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427_금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쿤스트독
관람시간 / 11:00am~ 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낮에는 복잡한 사회 문제로 들썩거리며, 밤에는 감각의 전율에 취해 있는 세계에서 다가오지 않을 미래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나무-달착지근한 전체주의』에 나오는 소설가와 같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소외감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르나르의 소설 속의 소설가와 같이 김범수의 조각 작품도 인간 복제 문제로 인해 다가올 미래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클론(인간 복제용의 세포)으로 인해 맞이하게 될 미래의 세계는 김범수의 조각 작품 속에서 베르나르의 소설과 같이 '자녀들의 장기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예비 장기를 확보하기 위해 클론을 만들거나', 또는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비해서 인간 복제 기술을 통해 무진장한 병력을 확보하려고 하는'(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열린 책들, 2003, p.210.) 사회와 정치적인 헤게모니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김범수의 조각 작품은 클론(인간 복제)을 기계 부속품이나, 또는 장난감 완구와 같이 생각하는 현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에 대해 해부하고 있는 것이다. ● 클론에 대해 생각하는 현 시대의 사유의 패러다임은 자연과 사회를 하나의 생태학적인 전체론의 세계로 보지 않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식물과 동물들을 재배함으로써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하는 기계론적인 환원주의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기계론적인 환원주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하나의 실험실의 세계로 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 김범수의 인체 형상들은 기계론적인 환원주의 패러다임을 지니며 살아가는 현재의 인류가 클론으로 인해 맞이하게 될 유토피아적인 미래의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유토피아적인 그의 미래의 세계는 「Alice Lidell & Lewis Carroll의 얘기를 하기전의 상상, 2007」에서와 같이 인형놀이를 하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장난스런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섬뜩하며 미래의 두려움을 예고하는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기괴한 신체로서의 그로테스크 ● 그러한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Super-Objet: 오마쥬 바타이유, 2008」의 작업이나, 또는 「Alice Lidell & Lewis Carroll의 얘기를 하기전의 상상」의 작품이나, 또는 「Super-Objet: 22」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섬뜩함과 부조리, 아이러니를 내재하고 있다. 그러한 섬뜩함과 부조리한 세계는 그의 인체 형상에 나타난 그로테스크한 신체들과 땅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 그러한 그의 그로테스크한 인체 형상은「비천한 예술(abject art)」이라는 전시회에서 '비천한 신체'와 '파편화된 신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이론적인 담론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론적인 담론은 "하나는 '내장적 무의식' 또는 '신체적 에고'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에 관계되는 '자아와 타자의 경계의 흐림'이라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명제요, 다른 하나는 저속한 물질적 요소로 사회적으로 터부시된 범주와 신체/정신의 이분법에 도전한다는 조르주 바타이유George Bataille의 '비속한 물질주의 base materialism'이다."(Jack Ben-Levi 외 "Introduction," Abject Art: Repulsion and Desire in American Art(New York: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1993), exhibition catalog, p.7, 김홍희, 페미니즘, 비디오, 미술, 도서출판 재원, 1998, p.310.) ● 즉 김범수의 그로테스한 인체 형상들은 「Super-Objet: 오마쥬 바타이유, 2008」의 작품에서 보듯이 신체/정신의 이분법이라는 이념의 연장선상에서 신체를 비천한 것으로 취급하는 담론에 도전을 하는 페미니스트의 이론가들과 같이 그 이론적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인체 형상은 페미니스트의 이론가들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신체를 통해 비천함의 상징적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것과는 달리 「Super-Objet: 25」에서 보듯이 하나의 장난감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 그의 그로테스크한 인체 형상은 신체를 비천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페미니스트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비장함이나 역겨움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애완용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김범수의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인체 형상은 루이즈 부르주와의 「작은 방, 어서 어른이 되거라(Cell, You Better Grow Up, 1993)」의 조각 작업과 같이 보다 나은 미래의 세계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만, 또한 그 이면에는 김범수의 「Alice Lidell & Lewis Carroll의 얘기를 하기전의 상상」의 작품에서 보듯이 섬뜩한 미래의 세계를 예감하게 하는 것이다.
