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주최/기획 / 아트 컴퍼니 긱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 컴퍼니 긱 Art Company GIG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32-30번지 Tel. +82.2.323.7395 www.artcompanygig.co.kr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아들이며 천상의 음악적 감각을 가진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피운 불이 잘 타지 않아 연기가 지나치게 나게 되고, 에우리디케는 연기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게 된다. 에우리디케의 눈물을 본 하객들은 말한다. "저것 봐. 신부가 눈물을 흘리다니 불행한 일이 벌어질거야" ● 이처럼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본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하는 것일까? 여기저기 자주 쓰이는, 이제는 死語처럼 되어버린 "아우라" 라는 말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라는 것은 예술작품이나 어떤 종교적 제의의 대상이 뿜어내는 신비적 분위기를 인간이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보았다. 논문『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에서는 아우라를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라고 다시 규정한다. 이때의 아우라는 대상에 대한 수동적 경험이라기 보다는, 인식주체가 대상을 통하여 작동하는 고유한 정신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와 달리 벤야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한다. 예술이 예배가치에서 전시가치로 기능 변화를 겪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본의 상실로 인한 아우라의 실종은 상징체계의 혼선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는 수많이 편재되어 있는 이미지와 상징의 홍수속에서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미지는 갈수록 실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현실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시뮬라시옹이 되어 간다. ● 본 전시는 매스미디어 세상에서 아우라의 파괴로 인한 상징성과 이미지의 혼란과 파괴, 전복을 담았다.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오브제와 상징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편재되어 있는 상징의 보편성에 도전한다. 권영성작가는 지도를 모티브로 그린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보는 지도의 figure가 아닌 파리채, 오렌지, 담배, 자장면 등의 사물, 눈이나 손 같은 신체의 일부를 차용한 지도를 작품 속에 담아낸다. 보통 지도는 우리에게 일종의 방향타이다. 방향성의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좀 다른가 보다. 일면 지도를 통해 작가는 객관성의 주관화를 노린다. 차도, 발자국 등으로 보이는 지도의 모습은 사실 알고 보면 작가 개인의 추억과 사유의 공간이며 그 편린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극한 개인 내면의 공간이다. 마치 이 지도를 통해 "나를 알아봐" 하는 수수께끼를 내는 듯하다. 보통 타자들에게 "지도"란 매력적인 매개체이지만 분명 주관화하기 힘든 소재이다. 작가는 이러한 지도의 상징성에 자신만의 모티브로 주체화시킨다. 이러한 상징성의 반전과 전복으로 권영성작가의 작품은 미로같다. 작품 속 지도의 사거리, 모퉁이, 등등 이곳 저곳 잘 뒤져보면 작가의 머리 속을 헤집어놓는 것 같은 쾌감에 빠질 것이다. 임성희작가의 작품에는 그림의 형식을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는 모종의 진실이 있다. 분홍빛 풍만한 살을 자랑하며 유유자적하는 돼지의 게으른 모습과, 가짜 식물처럼 인공적이면서 동물처럼 공격적인 느낌을 주는 통통한 모습의 식물은 작가 특유의 '밝고 환한 색채'의 옷을 입고 검은 유머의 단서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돼지 자체의 익살스러움을 강조함으로서 물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을 비틀린 웃음으로 차갑게 그려낸다. 돼지를 보고 우리들은 피상적으로 복스럽다고 한다. 그 내피를 들여다보면 사실, 불직적인 욕구에의 회귀가 들어있음을 숨길 수 없다. 작가는 이러한 우리내면의 속물근성을 재미있게 뒤틀러 비판하고 전복한다. 임성희 식 '블랙유머'의 핵심은 물화된 사회의 비인간화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드러나는 유쾌한 익살과 풍자성은 그의 돼지가 재현을 넘어서, 이 시대의 문화적 상징과 은유로 읽혀지는 데 기인한다. 박우식작가는 매중매체에 의해 전형화된 기호들을 피사체의 관점에서 뒤틀어 그리고 있는 사실주의 작가이다. 작가의 작품의 시작은 7,80년대 유행했던 극사실주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그들의 작품에 매료되어 흉내 내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보다 더 정교하게 묘사에만 집착하여 기계적이고 일상적 현실 재현만을 추구하던 지극히 무의미적 행위를 반복하는 행위는 작가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한다. 작가는 피사체의 얼굴을 확대해서 미묘한 표정과 감정의 세세함을 그려내려는 표현방식을 통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그것을 재현해 내어 사라지는 아우라의 소멸감을 맛보고, 복제본과 원본과의 관계를 모호하게 함으로 현대인들의 일상적 단면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최근의 작품은 재현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뽀로로, 피노키오, 춘리 등 게임이나 만화 등 대중의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절제된 사실주의로 그려 대중문화 속 상징의 이미지를 묘하게 뒤틀어버린다. 