수 없는 관계이다 보니,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편이 이번 전시를 이해함에 있어 도움이 될 듯한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번 『눈부신 윤리학Ⅱ_자아세대』라는 명칭은 사실 작년에 치루어진 눈부신 윤리학의 후발이다. 상기의 전시에서 설명했듯이,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자본주의 격랑속으로 뛰어들었으며, 2012년 현재시점 거대한 공룡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미권이나 유럽과 같이 오랜 시기 동안 쌓아서 지속하고,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니라, 체제와 이념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살아온 중국인들의 당대예술을 논하고자 한다면, 당대 사회의 변화상을 알아야 함은 필수 일 것이다. ● 사실 각 나라마다의 여러 특수성이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될 작가군에 있어 어쩌면 이러한 생각을 혹자는 가질지 모른다. 자아세대라니? 자아가 없는 세대도 있는가? 혹은 중국에서 70년대생 작가군을 일컫는 말로 잔혹세대 혹은 만화세대라 한다. 수식어 없는 명사가 얼마나 추상적인지 아마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만화? 잔혹? 그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란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부분에 대한 조합으로 해석이 가능하리라 본다. 사실 잔혹이건, 만화건, 자아건 간에 중국에서 70년대 중반시기에 태어난 작가들은 중국현대사의 격동을 미미하게 겪은 첫 세대이다. 이들 세대는 감히 정치적 격동을 피한 세대라고 칭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삶이 많이 능숙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세대에선 이전세대와 확연히 다른 점이 포착이 된다. 즉 작품에 있어 정치적 성향(이념적 갈등)이 배제되어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에 세계와 인간의 본성 즉 생과 사에 대한 것에 대한 관심, 그러면서도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성향이 짙은 작품활동을 구가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30대 중후반의 세대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바로 이점일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념과 정치를 떠나, 처음으로 자기 표현을 구가한 중국의 첫 세대로 의미가 있다. 즉 이들 자아세대들은 작품에 있어 정치성이 배제되어 있으며, 경제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배제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 첫 세대로 의의가 있다. 이번 전시는 리지카이(Li jikai), 시옹위(Xiong yu), 쩡더롱(Zheng Delong), 찌아강(Jia gang), 인쥔(Yin jun), 그리고 60년대 후반 출생으로 앞선 눈부신 윤리학전시의 연결고리인 인쿤(Yin kun)의 작품을 통하여 현 당대 중국미술에 있어 가장 핵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30대중후반의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고자 한다. ■ 김미령
Vol.20120521d | 눈부신윤리학Ⅱ_자아세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