유리성과 같은 유토피아 ● 김범수의 인체 조형을 통해 그려내는 세계는 클론을 통해 늙음과 병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미래의 유토피아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그러한 유토피아의 세계는 「Alice Lidell & Lewis Carroll의 얘기를 하기전의 상상」의 작품에서 잘려진 손가락들이 하나의 조형적인 기념물과 같이 광장에 놓여 있으며, 어린아이가 높다란 장대 위에 매달린 눈알을 선망의 눈으로 올려다보는 모습에서 행복한 미래의 사회상을 그려내고 있다기보다는 키리코의 「거리의 우수와 신비, 1914」의 회화 작품에서 같이 무언가 불안한 미래의 전율과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 그러한 섬뜩함은 「La poupee, 2004」의 인체 작업에서도 볼 수 있다. 머리를 빡빡 깍은 어린아이의 얼굴에 한쪽의 눈알은 빠져있고, 푹 폐인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한다. 그러한 절망감은 그의 최근의 인체 형상으로 나아갈수록 점차 고조되어 간다. 「붉은 시체(Le corps rouge, 2007)」의 사진 작품에 보듯이 머리위의 나사와 잘려지고 다시 붙여진 머리, 해부학의 도상으로 그려진 파충류의 다리들이 하나의 콜라주의 형태를 하여 기괴한 인체 형상으로 띠고 있는 모습이나 또는 「Super-Objet:21,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그 인체 형상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인간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이다. 그 인체 형상은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괴물의 모습이나, 또는 유전자 변형을 통해 만들어낸 괴생물체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 클론으로 인해 도래할 미래는 작가에게 있어서 병든 인체의 장기를 교체하여 건강한 모습을 지닌 남녀의 형상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Super-objet: 21」의 작품 속에 인체 형상들과 같이 신체의 형태를 자신의 취향대로 변형시킴으로써 분열된 형태의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몸은 동물의 모양과 같은 기괴한 형태를 띠며, 두개의 머리가 하나의 몸통에 붙어 있는 생명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세계는 현실의 세계라기보다는 작가의 상상 속의 세계와도 같다. ● 하지만 그러한 인체 형상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세계는 작가의 상상 속의 세계라기보다는 머지않을 미래에 인간의 유전형질을 지닌 녹-아웃 피그 등을 개발하여 인간 수명을 연장시키는 장기를 개발하는 속도에 비추어 볼 때 인류가 맞이하게 될 현실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세계는 "아이로니는 어떤 관계(가상/실제, 사실/허위 등등)를 지적으로 풀 수 있는 가능성에 좌우되며, 그로테스크는 본질적으로 모순들의 해결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Philip Thomson, 그로테스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p.69.)라는 필립 톰슨의 말처럼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그로테스크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그로테스크한 유토피아는 「Alice Lidell & Lewis Carroll의 얘기를 하기전의 상상」의 작품이나 또는 「Super-Objet:21」의 작품에서 보듯이 유리로 된 둥그런 구(球)나 또는 깨지기 쉬운 폴리의 재질로 인체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건드리면 무너져 버리는 모래성과 같은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김범수의 인체 형상이 기괴하고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은 필립 톰슨이 "그것이 제아무리 이상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공상적인 것과 친화관계를 가지고 있기는커녕 여전히 현실적인 우리의 당면현실이며 이점이야말로 그로테스크를 그처럼 강력한 것으로 만드는 것"(같은 책, p.31.)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것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현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 김범수의 그로테스크의 조각 형상은 베르나르 제르보(Bernard Gerboud, 파리 8대학 교수)가 "인위성은 창조과정 속에서 살아있는 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고, 동시에 죽음이 하나의 단계일 뿐인 그 곳에서 총괄적 순환과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삶이 영향을 취하는 곳인 이 두 상태의 경계에서 낯설음으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삶/죽음, 정신/신체를 하나의 순환론적인 체계에서 현재의 지배적인 담론과 클론으로 야기될 머지않을 미래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봄으로써 낯선 광경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조관용
Vol.20120427b | 김범수展 / KIMBEOMSOO / 金範洙 / sculpture.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