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OCI YOUNG CREATIVES

황지윤_한승구展   2012_0503 ▶ 2012_0525 / 월요일 휴관

황지윤_Tidal Flat_캔버스에 유채_112.1×193.9cm_2012

초대일시 / 2012_0503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 황지윤_한승구

후원/협찬/주최/기획 / OCI 미술관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풍경화의 디아스포라, 그러나"그리고 그곳에는 광막한 바다를 건너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건조된 범선들을 타고 바다를 횡단하는 수부들에게 수정같이 번쩍여 보이는 지붕을 한, 빛나는 궁전이 하나 솟아있나니, 그리하여 그곳에 그 나라의 온갖 짐승들과 떼 지은 살찐 가축들 그리고 최상의 과일들이 모여드는지라" (James Joyce, Ulysses)1. 지금 회화의 위치 디아스포라(diaspora), 한자로 이산(離散)은 애초 민족이 자신들의 고국에 집단으로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혹은 고향을 상실하고/뿌리 뽑힌 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흩어져 사는 처지를 뜻하는 단어다. 따라서 이 용어를 그림에 가져다 쓰는 일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원천을 잃어버리고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모든 존재가 사실 디아스포라 상태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림에 그 말이 적용되지 못할 법도 없지 않은가? ● 특히 오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스타일을 보건대,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현대 회화의 유행하는 특정 경향 내지는 방법론을 설명하기에 꽤 유효적절한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문인화의 외관을 차용해서 지금 여기 사물들을 그린 그림, 중국 명·청시대의 산수화 구도를 빌려다가 그 속에 오늘날의 다종다양한 일상사를 끼워 넣은 그림, 17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풍경화나 정물화 양식에다가 21세기 디지털 대중 문화산업시대의 이미지 및 상품을 조합해 그린 그림들 말이다. 그런 그림들에서는 본래 신화화, 종교화, 문인화, 산수화,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 초상화, 알레고리회화 등등이 태어나고 하나의 회화 형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문맥/고향/원천은 사라진다. 대신 시각적 요소들만 파편화된 채 등장한다. 이제까지 동서양에 존재해온 회화 일반을 민족 같은 것으로 인간화해도 좋다면, 그렇게 양식·도상·모티브·장식적 파편들로 따로 떼어 내져 이 작가의 저 그림에, 저 작가의 이 그림에 차용되거나 이식되는 기존 회화의 형편은 그야말로 현세의 잡다한 이미지세계를 방랑하는 디아스포라에 다름 아니다.

황지윤_풍경의 움직임_캔버스에 유채_193.9×112.1cm_2012

2. 표면의 여정황지윤의 그림들 또한 일견 위와 같은 의미에서 회화의 디아스포라, 특히 풍경화의 디아스포라처럼 보인다. 그녀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그린 그림들 중 다수가 기존 동서양 회화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고, 아마도 우리가 익히 봐온 덕분에 친숙해진 양식화의 소재, 구도, 형상, 표현 기교 등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 젊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이제까지 받은 미술교육과 경험한 시각문화를 통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형성한 상상력에 따라 그린 그림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가령 황지윤의 작품에서 우리는 중국 북송시대 산수화나 조선시대 청록산수화부터 이발소그림의 전형인 다산(多産)의 돼지 그림이나 자연물을 의인화한 민화(民話)까지, 두루 기존 회화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또는 고대 로마의 프레스코 벽화 및 15세기 르네상스의 제단화에 구현된 신화적 풍경, 17세기 북유럽 바로크의 드라마틱한 풍경,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숭고한 풍경 등등을 꼽아볼 수도 있다. 예컨대 황지윤은 「조춘도(早春圖) 1」에서 중국 북종산수의 대명사로 꼽히는 곽희(郭熙, 약 1001~1090)의 동명 그림을 직접적으로 ―주제부터 구도까지― 모방한다. 또 「달빛그림자 2」에서는 전체적으로 전경 ․ 중경 ․ 후경이 있는 산수화의 전형적 구도를 취하는 가운데, 그림 곳곳에 문인화 또는 키치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모티브를 패치워크처럼 잇댔다. 즉 세로로 긴 화폭의 호방한 산수풍경 속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알 같이 그려 넣은 것이다. 중경의 오른쪽에서는 물레방아가 돌고, 왼쪽에서는 주렁주렁 새끼돼지를 품은 어미돼지가 누워있으며, 그 밑에 선사와 시동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고, 물가에서는 낚시질하는 이가, 후경 부분 나무 밑에서는 중년의 남자가 마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에서 늙은 선비가 그러듯 물을 보며 서 있고. ●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으로 꼼꼼히 덧칠해 그린 황지윤의 그 이종(異種) 산수화에서 회화의 원전(原典)들은 전통의 깊이를 고수하지 못하고 화면 여기저기를 떠돈다. 동시에 애초 그것들이 속했던 관계가 아니라, 생경하고 다소간 뜬금없는 사이로 연접하며 이미지의 퍼레이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감상자 또한 그림 표면의 곳곳을 유랑하는 양식화된 회화의 파편들을 따라 회화 전통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나 감상법 없이도 즐길 수 있다. 마치 이국의 다양한 풍경들을 인공적으로 한데 모은 테마파크를 누비듯이. 신구(新舊), 성속(聖俗), 동서(東西)를 가로질러 온갖 문화의 형상들이 미니어처로 재현된 민속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을 들여다볼 때처럼.

