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초대일시 / 2012_0421_토요일_05:00pm 2012_0421 ▶ 2012_0506 참여작가 / 남정애_안세은_조혜정
2부 초대일시 / 2012_0511_금요일_05:00pm 2012_0508 ▶ 2012_0523 참여작가 / 김혜란_김홍식_정은아
3부 초대일시 / 2012_0525_금요일_05:00pm 2012_0525 ▶ 2012_0609 참여작가 / 김미경_김지수_정희경
4부 초대일시 / 2012_0717_화요일_06:00pm 2012_0717 ▶ 2012_0802 참여작가 / 권오신_이주은_허정원
주최/주관 / 스페이스 15번지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15번지 Tel. 070.7723.0584 space15th.org
나, 내게 적힌 것, Myself : Writing-inscribed Scene ● 예술창작의 주체가 배타적으로 남성들이었다는 (은폐된)사실을 가시화하는데 있어서 게릴라 걸즈Guerrilla Girls의 저 유명한 포스터는 아무리 봐도 탁월했다. 개인 (남성)예술가로 구성된 예술계를 익명의 집단적 행동주의를 통해 침식해온 페미니스트 작가들인 게릴라 걸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예술가 중 여성 예술가는 3% 미만이고 83%의 누드는 여성이다 - 미국의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여성은 옷을 벗어야만 하는가?"라고 묻는 포스터를 만들어 작가는 대체로 남성이고 누드모델은 대체로 여성인 미술계의 불평등한 구조를 폭로했다. 남성과 여성의 비대칭적 관계가 미술계 안에서 예술가-주체와 대상-오브제의 구조를 통해 반복되고 있다는 인식은, 예술이 여타의 자본주의 문화 형식들처럼 남성적 환상을 위한 형식임을 입증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여성은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 구원의 매개자, 환상의 대상으로서, 남성적 시선의 오브제로서 '거기에' 있었다. ● 여성 작가란 표현은 일단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시각적 주체의 자리에 이제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들어간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그 경우 겉보기의 당당함이나 쾌감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기존 남성적 구조인 바, '주체/대상'의 구조를 이제 여성의 자리에서 반복한다는 위험/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즉 지금껏 남성이 자행한 환상/폭력을 이제 우리도 하겠다, 로 읽히게 된다. 여성이 주체-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여성도 자신의 환상의 오브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일 수 있고, 이는 타자의 대상화가 전제로 요구된다는 점을 외면한 채, (남성)작가가 되겠다는, 아니 남성이 되겠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때 여성 작가는 작가일 뿐 '여성' 작가는 아니다. 젠더 특수성은 사라져야 한다. ● 만약 여성은 비단 예술계만이 아니라 상징 질서 안에서 이미 항상 이성애자 남성에게 부여된 주체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면, 여성은 여성에게 강요/반복되는 대상의 지위를 '구조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타자라면, 아니 그렇기에 주체의 권력과 폭력을 넘어선 다른 삶을 이야기할 기회를 가진 '기이한' 주체라면? ... 그렇다면 아니 그러므로 여성 작가는 오브제의 지위에 대해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 주어와 목적어, 주체와 대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오브제의 지위에서 넘어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 이번 전시는 여성 작가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면서 그녀들에게 주어의 자리보다는 목적어의 자리, 독립적 존재의 지위보다는 관계적 삶의 지위, 초역사적 인격의 지위 보다는 역사적 한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삶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것이 