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Memories 소소한 기억들

이영수展 / LEEYOUNGSU / 李榮洙 / painting.sculpture.animation   2012_0517 ▶ 2012_0531

이영수_5월의 드라이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5×227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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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517_목요일_06:00pm

산토리니 서울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9:00pm / 화요일_10:00am~05:30pm

산토리니 서울 SANTORINI SEOUL 서울 마포구 서교동 357-1번지 서교프라자 B2-01 갤러리 1,2관 Tel. +82.2.322.8177 www.santoriniseoul.com

'꼬마 영수', 순수인식의 어린 매개자"어른들은 이 세계를 처음으로 인지하는 어린 아이들의 열려진 눈으로 보는 감탄을 계산하곤 한다. 아무 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아이들은 결국 아무 것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이영수_노랑머리 영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cm_2011

1. 이영수의 세계에서는 캐릭터 '꼬마영수' 가 이영수를 대변한다. 둥그런 얼굴에 까만 상고머리는 그가 도회지가 아니라 시골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라는 인상을 준다. 까맣고 동그란, 영롱한 눈동자로 인해 꼬마영수는 영특한 소년의 인상을 하고 있다. 특별히 콧대 없이 낮은 콧방울은 토속적 한국인의 표정을 선사한다. 대체적으로 약간 밑으로 처진 상태지만 이따금 경미하게 치켜 올려지는, 단촐한 하나의 획에 지나지 않는 눈썹은 감정이나 기분의 변화를 표출한다. 불쾌하거나 못마땅해 화가 날 때, 꼬마영수는 이 두 눈썹을 요긴하게 사용한다. 「슈퍼맨 콤플렉스」(2008)에서 특히 그랬다. 미루어 짐작컨대, 꼬마영수는 슈퍼맨 복장을 하고, 이라도 꼭 물지 않고서는 1만 원 권 지폐들이 난무하는 세속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꼬마영수는 '기특하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던가 보다. 하지만 이렇듯 이를 꼭 물고 참는 정도가 고작이다. 적대감이나 화의 표출은 거기까지다. 꼬마영수에게 그 이상의 공격성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반응과 행위의 정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순진한 소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 다시 「슈퍼맨 콤플렉스」예로 돌아오자. 왜 콤플렉스인가, 콤플렉스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꼬마영수는 아마도 잘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소년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꼬마영수는 알고 있다. 2009년에 그린 「묵묵히 도시락을 먹을 수밖에」에서도 그랬다. 꼬마영수는 괴롭힘을 당하는 약한 동급생을 마땅히 도와야 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도시락만 먹어야 했다. 얼굴에 흐르는 진땀으로 보아, 꼬마영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덩치 큰 친구가 무서워 그렇게 할 수 없었을 뿐. 하지만 그것이 떳떳하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라 비겁한 행동이라는 걸 우리는 대체 어떻게 알게 되는가? 그 기억은 왜 무덤덤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아픈 것으로서 떠오르는가? '그건 옳지 않다고 마음에 외치는 그 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왜 우리는 들려주는 대신 듣게 되는 것인가?

이영수_등산하는 할아버지 꼬마영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5cm_2011

2. 우리는 꼬마 영수에게 묻지 않는다. 소년이 그 질문에 잘 답할 거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은 꼬마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질문은 자신에게 던져질 수밖에 없다. 물음에 답해야 할 당사자는 질문을 던진 바로 당신이 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질문은 자신에게 던져지게 되기 마련이다. 꼬마영수는 현학적인 어른이 아니다. 공허한 말, 겉만 번지르르한 수사로 자신의 무지와 무감각을 은폐하고 아는 척함으로써,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스스로 무의미한 난해와 혼돈의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어른이 아니다.(대체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꼬마영수의 고유한 미성숙과 아름답고 순결한 무지(無知)에 의해 질문은 질문을 던진 당사자에게 침착하게 반려된다. 꼬마영수가 자신 앞에 선 사람들 각자를 '자신의 질문으로 자신과 만나는' 자기인식의 거울(mirror)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즉 인식하는 자가 아니라, 인식되는 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인식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인식되어지는 자'로, 질문을 하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받는(받아야 하는자)로 만나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이는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이 '순수인식'이라고 불렀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순수한 인식은 인식하는 자로 하여금 인식되어지는 자로 바뀌게 하는 인식이다. 반면 인식되어지는 자를 인식하는 자로 변신하게 만든 '근대적 이성'은 불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했던 이유인 것이다.