황지윤_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72.7×116.8cm_2012

3. 경험의 여행 ● 하지만 황지윤의 작품은 차용(appropriation) 개념을 표방한 포스트모던 회화가 아니며, 그녀의 작업 태도 및 방식은 유희적 혹은 비판적인 목적에서 전통문화예술/민속적 이미지를 브리콜라주(bricolage)하는 동시대 다수 젊은 작가들의 범주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황지윤의 그림들이 곽희의 「조춘도」를 모방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과거의 특정 그림과 1:1 대응관계에 있지 않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녀의 풍경화는 일정 정도 우리가 그것을 처음 봤을 때 어디서 본 듯이 느낄만한 시각적 친밀성을 지니고 있다. 혹은 오래전 동양이나 서양의 미술사에 등장하는 대가들이 일가를 이뤄놓은 양식을 장르나 주제에 상관없이 가볍게 가져다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시각적 인상으로만 그렇다. 반면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황지윤의 그림들에는 참고문헌처럼 달릴만한 개별 원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화집의 도판들에서 고스란히 따온 도상들 또한 없다. 대신 그녀는 화면의 구성, 정조(tone), 표현 기법 등 구조적인 차원을 모방하거나 재구성한다. 물론 누군가는 그것이 바로 황지윤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여러 젊은 화가들이 엇비슷하게 취하는 방식이라고, 그러므로 각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모방이나 재구성 자체가 탈 맥락화, 파편화, 이종의 혼성을 유행처럼 따르는 경향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범주화해버렸을 때도 남아있는 개별성이 황지윤의 그림에는 있다. 이미지의 경험과 경험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엮이는 점, 테크닉의 학습과 상상력의 실행이 병행되는 점이 그것이다.

