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427_금요일_05:30pm
참여작가 강형구_권여현_남경민_서은애_데비한 강영민_탐리_황란_강민수_박형근
주최 /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뫼비우스의 띠, 신화적 사유를 삼키다. Mobius Strip: Embracing Mythical Thinking ● 긴 종이의 끝을 한번 꽈배기처럼 꼬아 붙이면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진다. 띠를 길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지점에서건 출발하면 어느덧 반대편을 걷고 있음을 본다. 띠의 밖을 걷다가도 안을 만나게 되고, 안을 걷다가도 밖을 만나게 된다. 2차원의 평면에서 출발해서 안과 밖이 바뀌며 안과 밖이라는 개념이 붕괴하고 있다. 고정된 세계가 붕괴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경직된 사고체계가 이 뫼비우스의 꼬인 띠에서는 들어맞지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이 있으면 그와 분리된 밖이 있다는 단편적인 사고를 부셔주는 간단한 형태이다. 여기서 여러 경계에서 더 자유로운, 세상의 창의적인 사람들을 생각했다.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인 삶에서 조금은 그리고 그 이상으로 남다르게 창의적인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보이는 것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펼쳐낼 사유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다채로운 시각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예술 분야가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시각예술가들이 그러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출발에서 뫼비우스의 띠가 만든 길은 지속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신화(神話)와 신화적 사유 대해 생각해 보며 뫼비우스의 띠, 신화, 신화적 상상력 그리고 예술가, 그들간의 연관성과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 신화는 오래되고 익숙한 멋진 이야기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들어가보면 살아있는 것(生)이 언젠가는 멸(滅)할 것이라는 원초적 '불안'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의미를 찾기 위해 생겨났고 이 두 축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신화적 사유이다. 인생의 두 개의 축인 살아있음과 사라져버림의 이중적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 인간의 끊임없이 사유가 신화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삶 속에서 죽음을 보고, 죽음 앞에서 삶을 보는 한 공간 안에서의 그 모순을 풀려는 노력이 담겨져 있다. 당시대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집단적 사유인 신화적 사유는 시대를 굴절시키고, 시대에 의해 굴절되어왔다. 신화적 사유는 평면적이고 직선적 선상에서 모순을 논하지 않는다. 차원을 달리하면 구조가 달라진다.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조 속에서 삶의 다양한 모순을 풀려고 노력한다는 면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2차원이던 평면이 상상력을 통해 3차원의 공간으로 변한 이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곡선으로 안과 밖의 경계 구분이 없어지는데, 바로 이런 지점과 같이 만나는 상상력이 '신화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 이것은 모더니즘 사유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 뿌리인 자연과 그 본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신화적 사유, 성스러움의 세계, 영원한 역사(현재)를 재현, 복원시키려는 의지들은 다양한 예술 분야 안에 녹아있다. 결국, 신화적 사유는 우리 (생의) '의미를 생성하는 능력'이자 생명력이고, 집단의 정체성과 시대적 변화를 극복하고 역사를 이어가는 힘으로 증여贈與되어 왔다. 지금, 그것은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에 여전히 이 시대 속에 살아 숨쉬고 있어 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진행한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멸의 문제에 대한 사유, 시대적 절실한 모순에 대한 모색, 자기 내면화를 통한 상상력의 세계 등... 근원적 문제의식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는 일은 예술가들(-사실, 미술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이 해왔으며(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p.189 ● -B. Moyers: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神性)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 -J. Campbell: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시각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생((生)과 그 본질에 근원적으로 다가가 해석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층적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사유의 방식을 '신화적 사유'라는 맥락에서 한번쯤 작품 안으로 들여다 보고자 한다.