『나, 내게 적힌 것 Myself : Writing-inscribed Scene』이란 전시제목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자율적이고 독립된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의 수동성을 거꾸로 관계의 절실함, 불가피함, 어려움, 고통을 육화한 여성들의 작업의 힘으로 재배치, 긍정하고자 했다. ● 여성들에게 일상적 오브제는 대상화시킬 수 없는 자신의 일부이자 확장이고 그렇기에 그녀들의 오브제는 물화된 채 '그'의 시선에 갇혔듯이 갇히지 못하고, 그녀의 감정과 함께 흘러간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이미 항상 남성적인 상징 질서 안 자신들의 낮고 어둡고 쓸쓸하고 연약한 삶이 '선택한' - 수동적 적극성! - 자리이다. 여성의 오브제들은 남성의 오브제들처럼 거리를 통해 관조되는 안전한 (주체의)투사물들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들의 존재를 지우고 욕망을 지우고 삶을 지우려는 남성적 언어 안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가시화하려는 여성들이 감정이입하는 '자아'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주체화를 보증하는 대상화, 객관화에의 욕망 보다는 주체화에서 밀려난 채 자리를 잃고 떠도는 여성 자아의 애가(elegy)가 들어 있다. ● 우리는 주체의 일관성, 안전함을 잃을 때, 아니 비로소 그때 슬픔과 두려움에 붙들린다. 주체는 기쁨, 행복, 확신의 자리이지 자아가 위험해져야 드러나는 관계의 절대성, 사랑의 맹목성의 자리는 아니다. 그렇기에 여성 주체는 자기를 잃으면서, 너와 겹쳐지면서, 즉 주체와 대상이 겹치는 지점에서 겨우 몸을 추스르고 말하고 쓴다. 아니 몸으로 말한다. ● 여성을 주체로, 자기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주어로, 세계를 자신의 시각과 관점으로 통제하는 주인으로 설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본 전시는 12 명의 (여성)작가를 '여성'으로 묶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대상으로부터의 안전한 거리를 통해 시각적 통제력을 견지하는 남성 주체가 '아닐' 수 있는 특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여성들은 반복적 훈육을 통해서 스스로를 주체로, 그러므로 남성으로 '오인'하는 지점에서 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일시적으로 '여성'으로 호명된, 그것도 스스로를 '목적어'의 자리에서 재구성하려는 태도를 수용한 이들 작가들의 작업의 일관성이나 통일성은 거의 찾기 힘들다. 같은 시대를 다른 나이, 계급, 조건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이 여성작가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이었고, 이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동일한 문제에 근거하여 정체화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여성이라는 공통성, 남성적 구조 안에서 살아간다는 유사성, 그것을 각인한 삶의 집단성에 근거하여 우리는 과감히 하나의 '제목/이름' 아래에서 일시적으로 묶일 것이다. 우리는 이번 전시를 위해 두 번에 걸쳐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기 작업의 특수한 오브제들, 그것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순간의 나(me)의 반영물로서 구체화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가가 자기 작업의 이유를 '알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작가의 오브제 선택에서 어떤 무의식의 작용을 인정/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그녀들의 오브제들에 대해 '잘' 모른다. 더구나 여성들의 욕망이 육화된 대상들은 너무 다양하고 이질적이어서 어떤 일반성을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다. ● 단 그것이 일상적인, 흔한, 평범한, 사소한 오브제들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삶 속 그녀가 자주 만났던 사람들만큼이나 '친숙하고(낯설고)', '은밀하고(공개적이고)', '사적인(집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적 경험의 한 가운데에서 작가가 '만난' 오브제들에 주안점을 두려고 했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들의 작업도 포함되어 있다. 