황지윤_A Migratory Bird_캔버스에 유채_65×193.9cm_2012

굳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자면, 황지윤은 국내외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낯선 풍경과 세태를 몸소 겪는 여행자이자, 동시에 도서관에 앉아 골똘히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화집을 들여다보고 스튜디오에서는 그런 그림그리기(painting)를 연마하는 견습생이다. 이 두 상반되는 모습, 또는 병행이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태도 내지는 작업의 방식이 황지윤의 그림을 개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녀는 실제로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국내의 지방 소도시든 유럽의 관광지든, 혼자 하는 배낭여행이든 패키지여행이든 가리지 않고 수시로 여행을 떠나며, 그 여행의 와중에 얻은 경험들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 경험은 심리적이거나 정서적으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들이 별반 아니다. 그보다 때로는 혼자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 벽에 걸린 키치 그림을 따라 스케치하거나, 어떤 여행지에서 폭우와 화재가 동시에 일어나는 광경을 먼발치에서 구경하며 나중에 꼭 그것을 그려보겠다고 생각하는 식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혹은 그것을 경험했던 때로부터 시간이 상당히 흐르는 동안 황지윤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익명의 풍속화를, 갑자기 마주쳤던 기이한 사건을 중국의 산수화나 낭만주의 풍경화 구도에 접목하고 그 안에 녹여내는 작업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기존 회화 양식과 모티브를 참고하고, 테크닉을 변주하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달빛그림자 2」 속의 물레방아와 돼지 그림은 그런 경험에서 재구성된 것이며, 「롯의 증언 Ⅰ」에 그려진 검은 구름 밑 폭우와 섬 안의 불길이 그렇게 재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롯의 증언 Ⅱ」는 그 폭우의 정경을 뚫고 들어갔을 때, 그 안에 벌어지고 있을 자연의 사태를 작가가 자신의 상상과 신화의 힘을 빌려 알레고리화한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그 정경은 1513년 경 피에로 디 코지모(Piero di Cosimo)가 그린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를 환기시킨다.) ● 위와 같은 두 방향의 의미, 즉 한편으로는 기존의 회화적 양태나 속성이 부분적으로 발췌돼 황지윤의 그림 표면을 떠돈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화가 자신이 세계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경험한 부박하지만 독특한 사태들이 그림에 이미지화된다는 의미에서 황지윤의 회화는 '디아스포라 상태'의 것이다. 그것은 일견 정처 없고 원본 없는 이미지들의 유희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지젝(Slavoj Žižek)이 언어 분석을 통해 명쾌하게 정의했듯이, 우리 각자의 주관적 경험이 다른 이들과 섞일 수 없고 다른 무엇으로도 유보할 수 없는 개인성(the in-dividual)을 마련해주는 것이라면, 황지윤의 작품에서는 그녀의 떠돌이 경험, 그 경험적 지각이 바로 고유한 성향이 되고 특별한 정조가 된다.

황지윤_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72.7×116.8cm_2012

4. 유사성의 여러 세계 ● 우리가 현재 우리 자신 안에 형성해놓은 그림 혹은 시각이미지의 세계는 어디서 왔는가? 많은 경우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본 것들, 즉 시각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감상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물들, 풍경, 겪은 사건이나 본 것들이 우리의 상상력 및 기억력과 결합해 일종의 이미지 저장고이자 생산처로서 우리 안에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해둔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 Ulysses』의 한 장면은 읽는 이에게 스펙터클한 풍광과 찬란한 인공물과 풍요로운 자연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작가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된 아일랜드 더블린의 어느 시장을 묘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정경이 누대에 걸쳐 축조된 문학적 표현법과 만나고, 조이스라는 저자의 개별적 삶의 경험 및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문학 실험과 결합하면서 광대한 바다, 위용 넘치는 범선, 수정 궁전, 육감적인 짐승 떼, 윤택한 과일더미 이미지를 출현시킨다. 우리에게는 그 이미지가 애초 초라한 도시의 시장이라는 사실이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그 초라한 실제 세계와 황홀한 문학이미지의 세계는 오히려 우리 안에서 유사성의 즐거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 황지윤의 그림들을 통해서도 그 즐거운 유사성의 관계가 촉발된다. 앞서 분석했듯이 그녀의 작품들에는 분명 기존에 그려졌던 회화의 양식과 모티브가 모방돼 있기 때문이며, 그와 동시에 황지윤만의 경험과 상상력이 그 모방 대상들을 독특한 정조를 풍기는 풍경화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의 그림을 친숙해하면서, 그러나 바로 그 자체만의 특별한 이미지로 바라볼 수 있다. 또는 이러저러하게 알고 있는 것과 눈앞에 펼쳐진 화폭 속 특이한 미적 대상을 요소요소 따져가며 즐거워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황지윤의 그림이 지닌 미덕이고, 황지윤이 참조한 회화의 여러 양식과 모티브가 그 신참 작가에게, 그리고 감상자에게 행사하는 이미지의 힘이다.

