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mboo, 空에 美親다

라규채展 / RAKYUCHAE / ??? / photography   2012_0509 ▶ 2012_0522

라규채_Bamboo #033_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11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나우 GALLERY NOW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대나무의 형과 색, 그 근원과 본질에 대한 사색 ● 사진이 어려운 이유는 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보는 대로의 표현이 힘든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의 표현이 힘들기 때문에 사진도 만만치 않게 공부와 성찰이 필요하다. 또 사진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도 기술적인 작동법 때문이 아니라 사물의 표상, 즉 존재의 드러남의 곤란성 때문이다. 때문에 누구나 처음에는 사진의 시작이 쉬웠으나 갈수록 어렵고 힘들고 막막해지는 것이 또한 사진이다. 쉽게 들어섰다가 울면서 나오는 것이 사진이다. 왜 그럴까? 왜 재밌고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던 사진이 갈수록,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것일까? 비단 사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나 결국의 눈과 카메라의 차이,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 찍는 것과 읽는 것의 차이, 눈앞에 현전하는 것과 그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근원 혹은 본질과의 차이 때문이다. ● 그렇다. 사진은 어느 순간 변한다. 어느 순간 이전과 달라지고 이전의 모습을 버리고 이전의 태도들을 배반한다. 알아야 보이고 깨달을 때 표현된다는 진리에 봉착하고, 이제 더 이상 놀랍고 재미있고 신기한 이미지가 아니라 올바른 눈과 마음, 깊은 정신과 영혼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어느덧 자각하게 된다. 예술도 표현도 결국 진리에 이르는 모습이므로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사진은 인간의 두 눈에 기계의 눈을 하나 더 얹혀서 세상과 마주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찍어낸 인간의 눈과 기계의 눈이 결합된 매체이다. 처음에는 도구의 작동법으로 그것들을 쉽게 얻어내다가 결국은 눈과 마음과 정신이 결정하는, 이것들이 이미지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만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비로소 카메라가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진을 찍는다는 표현 및 그 주체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사진은 분명 알아야 보이고 깨달을 때 표현된다. 그렇다면 이때 무엇을 알고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혹시 이것들이 동서양 철학들이 공히 말하는 사물 존재의 존재론과 사물 파악의 인식론은 아닐까? 또 이것들이 찍는 기술을 넘어서고 보이는 사물의 표현을 넘어서는 어떤 근원과 본질의 다가섬, 즉 사물의 근원에 대한 다가섬이나 사물의 속살을 까뒤집는 사물의 사물성이라고 하는 본질의 다가섬이 아닐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서양미학의 인식론, 기술론이 아무리 동양미학의 존재론, 관념론과 구별된다고 해도, 또 동양철학의 기(氣)와 영(靈)이 서양철학의 지(知)와 물(物)과 다르다 해도 양자는 궁극적으로 만나고 통하는 것이다. 사진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지극히 서구적인 산물의 카메라가 외계라는 시간인식과 그 자국의 생성이라는 동양적 인식론과 만나는 모습이 사진이다.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사진적 물질들은 기계미학이자 기계가 탄생시킨 기계이미지에 종사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눈과 마음과 정신이라는 동양적 관념이미지와 만날 때 가일층 깊이가 더해질 수 있다. 때문에 기계만 가지고서는, 또 물질을 둘러싼 현상만 가지고서는 부족하고 또 반대로 기계 이미지가 사진이므로 그것들을 도외시한 채 그저 관념론에 매몰되어 있으면 그 또한 한쪽에 치우친 결핍과 결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라규채_Bamboo #018_피그먼트 프린트_50×100cm_2010
라규채_Bamboo #019_피그먼트 프린트_50×100cm_2011

