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astle in the Air

최지영展 / CHOIJIYOUNG / 崔芝榮 / painting   2012_0510 ▶ 2012_0527 / 공휴일 휴관

최지영_Bathtub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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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ART SEASONS Gallery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_01:00pm~06:00pm / 공휴일 휴관

아트시즌갤러리 ART SEASONS Gallery 1 Selegie Road, PoMo #02-21/24, Singapore 188306 Tel. +65.6741.6366 www.artseasonsgallery.com

죽음은 에로스처럼 속삭인다 ● 아마 관객은 최지영의 그림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소재와 색깔이 그런 기분을 자극한다. 길게 눕고 싶은 아늑한 침대, 지친 몸을 담그고 싶은 깊은 욕조, 그리고 눈을 부시게 하는 피곤한 빛으로부터 '어둠을 보호하는' 은은한 촛불들까지. 그의 그림들은 우리를 적막과 고요의 세상으로 이끈다. 게다가 그림의 색깔은 울긋불긋하지 않고 단색의 모노톤이다. 모노톤의 어둠이 공간을 지배하고, 그 어둠 속에서 대상은 조그만 빛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살며시 드러낸다. 바로크 회화처럼 영혼을 위무하는 어둠이 회화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최지영_Chandelier_캔버스에 유채_112×145cm×2_2011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최지영의 그림들은 모두 정물로 갈래지을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촛불' '샹들리에' '베개' 등은 전형적인 정물들이고, '침대' '소파' '욕조' 등도 넓은 의미의 정물에 속한다. ● 靜·物·. 글자 그대로 사물이 정지되어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정물화는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에 관한 그림들이다. 정지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 속성 때문에 정물에는 늘 죽음의 고요함이 스며들어 있다. 바로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들이 발견한 정물의 매력이다. 정물화 가운데 가장 자주 다뤄지는 꽃을 상상해보라. 그렇게 아름답고 건강한 꽃도 며칠 후면 시들고 색도 변한다. 바로크 화가들은 꽃 한 송이에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허무함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고, 그런 역설적인 감정을 정물화 속에 표현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정물을 죽음의 은유로 표현하기를 더 좋아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명제를 바로크의 화가들은 꽃 한 송이로 대신했다. '메멘토 모리', 곧 정물은 죽음이 된 것이다.

최지영_Curtain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10

최지영의 작품들은 바로크의 귀환처럼 보인다. 그가 즐겨 그린 '침대'를 보자. 새까만 배경 속에 은은하게 드러나 있는 침대에서 바로크의 거장인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은 어둠 속에 갇혀 있고, 빛을 받은 침대는 마치 무덤처럼 기다랗게 누워 있다. 잠을 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의 은유이다. 바로크의 어둠 속에 누워 있는 침대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좋을 영면의 시간을 유혹하고 있다. ● 그가 '침대'만큼 자주 그린 '푸른 욕조'는 또 어떤가? 그 속에 몸을 뉘고, 눈을 감고 있으면 나만 즐길 수 있는 절대고립의 평화가 가능할 것 같다. 쉰다는 것,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것, 물론 이것도 죽음의 세상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욕조를 그린 그림들도 기본적으로는 정물이라고 본다. 게다가 욕조가 있는 그림들은 대개가 푸른색으로 표현돼 있다. 블루는 고독하고, 죽은 것 같은 차가운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이용되는 색깔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블루를 떠올려보라. 그의 블루에서 외로움은 어느덧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블루는 저쪽 세상, 곧 피안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의 공간에서, 블루가 밤의 상징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지영_Bed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1

쾌락원칙을 넘어 ● 최지영의 작품들은 프로이트주의자들이 보면 무릎을 칠 테마들로 뒤덮여 있다. 그들의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최지영의 그림들은 죽음충동을 자극한다.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개념이기보다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인데, 생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불가능하지만 달콤한 꿈이다. 하지만 젊은 작가가 그 테마들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사실 작가들이 테마들을 너무 의식하면 별로 재미없다).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그림으로 대신 표현했다고 자주 말했다. 편안한 침대를 갖고 싶었고, 정갈한 욕조를 갖고 싶어서, 그림으로 대신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죽음 보다는 오히려 세속의 에로스적인 욕망이 그림으로 표현됐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최지영_Bed_캔버스에 유채_145×145cm_2010

에로스적인 욕망은 그의 회화 수법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그림은 일반적인 회화 수법과는 다르다. 붓으로 '칠을 하며' 형태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지워가며' 형태를 드러낸다. 그의 독특한 회화수법을 알기 위해 다시 '침대' 시리즈를 보자. 먼저 흰색 캔버스에 검정색(푸른 욕조의 경우는 푸른색)을 덧칠한다. 그리고는 침대의 형태에 따라 부분적으로 검정색을 지워낸다. 색을 모두 지워내면 바탕색인 흰색이 드러나고, 덜 지우면 세피아, 더욱 덜 지우면 좀 짙은 세피아가 드러난다. 검정색으로 덧칠해놓은 캔버스에서 그 검정색을 조금씩 지워가며 원했던 대상을 드러내는 식이다. 지워내기 전에 아무런 밑그림도 없이 눈대중만으로 침대를 만들어내고, 욕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 그런데 바로 이런 회화 수법은 초현실주의자 막스 에른스트가 즐겨 했던 그라타주(grattage, 색을 두텁게 칠한 후 표면을 긁어내는 것), 프로타주(frottage, 요철이 있는 물체에 종이를 대고 색연필 따위를 문질러 형태를 만드는 것) 등과 유사한 것이다. '긁어대고' '문지르는' 가운데 의도했던 이미지를 완성하는 수법이다. 당시의 관습을 모두 파괴하고자 했던 에른스트는 이 수법을 성행위와 관련지어, 회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회화의 과정으로서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긁어대고 문지르며, 전통의 구속에서 에로스를 해방시키는 전복적 기쁨을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지영_Candle lights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11

최지영은 작품은 에른스트의 행위와 비슷한 듯 약간 다르다. 비슷한 점은 그 수법에 잠재돼 있는 에로스적인 무의식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대개 정물과 같은 사물에 한정돼 있는 점이 에른스트와 다르다. 에른스트의 작품에는 에로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최지영의 작품에는 에로스와 죽음이 참 기묘하게 혼합돼 있는 셈이다. 프로이트가 그의 그림들을 본다면, "죽음은 에로스에 물들어 나타난다"는 자신의 명제를 되풀이 할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생명의 강렬한 은유처럼 보이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정물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 생명과 죽음이 기묘하게 얽혀 있는 그의 그림들이 또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궁금하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에로스의 찬양 쪽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바로크 화가들처럼 바니타스의 허무로 더욱 빠져들지, 아직은 단정하기 쉽지 않다. 아마 그 사이 어디쯤에서 당분간 방황할 것 같다. 그 방황의 흔적들은 지금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드러날 것이다. ■ 한창호

Vol.20120511m | 최지영展 / CHOIJIYOUNG / 崔芝榮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