강형구| Hyung-Koo Kang ● 인간의 얼굴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시간을 짊어지고, 세월을 견뎌낸 유명하고도 익숙한 얼굴 안에서 그 존재는 떠났어도 차곡하게 쌓여 되살아나는 인간의 역사를 마주한다. 한 인간의 역사 안에서 발견되고 발전되는 사유는 시대의 역사를 관통하며 우리 앞에서 시선의 마주침으로 인해 강력한 진동으로 울린다. 인물과 시대가 만난다. 강형구의 인물 작업은 즉각적으로는 얼굴, 더 나아가 얼굴 너머에 감추어져 있는, 또는 그런 얼굴을 탄생시킨 얽히고 얽힌 사연과 삶을 응축해내어 내 앞에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의 객관적 모습에, 작가가 상상하고 사유한 인물에 대한 해석이 밀도 있게 녹아있어 주름, 눈빛, 솜털 그리고 필들의 움직임을 담아내며 옹골차게 들어서 있다. 표현은 너무 맑아서 마치 그 존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으로 빨려가는 느낌을 준다. 역설적이게도, 부재한 존재이지만 그 부재적 존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마치 그 존재의 진실을 마주하는 느낌을 준다. ● 얼굴에 대한 접근이 이차원이고 평면적인 사유라면, 강형구의 인물작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얼굴이라는 2차원에서 시작해서 마치 뫼비우스의 띠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다층적으로 끊임없이 연결되듯이 넘어간다. 살아 있던 당대의 얼굴, 그리고 그 존재는 없지만 여전히 해석되며 끊임없이 해석과 사유를 지금에서 발생시키는 얼굴. 강형구의 인물은 신화가 되어 버린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은 강형구에 의해 지금 현재에 새롭게 '신화적으로' 해석되는 끊임없이 사연을 생성해내고 있는 얼굴이다. 여기서 '신화적으로'라는 말은 작가에 의한 다층적이고 존재 너머에 있던 어떤 의미를 뽑아내려는 '신화적 상상력'에 의해 재탄생된 인물이다. 고정되게 읽혀지는 존재가 아닌, 맑고 투명한 장막을 한꺼풀 걷어내고 존재의 내면을 마주하는 현장을 그의 얼굴 작업을 통해 만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맑고 투명한 부재하는 존재의 지금 여기 와있는 다른 존재방식을 보며 인간과 그 본질에 대한 사유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지닌 생과 멸의 이중적 존재의 가능성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한없이 투명하고 맑게 빛나고 울리는 호수의 파문처럼, 이 앞에 마주놓인 존재(작품)를 통해 우리 내면에서도 어떤 파문이 울려 퍼질 것이다.
황란| Ran Hwang ● 일상 속의 작은 물건들이 과연 어떻게 그 존재 이상의 가치를 발하는지를 경험하게 되면 '숭고'를 느낄 수가 있다. 황란의 작업은 실, 핀, 단추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소재가 완전한 변신을 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단추 하나에, 그리고 셀 수 없이 무수한 단추가 모여 새로운 울림의 경지를 보여 준다. 이것은 무(無)에서 유(有)의 사유가 되는 과정이다. 단추나 핀 하나에서도 우주적 사유를 담아내고 바라볼 수 있는 밝은 눈이 있는 것이 아닐까싶다.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一卽一切多卽一)라는 화엄경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단추와 핀이 사유의 씨앗이 되어 작가의 정신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을 때, 그것들이 새로 연결시켜주는 세상은 작가와의 인연가합에 의해 탄생되고 개인의 사유, 더 나아가 사회와 시대에 대해 진실로 보려는 시선이 담겨있다. 황란이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할 때 근본적인 것은 그 빛나는 물질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고, 펼쳐져 인간사의 많은 사유를 연결시키고 이끌어내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듯하면서, 확장되어지는 재료들을 통한 설치 작업을 보면 그 자체가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람객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끈으로 이어주어 함께 공유하고 내 머리 안에서 갇혀버린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고 있다. 또한, 작업은 그 과정 속에서 이미 작가에게 수행자적인, 구도자적인 길을 가도록 이끌어내고 있다. 가장 눈부신 형상 속에 가장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얼마나 큰 목소리를 내는지, 그 변화 안에는 지금의 우리가 놓쳐버리고 간과하는 많은 것들을 '눈부시게 빛나는' 죽비가 되어 등줄기를 내리치고 있다. 신화적 상상력과 신화적 사유란 불교의 연기설과 연결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한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어 끊임없이 이어지고 연결되는 세계. 작품 안에서 핀이나 단추가 무수히 연결되고 관계 맺고 그게 작가의 더 큰 사유의 울타리로 만들어지고 형상으로 갖춰지고 우리는 그 안으로부터 새로운 세상과 조우한다.