강력한 규범이 지배하는 전시를 기획한 것은 아니기에, 그런 느슨한 묶음이 가능했다. 우리는 어떤 강력한 중심, 결속, 동일성을 의도하지 않았다. 단 개성 강한 작가들이 우연히 일시적으로 한 자리에서 서로를 만나고 목소리를 듣고 차이를 확인하고 공통성을 긍정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즐거움은 아주 많이 누렸다. 우리는 '앞으로'에 대해 아무런 약속도 없지만 또 만나고 이야기하고 웃고 울 것을 기대한다. 대의가 없는 만남은 불쑥 '사건'처럼, '손님'처럼 오고야 말 것이다. ● 여성들의 말은 직선적이거나 명료하지 않다. 애당초 말이 남성적 구조로 되어 있다면, 그러므로 여성의 욕망을 남성적 말에 담는다면 그것은 이미 분열과 어긋남을 포함한 것이고, 그렇기에 여성의 말은 모호하고 불투명하고, 심지어 거짓말이다. 여성의 거짓말은 참말에 비해 열등하고 나쁘지만, 욕망과 구조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장치로서는 탁월한 것 아닐까.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이미지/설치/영상과 말을 병치시키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그렇다고 그녀들의 말이 곧 그녀들의 작업을 위한 유일한 설명문이나 해석이 아닌 것은 그녀들은 숨기고 정색하는데 프로들인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주저하는 말, 감추는 말, 드러내면 누가 울거나 내가 혼날지 모르는 말들, 짐짓 거짓말인척 하는 말. 너무 참말이어서 거짓말 행세를 해야 하는 말들. ... ● 우리는 결국 말을 병치시킨다. 읽으려는 자와 읽히는 자 사이의 '게임'은 관계의 열정, 관계의 수난을 끌고 간다. "사랑해!"가 아니라 "내게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해봐!"라면서 참말을 '간구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는 전율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결국에는 '사랑'을 위한 것이기를! 목적어 나의 자리에 이미 들어와 있는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한 긍정의 노래이기를! ■ 양효실
예닐곱 살 때 엄마는 매일 출근하시기 전 이른 새벽 나를 억지로 깨워 앉혀 놓고 빗으로 가지런히 머리를 빗겨 팽팽하게 잡아 모아 머리카락을 땋아 주었다. 엄마가 그랬듯이 딸이 언제나 단정한 모습으로 보여 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올 머리카락도 삐져나오기라도 하면 다시 팽팽히 내 머리카락을 잡아 모았었다. 어린 나에게 도망가고 싶을 만큼 성가시고 괴롭고 아픈 것 이지만 엄마였기 때문에 도망 갈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 물감 묻은 첫 실을 백지위에 내려놓을 때의 긴장감이란 언제나 그 팽팽하게 잡아 당겨지던 그 기억으로 연결 된다. 삐져나온 한 올의 머리카락이 나의 첫 실을 놓게 한다. ■ 남정애
Floating Between-사이에서 헤매다. ● 이 사람이 보는 나는 작가일 뿐이고, 저 사람이 보는 나는 주부일 뿐이다. 여기에선 누군가의 엄마로만 보고, 저기에선 누군가의 부인으로만 본다. 여기에서는 사치스럽다는데, 저기에서는 한없이 초라하단다. ● 여기와 저기 사이,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 이것과 저것 사이, 이상과 현실 사이, 이성과 감성 사이, 안주와 도전 사이, 만족과 불만 사이, 진심과 가식 사이에서 오늘도 어중간하게 끼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헤매고 있다. ■ 안세은
유관순은 식민지의 수난과 저항을 대표하는 여성 영웅이지만, 침탈당한 신체의 주인으로서의 그녀의 목소리는 정작 찾을 수 없다. 주체로서 여겨지기보다는 타자로서 대상화되며 저항은 사라지고 가부장적인 권위와 식민주의적 통제가 여성의 위치를 재구성한다. 왜 우리는 '유관순 누나'를 잘 알고 있다고 믿을까? 그것은 어떤 주체 구성의 기획이 시대를 넘어 무수히 반복되면서 우리 몸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지탱하는 분화되지 않은 기원적 공간에 관한 탈식민 여성주의적인 독해는 억압의 조제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여성 의식, 여성 존재, 좋은 여성, 좋은 여성의 욕망을 구축하려는 대항 내러티브이다. 나는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미결정적인 존재로 진술되어 남근중심적 전통에 이용당하는 유관순이라는 우상의 치부를 드러내는 한편 그 주체가 가진 정확하고 윤리적인 이질성에 접근하려는 중이다. ■ 조혜정