매스컴이나 미디어에서 쉽고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장면들, 또한 명품을 소개하는 잡지 속에 등장하는 모델의 동작과 표정, 그리고 대중적 인기를 받으며 유명해진 스타나 정치인, 한때 유행했던 게임 속 등장인물의 동작과 표정들을 모델을 통해 그대로 재현하게 한 뒤 사진을 직접 촬영하여 화면에 담아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스미디어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원본들과 그 원본을 담아내는 매스미디어, 그 미디어를 보고 작가는 모델을 통해 회화라는 형식 하에 재현을 한다. 그 작업을 통해 탄생된 작품은 몇 번의 아우라의 소멸이 이루어진 것일까? 그 소멸을 거쳐 탄생한 작품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러한 대상을 실제처럼 그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매할 수도 있는 것인가? 작가는 스스로 물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 아트 컴퍼니 긱
박우식의 회화는 극사실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고 있다. 박우식은 강형구의 극사실주의에서 보듯이 카메라가 찍은 피사체보다도 정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우리의 익숙한 일상의 감각에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 자신도 낯선 모습으로 느껴지도록 카메라의 각도를 포착하여 그것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극사실주의 그림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생각을 전복시키며 일상의 생각으로부터 일탈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의 인물화는 팝아트나 정치인들의 오마주로서 보기에는 작가자신과는 친한 인물들의 초상화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둥절하며 일상의 모습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일종의 낯선 풍경들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과 친한 지인들을 TV속의 광고모델과도 같은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대중문화의 세태에 편승하는 사람들과 대중의 전형화된 모습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playing model」,「insomnia」,「춘리」등 일부 작품들을 들여다 보면 대중문화의 전형적인 기호들을 그래는 것이 아니라 모델 자신의 일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모델 자신이나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성이라는 일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정숙한 여성이 아닌 남성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낯선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익숙한 일상의 모습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주변의 인물들로 하여금 TV의 광고모델과도 같은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주변의 모델들이나 유명인들의 인물들에 왜곡을 가함으로써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세계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2011년의 극사실주의의 회화는 TV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왜곡을 가함으로써 익숙한 일상에서 낯선 세계로의 일탈을 꿈꾸고 있다. 코가 잘린 사이보그의 두상, 사악하게 웃고있는 만화 캐릭터의 주인공인 뽀로로의 얼굴의 표정은 매일 익숙하게 보는 캐릭터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뽀로로의 밝은 표정과 명랑한 얼굴로 어린아이로 하여금 유쾌하고 밝은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지 못하는 사이보그나 또는 사악한 표정의 뽀로로를 통해 선한 모습이 아닌 인간의 본성을 어린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익숙한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난 일탈의 행동과도 같은 것이다. ■ 조관용
임성희 식 '블랙유머'의 핵심은 물화된 사회의 비인간화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드러나는 유쾌한 익살과 풍자성은 그의 돼지가 재현을 넘어서,이 시대의 문화적 상징과 은유로 읽혀지는 데 기인한다. 임성희의 그림에서, 탐욕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을 닮았지만 유유자적하는 게으른 돼지의 모습은 세상의 누구도 부럽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바로 돼지가 탐욕과 천박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복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이중코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이중의 코드를 가지고 철저히 물화되어 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꿰뚫어 본다. 몇몇 두드러지는 그림의 장치들은 '물화'된 사회를 조명해주는 극적 구성에 해당된다. 특히 명도와 채도가 강한 색의 대비, 뒤샹의「샘」을 차용한 소변기, 수영장, 쇼핑카트, 섬 등. 그런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주인공 돼지는 마치 은자의 삶을 즐기듯 평화롭고 유쾌하다. 예컨대 인위적으로 만든 조화처럼 보이는 식물로 가득한 섬에서 고독을 즐기거나, 초승달에 걸린 배를 타고 데이트를 즐기는 돼지 커플의 낭만을 우리는 훔쳐 볼 수 있다. 