권여현| Yeo-Hyun Kwon ●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C. G. 융 『두 편의 에세이Two Essays』) 푸르고 생생한 내음을 풍기는 다른 세상의 낯선 풍경, 가끔은 몽상으로, 발랄한 상상으로 머릿속에 그려봤을 법한 젊은 역동성, 그리고 애매하지만 충만한 감성적 연결로. 권여현의 작품 안에서는 상징과 알레고리, 은유와 모순 등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녹아있고, 연상할 수 있는 어떤 것들과 고리를 연결시켜 내고 있다. 참으로 다이나믹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에너지의 분출이 느껴진다. 출항나간 배가 매번 안전하게 돌아와 부둣가에 정박해있을 법한 풍경을 보고도 언제 닥쳐올지 모를 존재의 불안과 위기를 떨쳐버릴 수 없는 고독한 자아들. 그런 세상 속의 많은 자아들. 대부분의 아폴론적 자아 찾기의 소유자들은 과감히 생멸의 일회성 앞에서 디오니소스적 발란을 꿈꾸어 본다면 내 앞에, 당신 앞에 내 자신에게로 이르는 어떤 길을 만나지 않을까 한다. 작가는 말한다.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광기를 주목해야 하고, 우리 머리와 가슴속에 꿈틀대는 독해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폭력성이나 광기로 표현되는 신들의 '속삭임'이라고... 모든 것의 시작은 그 앞으로 한발짝 내딪을 때장막을 걷어내고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다.
강민수| Min-Su Kang ● 강민수의 작업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부활한 인물(대상)들이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마치 연극적인 공간으로 들어와 인물과 공간은 특정 기억으로부터 낯설게 재조합되며 새롭게 다층적인 사유를 생성해 내고 있다. 인물, 공간은 시간성이 담겨져 있을 수 있고, 그 안에서는 여러 맥락과 여러 겹의 층위를 생성해 재창조된 구조를 지닌다. 작가의 주요 관심 코드인 부재는 없고 없어진 지점이 새롭게 인식되는 출발점같은 것이다. 단순한 일상의 풍경이 아닌 여러 맥락에서 시간과 의미를 담고 창조된 작품세계에서는 일상 같으면서 비현실적인 낯설음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 우리는 이 비현실적 그림 안의 숨겨진 기억과 부재에 대한 씨앗이 찬찬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 없지만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는 신화화적 공간과 시간 안에서 회화는 힘을 얻고 무한히 확장되는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강영민| Young-Min Kang ● 우리 시대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각성을 디지털프린트 설치로 보여주는 강영민의 작업은 현상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세계를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압도적이고 인상적으로 얽혀있는 날렵하고 위압적인 선들은 단일의 선으로 시작해 공간을 파고들고 그곳을 해체시키고 다시 조합되어 재해석하는데 있어 마치 큰 나무를 받치고 있는 땅 아래 거대한 근본인 뿌리를 대면하고 있는 기분이다. 표면과 현상의 세계가 평면적이고 직선적인 세계라면, 그 너머에 대한 불편할 수도 있는 진실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낯설게 보기, 즉 다차원적인 사유는 곧 '신화적' 상상력의 사유에 속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곧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사유의 방식이라 볼 수 있겠다. 강영민의 작품 안에는 우리 시대의 현상과 이면이 만나고, 부딪히며 충돌하여 끊임없이 존재와 의미와 형태의 발견과 해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표면적, 상징적, 은유적 의미들을 모두 통찰하고 생산해내고 있다.