일상 공간은 나를 위한 공간, 내 손이 닿으면 이렇게 저렇게 바뀌고 눈을 감고 더듬어서도 알아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실내 물건들은 그 자리에 정지한 듯 멈춰 있지만, 심리적 공간에서 물건들은 사람처럼 살아서 소리를 내고 이동한다. 나는 공간 속 물건과 교감하고 어쩔 때는 꼭 나같다. ● 위에서 아래로 굽어보면서 그들을 줄을 세운다. 그들의 자리를 정해준다. 내 맘대로 이리로 저리로 움직이면서... 그들은 그런데 거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단지 흔적만 남기면서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날 뿐... 나는 그들을 내려다본다. 아~~~아니다... 나의 공간에서 그들이 나를 내려다본다. 이젠 누가 누구를 쳐다보는 건지 알 수 없다. 단지 공간에 나와 그들이 함께 한다는 사실 밖에 알 수 없다. ■ 허정원
가톨릭 전례에 나오는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를 중첩시켰다. 성경의 어느 구절에도 나오지 않는 외전外傳에만 등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어머니인 그녀-성모는 고통스런 형벌의 길을 가는 중의 아들과 만난다. 그의 추종자인 그녀'들' 역시 그의 고통을 지켜 볼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의 피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 기록하게 된다. 종국에 어머니인 그녀는 죽은 자식의 시신을 거두고 슬퍼한다는 이야기이다. 외전 속 성모의 삶을 동경하며 살던 신앙심 깊은 나의 (시)어머니 K는 일찍이 의지하던 아들을 먼저 보냈으나, 온갖 모진 풍파에도 굳건히 집안을 일으키며 신앙 속 성모의 삶을 닮으려 노력한다. 세월이 흐르고 그녀는 자식들의 평탄치 못한 삶을 지켜봐야했고, 그럴수록 점점 고집스러워지고,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 싶어하나 그렇지 못한 현실을 집에 잘못 들어온 그녀'들' 탓으로 돌린다. 그녀는 요즈음 모바일로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하고 있다. 내 결혼에 처음 들어와 각인된 그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직 풀어내거나 이해하거나 다가가거나 멀어지거나 사랑하거나 그렇지 못한 채 짊어지고 다니는 나의 이야기이다. ■ 김홍식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펜을 들고 별 목적 없이 팔을 움직인다. 선의 궤적들이 알 수 없는 모호한 형상들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나는 또 다시 어떤 '의미 있는' 대상들을 찾는다. 순간적인 인상과 파편적 문구들이 주는 기쁨과 충격들. 미완결성과 불완전한 어떤 특징들에 대한 이끌림. 견고하지 않은 의식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며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색면 조각들로 채워진 화면 속에는 마치 보호색을 이용하여 숨어있다가 어느 순간 작은 몸을 드러내듯 등장하는 생명체들이 있다. 의식과 시간, 그리고 컴퓨터 속의 데이터는 모두 변화의 와중이고 움직임의 과정에 있다.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만나보자. ■ 김혜란
잔디가 부추 같다. 왜 사람들이 부추를 사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렇게 흔한데. 나뭇잎이 깻잎 같았다. 나뭇잎을 따 먹으면 되는 줄 알았다. 어렸을 때 나는 그랬다. 어린 시절의 나는 모든 일들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었다. 사람과 동물들...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나의 움직임에 따라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형과도 같은 존재, 아니 인형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들, 강아지, 자동차, 등등...