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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427_금요일_05:00pm
바움아트갤러리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바움아트갤러리 BAUM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원서동 228번지 볼재빌딩 1층 Tel. +82.2.742.0480 www.baumartgallery.co.kr
거대한 꽃, 부쳐진 절대(絶對)의 노래 ● 주사위는 던져졌다. 낙하하는. 지상에 닿지 않은, 그리하여 그 한 면의 숫자가 정해지지 않은 주사위 하나 거대한 꽃을 뒤로 한 채 낙하하고 있다. 혹은 지상에서 떠올라 상승하고 있을 수 있는 주사위 하나가 있다. 주사위 왼쪽 배경은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의 기둥과 고원의 절벽 풍경이 자리하며 화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꽃과 대비를 이룬다. 주사위는 그러므로 꽃과 배경의 경계에 놓여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꽃은 화면을 지배하는 절대 공간이다. 주사위는 그 꽃이 지배하는 공간 위에 있다.
던져진 주사위의 이야기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상의 모든 생들이 갖는 운명이다. 한 번의 선택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어서, 그 선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편으로 보면 슬플 수 있고, 다른 시선에서 보면 강한 생의 의욕이 느껴지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사위는 그러므로 인간의 생을 상징하고 있다. 낙하하고 있는 것이든, 상승하고 있는 것이든 주사위는 지상이나, 창공이나, 어떤 것 위에 안착하고 있지 않음으로서 진행형인 상황을 나타낸다. 그 상황은 살아가고 있는 인간, 지금, 현재의 인간사, 부유하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많은 것들을 던져진 주사위의 숫자처럼 매번 선택하고,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사위는 꽃 위에 던져졌다.
던져진 주사위. 이재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재호의 시선은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는, 그러나 인간의 생, 이재호의 생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선, 절대가치, 절대 진리를 향하여 있다. 그 절대의 가치들을 나타내고, 상징하고 있는 것이 꽃이다. 꽃은 생명이고, 아름다움이다. 또한 잉태이며, 쾌락이다. 이재호의 꽃은 그러한 왕성한 생명의 절정의 순간들, 헌사들, 찬란한 순간들을 상징한다. 또한 꽃은 영원한 아름다움, 절대의 미학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이재호가 절대의 진리, 절대의 말씀들을 꽃을 통하여 이 지상에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재호의 꽃은 꽃이면서 꽃이 아니다. 꽃은 지상에 피어 있는 모든 것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거대하여 압도당하는,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의 어떤 것들을 나타낸다. 던져진 주사위는 그러므로 현실과 다른 차원의 꽃 사이에 존재하는, 현존하는, 살아가고 있는 이재호, 스스로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자신을 표현하고, 지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고 있는 이 땅은 영원한 세계에서 던져진, 혹은 부쳐진 우편물 같은 것이다. 누군가 그리우면 그리움을 담아서 보냈던, 혹은 어느 날 어떤 그리움으로부터 받았던 우편물들. 그것은 그리움과 그리움을 연결하여 미소 짓게 만드는 어떤 것, 소통이다. 우편물들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선으로 작동한다. 여기와 저 어느 세상, 그 다른 두 세상을 하나로 연결하는 선, 소통. 그 소통은 우편물들이다. 우편물들은 이쪽에서 저쪽이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세상이 현존하고 있음을 알린다. 우편물에 찍힌 소인(消印). 이 지상의 주소가 쓰여 진 겉표지에 선현하게 찍힌 우체국의 소인은 저 쪽 세상이 존재하는 물증이다. 지금 우리가 우편물을 통하여 보는 것은 하나의 종이의 겉표지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 저 쪽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우편물은 현실, 지금 이 세상, 현실의 지평에서 받아보고 있다는 점이다. 저쪽으로 향한 염원은 부쳐지지 않는 편지, 우편물들이다. 수취인 불명. 보내고 싶어도 정확한 주소나, 전달 방법이 없는. 혹은 이 지상에 살아가는 일들, 현실이라는 것들, 이 지상의 생이 퍽퍽하여 보내온 소식에 답가로 보낼 이야기가 마땅치 않을 수 있는 이 현실의 실재. 작가의 시선은 현실, 이 지상의 자신으로 향하여 있다. 누군가가 이 지상으로 우편물을 보냈다. 하니, 어찌 하겠는가, 살아가야겠다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영원의 세계가 현실에 녹아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세계에 실재되어 있는 것, 지배하거나, 관통하는 진리, 영원 하는 어떤 명제로 인식되고, 통용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것들 중에 이 지상의 현실이라는 것은 시간의 추이마다 변동하고, 움직이며, 그 운동하는 시간성에 따라 가치관, 세계관도 다른 시선들을 요구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영원불멸한 세계의 지상으로의 현전을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것, 그것은 그 영원한 세계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변동하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그 세계를 바라보는 시점이 다르고, 하나의 시점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 진리를 해석하는 인간의 시점이 시간을 통과 하면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재 삶과 이상, 영원의 절대 가치가 결코 쉽게 결합하지 못하는 것 또한 이 시간의 변화 속성 때문이다. 즉 진리의 문제이기보다는 인간의 문제,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이재호의 현실 인식은 그러한 점에 닿아 있다. 거대한 세계의 진리를 이 지상의 실재하며 살아가는 자신으로부터 수용하지만 실천 불가능한 현실의 부조리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원에서 수신하는 우편물들을 통하여 현실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현실 속의 실재하는 자신은 하염없이 낮고, 메마르고, 쪼그라든 볼품없어 보이는 마른 꽃. 마른 꽃으로 상징되는 것. 현실이다. 현실의 인간의 삶이다.