남경민| Kyung-Min Nam ● 남경민의 작품은 정확한 빛과 색채가 살아있는 구조로 구축된 낯설면서도 또한 익숙한 듯 잘 설계된 공간구조물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 안에 가지런히 숨겨진 상징적 오브제들과 그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짐작하며 다층적으로 풀어볼 수 있는 사유의 풍경이 생산되고 있다. 그 안에 부유하는듯하며 비현실적인 시공간에서 발생할 것만 같은 어떤 가능성과 사건(-그러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그런 사건들)은 보는 이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 의식과 존재의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키며 상상하게 만든다. 마치 작품 안의 공간을 떼지어서 가뿐히 날아오르는 나비들의 고요한 군무(群舞)처럼 말이다.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초현실적인 나비의 존재는 그림에서의 일루젼(환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예술가 내면속의 상처입기 쉬운 예술적 자의식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감각, 공간, 상징, 알레고리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작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 의식의 확장으로 이끄는 것 같다. 이 세계가 아닌 시간과 공간이 오묘하게 결합되어 창조된 작가의 세계는 일차원에서 다차원으로 넘어가는 상상력의 세계 이상의 새로운 온전한 세상을 보고 있는 듯한 충만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우리는 그곳을 채우고 있을 법한 사람이 부재한 풍경으로 초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때론 은밀하고, 때론 영광스러울만한 그러한 공간과 시간이 작품 안으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내면의 풍경(Mind Scape)으로.
데비한| Debbie Han ● 데비한의 작업을 박천남은 자기극복과 자기치유 과정 그리고 전혀 새로운 자기인정, 자기규정으로 본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기성에 대한 극복에의 의지로 읽었다. 개인의 역사 속에는 많은 것들이 누적되어 자신을 만들어왔고,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가며 역사를 쓴다고 보았을 때, 한 예술가의 삶은 그 지점에서 중요한 실타래를 풀어낸다. 그녀가 드러내는 독특하고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들의 탄생의 배경에 깃들어있는 사유와 개념이 존재와 삶에 대해 끝없는 탐구라고 보았을 때 창작의 행위, 다양한 문화권에 대한 인식에 대해 서슴없이 전개되어 나간다. 강하게 시각적으로 와 닿는 작품 이면에 존재할 작가 안에 내재된 복합적이고 다층적이 사유를 시각 너머로 눈을 깊이 돌려 바라봐야 할 지점에서 우리는 조금 더 진실된 접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전적 도상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데비한의 인물 작업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기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지닌 자각이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진중한 성찰의 끊임없는 현재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탐리| Tom Lee ● 탐리는 혼성문화와 일상적 시각의 전복을 시도해 온 「Creative Commons Series」통해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 사이의 모호하면서도 어울리는 독특한 방식의 화법을 표현해 온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호기심 많던 10대 시절의 과거를 떠올리며 문학에 대한 아련한 애정과 그가 발을 딛고 살아있는 현실에서 마치 시공이 초월된 찰나의 느낌을 받았을 때를 놓치지 않고 연결시키며 관객을 그의 영감의 세계로 초대한다. 일상적이고 않고, 낯설지만 너무도 인상적인 어느 순간을 만났을 때 서로 다른 단어, 또는 개념들이 맞물려들어 톱니바퀴처럼 들어맞으면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넓혀준다. 그가 어느 날 맞닥뜨린 이런 예상치 못한 순간, 기억될 순간을 만났을 때의 반짝이는 인상이 간직된 채 화폭으로 강하게 이동한다. 상상력, 마치 이렇게 시작했는데 저렇게 향하고 있고, 결국 예기치 못한 만남이 만들어내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와도 유사하다. 그것은 탐리가 이번 전시를 통해 접근하고 열게 된 만남의 세계, 즉 일상의 차원에서 다층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뜻밖의 마주침의 경험이길 기대해 본다.
서은애| Eun-Ae Seo ● 서은애의 풍경을 보면 한 폭의 고요한 옛 시절을 닮은 색다른 산수를 흐뭇한 명람함으로 만나는 듯하다. 그런데 놓치고 지나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참으로 꿈틀대는듯한 형상들이-언제나 주로 작가 자신을 닮은- 시대를 역행해 그 안에서 똘망하게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주인공은 어떤 이상향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뛰어들어 삶의 유쾌한 모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고전(古傳)에 대한 그만의 현대적이고도 독특한 해석과 그로인해 파생된 해체적 풍경은 한국화의 범위로 한정하기에는 오랫동안 참신하고 진지하게 유지해 오고 있다. 해체되어 현대적으로 변용돼 불러들여진 세상 그 안에서는 과거의 이상과 현재의 이상이 묘하게 조화되며 풍부한 상상력과 사유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시대를 흡수하고, 시대를 거스르며, 시대와 함께 녹고 있는 다양한 표현이 어울릴듯한 서은애의 작업은 스토리가 넘실대는 신화의 바다 속에서 '신화적 상상력'으로 풍덩 몸을 던져 빛을 발하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고전과 현대가 만나 펼쳐지는 새로운 우리시대의 현대적 신화의 창작( 또는 창조), 이것이 서은애의 잔잔하고도 잊을 수 없는 강한 힘이다.