라규채의 작품 「대나무-空에 美親다」는 그런 맥락에서 바라보고 읽으면 좋다. 사물형상에 대한 그의 주요 인식은 무엇보다 '空'이다. 작가가 상당부분 불교용어 혹은 동양(무위)사상의 언술들을 끌어들이고 있어 이해의 어려움이 따르긴 해도 핵심은 명료하다. 그는 겉은 알차나 속은 텅 비어 있고, 하늘로 솟아오르나 휘어짐이 땅에 닿고, 푸르름으로 덧칠되었으나 하늘과 햇살과 바람 앞에서 만상의 색으로 둔갑하는 대나무를 소재로 취했다. 적절한 소재의 선택이다. 사진은 궁극적으로 "사진, 본대로 찍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찍는 것이다"라는 사물과 사물의 속성, 즉 사물의 사물성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 혹은 철학적 소여가 그의 사진이다. 그렇다. 카메라는 눈에 연장된 보는 장치이다. 보이니까 찍고 보이니까 그것이 그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눈이 지각한 현상일 뿐 사물의 근원 혹은 본질 그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물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고 또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는 사물 본래의 자연성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만약 보이는 것이 진리라면 더 이상 진리는 없으며 구할 필요도 없고 탐색할 가치도 없다. 동서양 철학이 말하듯이 진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고 찾기 어려운 것이다. ● 같은 맥락이다. 라규채의 사진은 대나무 형(상)과 대나무 색(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리의 形色에 다가서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공(空)에 주목한다. 공이란 무엇인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공은 '빈 괄호'와 같은 것이다. 사물의 형상은 빈 괄호처럼 무언가로 채워져 있거나 이미 무엇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흐름 속에서 채워지다가 비워지는 것이 공의 개념이다. 라틴철학에서는 비슷한 개념으로서 '라사rasa'라는 말을 쓴다. 빈 괄호로서 텅 빈 공백의 개념이다. 라규채의 대나무 형상은 하나의 모습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대나무 형상은 사물과 사물성의 흐름 속에 놓인 空으로 본다. 흔들림을 통해서 사물의 사물성을 실체 없는 어떤 것, 즉 본질과 근원의 우주적 리듬이라는 "미세하게 흐르는 파동과 진동"에서 찾는다. ● 그렇다. 사진은 시간으로부터 생성되고 소멸되는 시간예술이다. 셔터속도라고 하는 물리적 시간의 문도 있고 '블러blur'라고 하는 도구적인 시간의 매개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계적, 도구적 본질이지 존재론적, 인식론적 사물, 사물성은 아니다. 형상은 카메라보다 앞에 있으며 카메라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고, 있으려는 찰나 속에 있다. 카메라에 찍혔다고 그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라규채의 형상인식이 그것들이다. 사물의 본질로서 공의 개념, 그러니까 물리적 시간, 기계적 시간 너머에 있는 비정형, 무정형의 形에 천착이다.

라규채_Bamboo #020_피그먼트 프린트_50×100cm_2011
라규채_Bamboo #023_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11

라규채 사진에서 또 하나 주요 인식은 '色'이다. 이때의 색 역시 空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공과 색은 한 몸인데 그래서 작가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어려운 말이다. 또 알맞게 적용한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작가는 더욱 나아가 '진공모유'라는 개념도 공과 색에 사용하고 있다. 이 개념 역시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기계 이미지 앞에서 적용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언급한 비슷한 색의 개념을 서양미학, 그러니까 괴테의 「색채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괴테는 「색채학」 논문에서 "색은 빛의 고통에서 태어난다. 색은 빛의 무한하고 순간적인 빛의 흐름과 파열로 태어나는 빛의 고통의 산물이다."라고 했다. 괴테가 색을 고정된 어떤 정형이 아니라 빛에 의해 부단히 변하는 무정형, 비정형의 색으로 규정한 것은 동양적인 사유이고 라규채의 색의 인식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괴테가 자신의 색채 개념을 실험실에서 실험 데이터로 증명하려고 함으로써 정신과 기술이라는 상이한 인식론적 오류를 범한 것처럼, 라규채 역시 카메라(광학)와 사진(화학)이미지를 통해서 관념의 空을 밝혀보려 했다는 점에서 역시 인식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 그러나 오류가 중요한 게 아니다. 괴테가 그랬고 라규채가 그러한 것처럼 색의 인식, 즉 사물의 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흐르는 빛의 파열과 파동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생성되고 출몰한다는 부정형, 무정형의 색(상) 개념이 중요하다. 사진가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고 오독하는 부분이 여기이다. 형과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설사 본질을 간파하고 포착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카메라로 보고 사진으로 드러나지만 결국 보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눈이고 마음이고 정신이고 영혼이다. 形도 空이고 色도 空이라는 라규채의 언술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 정리한다. 라규채는 "空에 美親다"고 했다. 공을 아름답게 보고 공과 친하고 싶다는 것이다. 또 공에서 나오는 색을 아름답게 보고 친하고 싶다는 것이다. 미친다는 것보다 탐미적인 수사법은 없다. 빠지지 않고 미칠 수 없고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고 미칠 수 없고 친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그는 대나무에, 오묘한 대나무 형(상)에, 변화무쌍한 대나무 색(상)에 빠진 美親 작가이다. 미치지 않으면 볼 수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 껴안을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붙잡을 수도 없다. 대나무에 빠진, 대나무를 사랑하는, 대나무와 철학하는 작가가 틀림없다. ■ 진동선