황지윤_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72.7×116.8cm_2012

이제 황지윤의 작품 중에 그 이미지의 힘을 간단하지만 명쾌하게 보여주는 「청솔모」라는 제목의 드로잉을 논하면서 글을 마치기로 하자. 그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 오른쪽 끝에 그려진 소나무와 매우 닮아 보이는 나무 한그루를 화면 가득 배치해 푸른 잉크 선만으로 그린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연관관계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연상 작용에 의한 것으로, 애초 작가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고, 다른 감상자는 그런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청솔모」는 보는 이에게 푸른 소나무의 기상이 느껴지는 소박하지만 담대한 그림으로 비춰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며 한 걸음 바짝 다가서서 작품을 보면, 이내 감상자는 그림 속의 나무가 소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나무 솔잎인 양 가지에 뭉쳐있는 것들은 다소 놀랍게도 작은 짐승 떼, 작품 제목을 참조하자면 '청솔모'라 불리는 다람쥐과(Family Sciuridae)의 동물들이다. 보통 다람쥐보다는 몸집이 크고 현재 남한에서 그 개체수가 현저히 늘어났다고 하는 이 동물은 큰 나무줄기나 나뭇가지 사이에 서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지윤의 「청솔모」는 바로 그러한 사실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가지를 뻗은 소나무, 그것처럼 보이는 청솔모 떼를 표현해 놓았다. 차가운 흰 여백의 공기 속에서 고고하게 서있는 소나무 몸체는 한순간 날짐승의 소란스러운 몸짓들로 바뀐다. 청빈한 나뭇가지들은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무리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검은 몸과 두툼한 꼬리의 동물 떼거리가 된다. 다소간 무섭고, 다소간 징그럽게도. 어디서 그러한가? 우리의 지각 과정에서. 여기서 핵심은 그 지각의 과정이 황지윤의 드로잉이 없었다면 촉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 디아스포라처럼 화면을 부유하는 회화 이미지의 힘이 센 것이다. ■ 강수미

한승구_mirror mask_혼합재료_240×180×174cm_2012

장치(裝置) 화된 노드(Node, 컴퓨터망에서의 중앙 처리 시스템 상호 간, 중앙 처리 시스템과 단말 장치 간 등의 통신로의 분기점에 설치되는 통신 제어 기능을 갖는 처리 장치)를 흐르는 얼굴들한승구는 전통적인 조각과 설치 작업을 통해서 자아와 실존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가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를 활용한 인터랙션 설치작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작가이다. 최근의 작업들은 단순히 전시장 설치 오브제 뿐 아니라, 공공공간의 설치작업 미디어 파사드 프로젝트 등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작업의 형식적 확산은 작업개념의 변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업을 묶고 있는 관념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 이미지들은 함축해 놓은 개념 덩어리들로서 이 개념들은 경우에 따라서 지극히 구조적이고 사적이다. 그의 작업이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기반으로 출발했지만, 그는 끝없는 질문을 통해 자신을 덮고 있는 '얼굴'들을 벗겨내고 미성숙의 낯짝에 까지 이르고 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때로 쉽게 읽히지 않는 난해함을 동반하지만 작업과 만나는 방식은 매우 친절하고 소통적이다. 마치 씨줄과 날실이 얽혀 복잡한 구조를 내부에 품고 있는 장치 화된 지식정보 사회의 얼굴처럼 때로는 밋밋하고 단순해보이기 까지 한다. 좁은 통로로 진입하여 거대한 광장을 만난 심정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승구_mirror mask_혼합재료_240×180×174cm_2012