박형근| Hyung-Geun Park ● 시간의 울림(Resonance of Time), 금단의 숲(Forbidden Forest) 등에서 보여주는 박형근의 사진작업은 은밀하게 고립시키는 독특한 풍경 안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아스라이 연결되어 있으나 감지되거나 보이는 않는 '끈'이 느껴진다. 인간이 부재한 그의 풍경 속에서, 인간과 세상과 만물에 대해 사유하게 될까. 사람 안에서 품어내는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 현실 너머로 연결되는 존재로의 통로가 되는 길 위에서 생명과 삶과 자연과 우주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산 것과 멸할 것 사이를 오고 가는 존재를 향한 울림이 인간이 부재한 풍경 안에 숨겨져 있다. 본질과 근원이 녹아있는 듯 깊이 있고 초현실적인, 때론 연극적인 풍경에서 존재를 생각하게 하는, 존재를 다층적으로 생각하는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작가의 말대로, '보지 않고 생각을 멈출 때야 비로소 더 많이 볼 수 있는 세계'가 우리 내부에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존재하지 않을까. ■ 조혜영
Mobius Strip: Embracing Mythical Thinking ● A Mobius Strip can easily be created by giving a paper-strip a half-twist, then joining the ends together. Supposing the strip is a path, you will return to your starting point if you walk along it. You may meet the inside of the strip while walking the outside; and vice versa. It is a two-dimensional space, but the inside and outside change. And so, the concept of inside and outside and a fixed world collapse. Our inflexible thinking systems do not echo with the twisted band. It is a simple form shattering the idea if there is an interior there is a separate exterior. ● This reminds us of innovative people transcending boundaries. They are distinctive and creative, departing from one-dimensional life. They reveal the meaning and value of the visible and invisible through great diversity with diverse perspectives. Art and visual artists take the path like a Mobius Strip. Considering myth and mythical thinking, the exhibition shows connections among the Mobius Strip, myth, mythic imagination, and artists. ● A myth is not an ancient, friendly, fabulous story. It derived from a primal 'anxiety', that all living things will be by nature extinguished. Mythical thinking overcomes this anxiety, based on the two axes of life - aliveness and extinguishment. A myth reflects incessant human thought about the potential of our twofold existence, to solve the contradiction that in the space where life meets death, death meets life. Mythical thinking is a sort of collective idea to relieve human anxiety. It refracts the times and is refracted by the times, and contradiction here is neither planer nor linear. A structure alters if dimension changes. Mythical thinking is like a Mobius Strip in that it rids contradictions in a three or multi-dimensional structure: a two-dimensional plane is transformed into a three-dimensional space. Within this curves continue, and the border between interior and exterior breaks down. 'Mythic imagination' arises at this point. ● Attempts to overcome the limit of modernist thinking and understand nature and its essence are based on this mythical thinking. Many art genres reflect an artists' will to reproduce and recover this mythical thinking, holy world, eternal history. Mythical thinking is the ability to create meaning (of life) and vitality, as well as the force to continue a collective identity and history, overcoming the changes of the times. A myth is not an outdated ancient story. It is alive in this age, presenting a serious consideration on life. Artists have taken on the mission to interpret the invisible with the visible through a fundamental and critical consciousness of the problems of creation and extinction, the contradictions of the times, and the internalized world of imagination. ● This exhibition approaches and interprets the true nature of life explored by visual artists, shedding light on their multi-dimensional approach to diverse thinking in the context of mythical thinking. ■ Hyeyoung Cho
Vol.20120427a | 뫼비우스의띠, 신화적 사유를 삼키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