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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5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물파공간 MULPA SPACE 서울 종로구 견지동 87-1번지 가야빌딩 1층 Tel. +82.(0)2.739.1997
눈앞에는 노랗고 파랗고 붉고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행여나 저 찬란한 꽃이 저물어갈 것이 아쉬웠던지 작가는 절정의 순간을 화면에다 붙들어놓은 탓에 우리 마음과 눈은 벌써 봄을 지나 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어느 한적한 산골길을 걷다가 이따금씩 외딴집 사립문 사이로 보곤 했던 화사한 복사꽃을 보는 것같은 기억을 상기시킨다.
서효숙은 가족을 따라 한동안 청주에 내려가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요 몇 년 사이 활발한 발표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꽃도 아마 시골생활을 하면서 자연에서 몸으로 익힌 것들을 자연스럽게 옮기고 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작가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무렵만 해도 첨단의 작품들을 발표하곤 했기 때문이다. 『로고스 파토스』전이나, 『서울현대미술제』, 『서울 프린트 클럽』, 『레알리떼 서울』 등에 발표한 작품들은 대부분 질료감이 두드러진 추상화거나 철망을 이용한 매체실험의 평면작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청주에서 생활을 하면서 청량한 자연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그것이 근래 작업의 예술적 자양분을 제공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가 그리는 꽃은 거의가 만개한 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정점에 달한 꽃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미지가 마치 가위로 잘라낸 듯 배경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흑색, 푸른색, 감청색 등의 단일색의 바탕위에 도려낸 듯한 꽃들이 살포시 얹혀 있는 것이다.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배경처리를 단색으로 하였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극적인 느낌을 살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극적인 느낌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대상의 근접처리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꽃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말하자면 꽃을 키울 수 있을만큼 확대해 어떻게 보면 꽃이 이렇게 우람하고 거대했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과장법은 '달리꽃'을 각각 네가지 방식으로 처리한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구도는 동일하지만 색상과 표정은 제 각각이다. 이 작품은 이미 막 만개하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동일한 구도의 꽃이 전혀 다른 꽃처럼 느껴지는 것은 색상차에서 온 것으로 작가는 대상에 색대비를 과감하게 접목시켰다. 즉 분홍색에다 파랑색을 대비시키거나 연초록에다 빨간색을 곁들이는 식이다. 색상대비가 큰 만큼 그 꽃들이 주는 이미지는 매우 강렬하고, 신비하게 다가온다. 말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실제의 꽃같지만 실은 재구성된 꽃이며 환상적인 이미지인 셈이다. 왜 이렇게 작가는 극적인 표현을 구사하였을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바로 이속에 작가가 우리에게 그림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와 평화의 꾸러미를 안겨주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는 꽃은 우리가 병문안을 갈때 들고 가는 꽃다발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현대인들은 치열한 삶속에서 타버린 심지처럼 연료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탄타로스(Tantlus)가 그렇지 않은가. 입술에서 찰랑거리는 물을 마시려고 하면 어느새 물이 내려앉고 또 배가 고파 과실을 먹으려고 하면 탐스러운 과실은 더 멀어진다. 물은 턱밑에서, 먹음직스런 과실은 눈앞에서 유혹하지만 정작 물을 마시고 과실을 먹으려고 하면 저만치 물러서버리며 실망과 환멸을 안겨줄 뿐이다.
위로의 전령(傳令)이라고 할까, 작가는 지친 영혼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그들에게 쉼과 평화를 주고 그들속에서 희망과 환희가 샘솟길 원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좀 과장되게 확대된 꽃의 이미지를 통해 일종의 주의효과, 즉 꽃의 존재를 강조하고 생명의 경이로움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가장 아름다운 땅으로 일컫는 에덴동산이 나온다. 이것은 종종 '기쁨의 정원'으로 번역되는데 이 동산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였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때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그 자신의 존엄에 어울리는 영적 기쁨'(아우구스티누스)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마음도, 진정한 쉼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도 망실되어버렸다. 신과의 멀어짐은 결국 인간의 본성까지도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결과 우리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불구의 존재가 되고 말았다. 탄타로스처럼 구하는 것을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셈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꽃은 충천한 생명력을 띠고 있다. 꽃은 빛을 향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만개한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그 빛이란 에덴동산을 비추는 빛이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비추는 빛이다. 그래서 작품타이틀도 「New insight on Life」이다. 생명없는 곳에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생명이 없는 곳에 감사가 싹을 튀우지 못한다. 일레인 스케리(Elaine Scarry) 교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라는 소책자에서 "정원은 아름다움을 위하여, 그 아름다움을 보고, 그속에 거닐고, 그속에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내용을 던져준다. 언제 우리가 아름다움을 생각해보았고, 그것을 느껴보았으며, 연애하듯 달콤함에 빠져 보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저런 사유로 그것을 다 빼앗겨버리지는 않았는지.. 그리하여 늘 상념에 젖어 '회상' 정도로 그치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우리에게 과감히 그런 도전을 한다. 지금 정원의 아름다움을 실컷 누려보라고 말이다. 아름다움은 정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데 있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건 각 사람의 '마음의 성향'이 결정지을 문제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서성록
Vol.20120516b | 서효숙展 / SUHHYOSOOK / 徐孝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