육체 상부의 앞면을 지칭하는 '얼굴'은 한 개인을 표상한다. '얼굴'은 상호 소통적, 상호 주체적, 표현적, 언어적 기능이 활동하는 장(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은 인간적이며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달리 말하면, '얼굴'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이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정령들의 정면 상은 그들 감정의 형태와 초상이 된다(스웨덴보리).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그래서 "하나의 얼굴을 촬영할 때, 그 뒤에 있는 영혼을 촬영한다고 말했다. 이 영혼의 얼굴들은 어느 한 순간도 하나의 얼굴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스타들이 출연한 영화의 장면들조차도 멀티미디어의 복제와 반복 재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순간들일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얼굴의 역사는 '얼굴 표현성의 역사이자 얼굴 표면을 이용한 자유로운 감정 기록의 역사다. (자크 오몽, 영화 속의 얼굴). ● 한승구의 작가노트에서 보듯이 사회 속에서 얼굴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유기적 구조 내에서 사람마다 다른 얼굴은 개인의 특징을 드러내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노출은 각각의 개인에게 하나의 불안 요소를 자극 시킨다. 폭력적인 사회란 시스템에 적응하도록 만들어 각각의 개인은 사라지고 모든 객체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구조체계를 위해 움직이면서 감시 통제되어 지는 사회다. 여기서 '얼굴'은 사회 구조에서 이탈해 나갈 것 같은 각 개인을 정착하여 못 움직이게 만드는 하나의 감옥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어난다.'고 보았으며,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체성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얼굴'은 사회 권력의 구조적 장치로서의 얼굴인 '네트워크' 혹은 '노드'의 얼굴성과 만난다.

한승구_untitled_혼합재료_80×80×80cm_2012

폴란드의 소설가 비톨트 곰브로비치 (Witold Gombrowicz)의 소설 페르리두르케(Ferdydrurke) 에는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도르와 필리베르가 등장한다. 그의 난해한 포스트모던적 소설의 5장과 12장에 각각 별도의 서문과 함께 삽입된 인물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을 해체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들이다. 이 소설에는 전체성과 총합주의자 필리도르 박사와 안티-필리도르박사가 몇 번의 결투를 벌이다가 결국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는 다소 우스꽝스럽고 황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필리도르는 계속해서 전체성을 이야기하고 안티-필리도르는 이를 분석하여 해체하는데, 이 둘의 전체와 부분은 성숙과 미성숙의 대립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대립은 소설 안에서 청년과 건달의 대립, 선생님과 학생의 대립, 현대성과 늙음의 대립, 귀족과 천민 혹은 주인과 하인의 대립으로 대체 될 수 있다. 여기서 성숙은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형식으로서 수많은 가면들이다. 무의식의 열등하고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가면 페르소나는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 미성숙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낯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미성숙의 낯짝은 그러므로 실존의 가면이다. 낯짝은 우선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 낸 자기이다. 작가의 말은 빌리자면, 정신의 세계에서는 항구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저 타인에 대한 함수일 뿐이다.

한승구_untitled_혼합재료_80×80×80cm_2012

최근 랜티큘러(Lenticular) 프린팅 기법을 사용해서 제작하고 있는 한승구의 「Mirror Mask, 2011」시리즈들에서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중첩된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얼굴'의 표면을 한 커플 씩 벗겨내면 종국에는 도달하게 되는 차가운 가면 피부는 그가 라캉의 말을 빌려 표현 한 것처럼, 주체는 타자의 담론이 머무는 그릇으로 전락했다. 디지털 기술로 생성된 가상공간에서 개인은 가상의 신원확인 절차를 거치기만하면 생성되는 정체성들로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을 망각하고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생겨나 넘쳐나는 ID들 속에서 스스로 길을 잃는다. 이처럼, 가상공간에서 주체들은 ID라는 가면을 통해 스스로를 은폐한다. 한승구의 「Mirror Mask」는 자기를 위장하기 위한 가면이며 끝없이 성숙을 갈망하는 미성숙의 낯짝이다. 이 싸움은 필리도르프 박사와 안티-필리도르프 박사의 싸움에서처럼 "뭐든 다 뒤집어 보면 어린애"상태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한승구_untitled_혼합재료_80×80×80cm_2012