이영수_배낭여행 가는 꼬마영수_레진, 혼합재료_89×56×34cm_2012

"인식되는 만큼 사랑을 받는다. (tantum cognoscitur quantum diligitur)" ●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받는 만큼 사랑받는 것도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맥락이다. 꼬마영수는 질문을 각각 자신들에게 돌림으로써 그들을 보다 사랑받기에 적절한 내적 상태로 이동시키는, 몰트만적 순수인식으로 건너가게 하는 교각(bridge)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 앞에서처럼 꼬마영수 앞에서, 우리가 꼬장꼬장한 각자의 근대성을 잠시 내려놓은 채 편안함과 안도감으로 초대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영수_소소한 기억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2

3. 프랑스의 인기 동화 『색을 바꾸고 싶었던 늑대, Le loup qui voulait changer de couleur』에는 자신의 검회색 털을 몹시 싫어했던 늑대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털색깔이 너무 슬프다고 느꼈다. 결국 늑대는 각 요일마다 색을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몸 전체에 오렌지 껍질을 붙이기도 하고, 꽁꽁얼린 욕조에 몸을 담궈 극심한 추위로 온몸의 털을 퍼렇게 만들어보기도 했다. 빨간 스웨터에 빨간 스타킹을 신어보기도 했지만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일요일, 공작의 무지개색 깃털로 온몸을 장식했을 때 늑대는 비로소 변신에 성공한 자신의 모습에 감탄할 수 있었다. 그 멋지고 알록달록한 털들 덕에 늑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하루 종일 멋진 깃털에 반해버린 팬들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누렸던 여유로움과 평화로운 일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신경이 몹시 예민해져 집에 돌아온 늑대는 공작새 깃털을 모두 벗어 던져버리고, 다시 이전의 검회색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거울 앞에 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늑대로 사는 게 이렇게 좋은지 몰랐는 걸!" ● 『색을 바꾸고 싶었던 늑대』는 '자신의 수용'(l'acceptation de soi), 또는 자신을 사랑함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특별히 성형 열풍에 휩싸여 있는 현대한국인이 서글프게도 망각해버린 진실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는 다른 '멋진(?)'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아닌 모습을 차용한다. 이는 자신을 위해,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을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타인을 사용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인생이 동화 같다면, 아마도 언젠가는 그들도 타인을 가장하는 자신에 예민해져,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지는 순간에 도달할 지도 모른다. 실제에선 그것도 일주일 만에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면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시간에 깨닫게 되거나.

이영수_아이유 영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cm_2011

반면 꼬마영수의 얼굴에는 대상들에 대한 순진한 존경심과 감탄의 인상이 깃들어 있다. 크게 열린 눈은 상대를 즐거이 수용하는 낮고 겸손한 자세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진실함을 반영하고 있다. 그 시선은 대상-그것이 무엇이건-의 '침해할 수도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주권을 최소한의 손상도 없이 보증해 줄 것이다. 그의 큰 얼굴은 표정을 더욱 포용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이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포커페이스(pokerface)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특히 유용하다. 꼬마영수의 얼굴은 훨씬 더 살아있고 표정은 적은 움직임으로도 충분히 풍부하다. 이 얼굴, 이 표정만큼 사라져가는 시골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영원히 낯선 도회지에서 여전히 잠자리와 개구리와 나비가 날아다니는 동산을 꿈꾸는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꼬마영수는 이 시대와 우리 사회가 기꺼이 유기해버린 것들을 주섬주섬 모아 다시 사유와 감성의 틀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고추잠자리의 나지막한 비행, 가재잡던 냇가, 배추벌레를 먹는 병아리, 고개를 바짝 쳐든 해바라기…, 꼬마영수의 영롱한 눈빛을 감탄과 호기심으로 가득하게 했던 그것들은 모두 이 급진적인 도시화와 경쟁 일색의 시대를 지나며 극심한 성장 병을 앓고 있는 모든 한국인의 내적 상실을 지시하는 표준지표와 같은 것들이다.

이영수_지진 대피하는 일본인 꼬마영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1

꼬마영수의 표정과 몸짓과 옷매무새 하나하나가 이영수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그고, 잠자리를 잡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하지만, 그것들을 단지 회상의 기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꼬마영수는 이영수의 어린 시절을 매개하는 하나의 표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한국의 모든 '영수'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반어적 대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꼬마영수는 어느덧 퇴근 후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출근길에 허둥지둥 뛰는 샐러리맨이기도 하다. 피자를 배달하는 알바생이거나 콧수염이 난 중년의 노동자로서 어느덧 쳇바퀴 돌 듯 흘러가는 일상에 몸을 맡긴 가장이 되어있기도 하다. ● 이것이 '꼬마영수' 캐릭터를 대동하는 이영수 그림의 윤리학적 미학이다. 이영수의 세계는 치열한 사유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잘 우리의 상실된 기억과 끈을 놓쳐버린 사유, 닳아빠진 지루한 일상 밑으로 밀쳐두었던 새로운 인식과 상상의 시간대로 우리를 선뜻 다가서도록 하는 것이다. ■ 심상용

Vol.20120517k | 이영수展 / LEEYOUNGSU / 李榮洙 / painting.sculpture.anim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