라규채_Bamboo #024_피그먼트 프린트_45×100cm_2011

우리가 사물을 '보았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 사물의 본질을 본 것이 아니다. '바라봄'이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의지의 작용이지만 시세포를 통해 얻은 정보를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망막(網膜)에 맺힌 상(像)의 정보를 neuron이라는 자극 전달 신경체계에 의해 뇌세포로 전달되고 그 정보를 심미적 연산 작용 없이 그대로 사물의 실체라고 판단해 버리는 뇌세포의 지극히 단순한 지각활동에 불과하다. ● 태양광에는 가시광선을 비롯하여 적외선, 자외선, 알파 ․ 감마 ․ 베타선, X-선 등 수많은 광선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망막은 그 많은 광선들 가운데 가시광선 하나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바라봄'이란 작용을 통해 사물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가시광선의 반사광에 의해 드러난 외형적 형체에 지나지 않는다. ●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적 물질에는 본래 실체가 없다. 모든 물질의 중심에는 공(空)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空)의 끊임없는 진동이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가며, 가지적(可知的) 세계는 이러한 진동의 리듬이 만들어 낸다. 따라서 연속된 진동 속에서 형상들이 나타나는 것이고, 보이는 물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미세한 진동의 파장들일 뿐이다. ● 그러므로 우주 공간의 삼라만상의 본질이란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미세하게 흐르는 파동과 진동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파동과 진동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유기적 흐름에 의해 가시적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 나는 이번 작업에서 형상과 중량이 존재하지 않는 바람을 매개로 댓잎이 사라짐과 드러남의 반복 속에서 우주의 본질인 공(空)을 얻고자 했다. 바람으로 인해 형상이 점점 우주 속으로 연무처럼 흩어지며 사라지는 과정이 공(空)으로 도달하는 대나무의 실체는 완전히 없어지는 무(無)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원리인 공(空)의 세계, 즉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의미한다. ● 또한 빈 공간과 간격은 형상적인 가시적(可視的) 세계가 아니라 망막의 단순한 지각활동으로는 인식하지 못하는 가지적(可知的) 세계를 표현함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충만함을 담고 있다. ■ 라규채

라규채_Bamboo #027_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09

우리가 사물을 '보았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 사물의 본질을 본 것이 아니다. '바라봄'이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의지의 작용이지만 시세포를 통해 얻은 정보를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망막(網膜)에 맺힌 상(像)의 정보를 neuron이라는 자극 전달 신경체계에 의해 뇌세포로 전달되고 그 정보를 심미적 연산 작용 없이 그대로 사물의 실체라고 판단해 버리는 뇌세포의 지극히 단순한 지각활동에 불과하다. ● 태양광에는 가시광선을 비롯하여 적외선, 자외선, 알파 ․ 감마 ․ 베타선, X-선 등 수많은 광선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망막은 그 많은 광선들 가운데 가시광선 하나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바라봄'이란 작용을 통해 사물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가시광선의 반사광에 의해 드러난 외형적 형체에 지나지 않는다. ●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적 물질에는 본래 실체가 없다. 모든 물질의 중심에는 공(空)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공(空)의 끊임없는 진동이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가며, 가지적(可知的) 세계는 이러한 진동의 리듬이 만들어 낸다. 따라서 연속된 진동 속에서 형상들이 나타나는 것이고, 보이는 물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미세한 진동의 파장들일 뿐이다. ● 그러므로 우주 공간의 삼라만상의 본질이란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미세하게 흐르는 파동과 진동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파동과 진동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유기적 흐름에 의해 가시적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 나는 이번 작업에서 형상과 중량이 존재하지 않는 바람을 매개로 댓잎이 사라짐과 드러남의 반복 속에서 우주의 본질인 공(空)을 얻고자 했다. 바람으로 인해 형상이 점점 우주 속으로 연무처럼 흩어지며 사라지는 과정이 공(空)으로 도달하는 대나무의 실체는 완전히 없어지는 무(無)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원리인 공(空)의 세계, 즉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의미한다. 또한 빈 공간과 간격은 형상적인 가시적(可視的) 세계가 아니라 망막의 단순한 지각활동으로는 인식하지 못하는 가지적(可知的) 세계를 표현함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충만함을 담고 있다. ■ 라규채

Vol.20120508f | 라규채展 / RAKYUCHAE / ???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