그는 실재하는 자아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환영에서 존재성을 발견하는 나르시소스의 행위를 모티브로 「나르시소스의 두 얼굴, 2011」을 발전시켰다. 「Mirror Mask」가 위장적이라면 나르시소스는 편집증 적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와 같은 실존적 질문의 답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미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 2009」작업에 나타난다. 어쩌면 이 작업을 통해 훨씬 더 또렷한 얼굴의 무위적인 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승구의 실존과 본질에 대한 탐구는 얼굴로 대표되는 정체성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4원소, 모래, 2008」는 물이나 모래(흙), 바람, 소리 등을 인터렉티브한 설치작품 안에서 동조 시켰는데, 4원소는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물질로 관람객들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나 모래를 만질 때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거나 얼굴이 달라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 또한, 실존적인 문제를 사회적 관계로 확대하게 된 대표적인 작업으로 「Network identity, 2006」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작업은 한승구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였다. 이 작업은 '나'를 물으며 동시에 '내가 속한 사회와의 관계성'을 질문하면서 진정한 자아 찾기의 방법으로 정보와 인식의 코드가 되어 버린 얼굴을 제거하도록 거세되어진 얼굴에는 익명의 새로운 얼굴들이 부여되는데, 관람객의 참여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24개의 얼굴들이 서로 뒤섞일 때 발화점이 되는 것은 이를 네트워크 하는 시스템으로서 '노드(NOD)'다. 이 얼굴들은 타자의 얼굴로 교차, 혼재된 상태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 프랑스의 영화 이미지학의 대가인 쟈크 오몽은 거울이 보여주는 얼굴은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며, 타자들이 본 나의 얼굴과도 다르다, 그럼에도 시각적으로 거짓인 이 응시는 주관적으로는 진짜다고 말했다. 이 자기애적인 편집증은 최근 인터넷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공간 내에서 더욱 극대화 된다. 모니터 화면 너머에 존재하는 나와 연결된 수많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끝없이 나르시소스의 얼굴을 생산하고 내가 관계 맺고 있는 '타자'들의 나르시소스들과 만난다.

한승구_mirror mask_렌티큘러_64×64cm_2012

한승구는 초기 작업들은 3D, 2D 그래픽 툴을 활용한 인간존재에 관한 고찰로부터 시작되었다. "무엇이 진실인가?(What is the truth?"라는 질문의 삼 색 텍스트가 좌우로 물결처럼 움직이는 웹아트 작품은 기술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이후, 그의 실존적인 질문으로 진입하는 출구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적 질문에 기초해 출발된 한승구의 작업은 「Space& cyber space, 2003」 싱글채널 비디오에서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특유의 차가운 마스크가 등장하게 된다. 이와 같은 디지털 이미지 혹은 3D 영상 실험이 입체화된 조각 작품으로 실험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서대문 형무소 전시를 시점으로다. 이 작품은 조각위에 덧붙여진 조각으로서 영상이미지 혹은 사물의 디지털 이미지로서의 영혼을 부여받은 환영에 가까운 것이다. 미국의 영상설치작가 토니 아워슬러(Tony Oursler)가 쓰레기로 만들어진 인형들에게 미디어를 통해 영혼을 불어 넣듯이 한승구의 가면들은 시간과 조건에 따라 우연히 생동감을 부여받는 마법적 관계 안에 들어오게 된다.

한승구_mirror mask_렌티큘러_64×100cm_2012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기술의 극복은 인간이 기술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 본질이 지니는 위험을 직시하며 이 위험 속에서 자라 나오는 존재의 새로운 도래에 겸허히 귀 기울일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이미지들의 스펙터클은 때로는 권력의 얼굴로 때로는 구조화된 장치로 작동한다. 따라서 한승구가 작가노트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의 작업의 주요 목적은 얼굴이란 것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또한 단지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진 빈 공간에 새로운 얼굴을 부여하여 타인화 한다. 최근 미디어를 국내에서 활용하여 작업하는 작가들이 미디어의 스펙터클과 기술적 환상에만 몰입하여 미디어 미학은 장식적이고 찰나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한승구의 작업들은 자기 비판적이고 성찰적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간직한 미성숙의 상태가 지속해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백기영

한승구 홈페이지, 블로그 hanseungku.com blog.naver.com/mixed_art

Vol.20120503i | 2012 OCI YOUNG CREATIVES-황지윤_한승구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