작가는 어딘가 달관한 사람처럼, 이제는 물화된 사회에 적응한 우리 삶을 향해 자조적인 미소를 짓거나, 아이마저 쇼핑카트의 물건처럼 취급할 수도 있는 비인간화된 사회에 대해 조용하고 씁쓸한 조소를 보낸다. 마치 팝아트 작가 조지 시걸의 작품인, 마릴린 먼로 포스터를 바라보는 남자의 무심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그런 것처럼,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문화산업적 자본의 힘에 저항하기조차 힘들 뿐 아니라 도저히 세상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무력감이 임성희의 작품에서 '자조적 미소'로 변주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쇼핑카트의 아이처럼 상품만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 기세인 '비인간화된 사회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작가의 외침은 과연 설득력 있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다시 말해 임성희의 돼지는 충분히 정치적인 힘을 갖는가? ■ 유현주
권영성은 근래 몇 해 동안 그러한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해왔다. 한데 초기 몇 점의 작품을 제외한 그의 지도는 모두 실재하는 땅의 지도가 아니라 주변의 익숙한 사물을 소재로 만든 가상의 지도이다. 파리채, 피자, 오렌지, 담배 등의 사물, 그리고 손이나 눈과 같은 신체의 일부 등이 그것이다. 소재의 형상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인공구조물을 꼼꼼하고 세밀하게 그려넣어 마치 한장의 실제 지도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화면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지명처럼 사용한 소재와 관련된 단어들을 세밀하게 붙임으로써 지도의 느낌을 강화하여 놓았다. 실제 지도를 화면에 재현하는 것에서 시작된 그의 작업은 매우 독특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큰 흡입력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일상적인 소재들을 지도라는 특이한 형식으로 해석하고 형상화하였을 뿐 아니라, 소재의 구체적인 부분들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지도를 읽듯 흥미롭게 살펴보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실제로 거리를 두고 보면 전체적인 형상과 색채로 인해 소재가 잘 드러나는 한편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작가가 소재의 세부를 어떻게 지도의 모습이 되도록 변형하고 꾸몄는가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작가는 작업에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눈에는 이제까지와 흡사한 지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사라지고 도로나 구획들로 상당히 단순화되고 형식화된 인체를 대상으로 한 작업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용 인체해부도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작가가 기존의 작업에 하나의 새로운 전개방향으로 택한 일련의 인체해부도의 일환이다. 다른 하나는 지도형식을 유지하되, 소재를 구체적인 사물에 국한하지 않고 붓자국 등 관념적이고 비물질적인 대상으로 소재를 넓혀가는 것이다. 이는 관심사나 실생활 등 현실에 보다 밀착된 소재를 작품화함으로써, 작업주체인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으로 담고 이를 통해 보는 이와의 정서적 소통을 강화하려는 방식으로 보인다. ■ 박정구
주지하다시피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는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이미지와 대상, 언어와 사고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전복시켰다. 이 작품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모순어법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의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그림 속 텍스트도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를 그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습에 따르면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마그리트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덧붙여 놓았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환영인 그림이기 때문이다. 즉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그리트의 그림은 먼저 우리의 상식적인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평소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사물과 관습화된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뜻하지 않은 충돌을 작품 속에 펼쳐 놓는다. 권영성, 박우식, 임성희 이 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신선한 경험이며,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낯섦과 수수께끼와 같은 의문은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줌과 동시에 우리의 머리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시각이미지와 상징의 관습화된 그늘 속에서 유쾌한 탈피와 비상을 꿈꾸게 한다. ■ 아트 컴퍼니 긱
Vol.20120518e | 상징의 교묘한 전복-박우식_임성희_권영성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