거대하고 생명력 넘치는 생화 앞에 작고 메마른, 마른 꽃의 대비. 화면은 그러한 대비로 인하여 영원과 현실의 이 지상이 대립하는. 그 대립의 공간을 매개하고 말을 하는 것은 사물들이다. 주사위, 우편물, 소인, 지팡이, 바이올린, 비녀, 노리개, 무지개실로폰, 물고기형상의 떡 조각, 포도, 구명기구, 가시관, 나룻배. 그 사물들은 이재호 이전의 말과 이재호의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면에 등장한 사물의 말들은 다른 무수한 말들을 담고 화면의 중심부를 차지한다. 언어는 시각언어로 출발하며, 언어와 언어 사이를 넘나드는 상징으로 화면을 이끈다. 지상에서 영원의 사이에 언어가 있다. 태초의 말씀처럼. ● 사물들은 언어를 달고, 담고 있다. 그 언어들은 말들이다. 영원의 세계에서 날아온, 영원의 세상으로 다다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말들이다. 사물들은 현실의 말, 혹은 영원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메마른 현실 속의 삶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작가의 의지이기도 하다. 또한 닮아가고 싶거나, 따르고 싶은 염원이기도 하다. 작가의 인식은 시원으로부터, 태초로부터 지금, 여기에 도달하는, 관통하는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꽃으로 상징되는 지배하는 원리, 진리를 표방하고 있다. 작가는 그러한 근간들. 태초로부터, 시원으로부터 순환하는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신의 자세를 나타낸다. 꽃은 그럼으로써 거대한 진리들을 함의하는 아름다움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원에의 순종 또는 근원에 대한 염원,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적 현실에서 오는 괴리로 부조리한 간극을 만든다. 그 부조리는 인간적 고뇌, 번민들을 생산한다. 작가는 그 부조리함의 간극을 보여준다. 상징적 언어는 사물이 되어 있고, 사물은 사물을 지시하는 것만이 아닌, 현실의 인간의 말, 혹은 영원의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언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현실의 거짓 없는 고백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순종적 자세, 조심스런 다가감, 염원과 겸손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말들 속에는 현실에서 실천되지 못하는 앎들, 말들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포장되지 않는, 날 것 같은 현실은 알고 있는 것-앎, 지식과 합일하지 않는다. 의지와 실천의 사이는 일정한 거리를 가지며,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다른 방향에 서 있다. 작품의 의지는 그러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협하는 태도를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친 바다로 항해 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룻배는 그러한 말들 속에 작가의 의지를 담고 항해를 시작한 듯 보인다. 염원의 고기를 낚을, 희망이라는 물고기를 끌어올릴 저 바다를 향해. 그 현실이라는 세계가 가시관처럼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항해의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항해는 꽃과 시원의 바다, 현실의 바다 사이를 향해 있다. ● 꽃과 꽃. 꽃과 사물. 꽃과 시원의 바다, 대지. 처음엔 거대한 꽃이 지배하는 화면을 만나고, 그 거대한, 생생한 꽃 다음으로 배경을 차지하고 있는 풍경들을 만나면 화면의 중심부로 사물들이 탄생한 화면을 만난다. 풍경들과 꽃을 배경으로 한 사물들. 이재호의 화면이며 이재호의 언어, 말이다. 이 화면, 이 말은 화려하면서도 어둡고, 쓸쓸하면서도 포근하다. 고통스러우면서도 희망적이다. 작가의 항해는 영원과 현실 사이를 가고자 하는, 힘든 고행을 수반한다. 그래서 말들을 붙들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것도, 시원의 인간의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출발로서도 말들,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말, 언어는 새로운 생명을 가진, 몸으로 들어와 새로운 열망으로 변모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재호가 열망하는 것은 그러한 지평위의 실천들이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말하거나, 실천하는 항해라는 것. 현실의 고난 함을 견디고 나아가는, 고통을 감내하고 말하고자 하는 실천들. 그런 항해의 의지가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으로 우리들 앞에 다가와 있음을 이재호는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것, 절대에 부쳐지는 노래. 그 노래가 황홀하게 다가오는 것은 항해하자고 청구하는, 조용하고도 다정한 이재호의 말의 의지들 때문이다. 여기 지금 영원으로 향한 나룻배 한 척 닻을 올리고 있다. ■ 이호영
Vol.20120427e | 이재호展 / LEEJAEHO / 李載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