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세트와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삶은 내가 주인공인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인형극 같은 것이라 믿었다. 어느 때인가 그들대로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우울해졌다. 난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었다... ● 나의 작품에서는 원숭이가 등장한다. 어렸을 때 놀러갔던 시골집은 무언가 그 집을 지키는 것을 갖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그런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붕 위를 올려다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린 조카가 처음으로 원숭이를 그렸다. 아! 그랬구나. 원숭이였구나. 원숭이는 어느새 나의 작품 속 지붕위에 올라가 작품 속 공간을 지켜본다. 더 이상 원숭이는 지붕위에 있지는 않는다. 풍선을 타고 나의 작품 속을 여행한다. 사각형의 작품 속에서 원숭이는 주인공으로 이미지 속을 여행한다. 원숭이는 어쩌면 현실에서 도망친 나 아닐까, 요즘 드는 엉뚱한 생각이다. ■ 권오신
녀석이 잠들었다. 갱지에 둘둘 말아 마루 한 켠에 세워두었던 종이를 또 펼친다. 네 귀퉁이를 두툼한 사전으로 눌러두고, 녀석의 손에 닿지 않도록 통에 담아 숨겨둔 목탄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야간작업을 시작한다. 새벽녘 꼭 한 두 번씩 깨서 우는 녀석 때문에 지난봄부터 집에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집중이 썩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은 녀석의 장난감 조각들이다. '토르르륵' 소리를 내며 진공청소기의 흡입구로 빨려 들어간 손톱보다 작은 조각들은 먼지봉투를 교체 할 때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청소하다 말고 쪼그리고 앉아 뽀얀 먼지더미에서 나온 조각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내가 이걸 한 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음을 문득 깨달았다. 작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정교한 조각들을 보며 생경함과 친숙함이 묘하게 충돌하고 있음을 느낀다. 녀석이 잠든 새벽, 방으로 들어가 땀으로 범벅이 된 녀석의 이마를 쓸어주고 나왔다. 다시 엎드려 더딘 작업을 시작한다. ■ 정은아
인삼, 산삼보다도 더 쓴 고등학교 삼학년 이 세상에서 대학가는 일 만큼 어려운 것이 어디 있을까 했는데…. 그 배로 살아온 시간 앞에서 나를 뒤돌아본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던 동료들은 이제 너무나 다른 형태의 삶 속에 있다. 나의 시계만이 멈춰져 있고... 배우자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가정으로 부터 오는 행복감과 절망감으로 울고 웃는 평범한 일상에서의 이야기들은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 분명하게 나의 시계도 움직이고 있었을 텐데…. 다른 공간속에서 바라보는 시선, 편견, 생각들은 내 맘 속에 새겨진다. 그 나이가 되면서 이루어가고 사는 것의 형태…. 사회의 관념들을…. 푸르고 드높은 하늘에 구름의 이름으로 수를 놓아... ■ 정희경
그림은 집과 같습니다. 제 희망목록중 하나는 집을 가지는 것입니다. 제 집은 저의 내면입니다. 제가 숨을 수 있는 곳, 안식처, 사랑이, 엄마가 있는 곳... 그것을 달라고 달에게 빌었습니다. 가질 수 없음을 내 진작 알았지만, 달에게 빌었습니다. 달이... 집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 달은 저에겐 내면이며 상처입니다. 아닙니다. 안식처입니다. 계절이 왔었습니다. 계절들이 지나갔습니다. 저는 조금은 깊어졌으며, 차가워졌습니다. 다시 달 곁으로... 집으로 가봐야겠습니다. 달이 절 차갑게 가두든지 말든지 달 옆에 누워야겠습니다. ■ 김미경
나는 억압의 반복과 해방의 가능성 사이에서 진동하는 일상의 양가성에 주목한다. 나의 일상은 일견 무력감과 긴장의 연속이고, 동시에 위대한 창조의 근원이다. 일상은 일견 권력이 부재한 친밀함의 터전이지만 동시에 일상은 보이지 않는 힘들에 의해 움직인다. 일상은 개인의 심리적 구조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권력이 행사되는 공적 영역이다. 이러한 일상의 이중성을 포착하고 드러내기 위해 나는 작업한다. ● 나의 작업에서 일상의 이중적 국면인 바 억압과 해방을 구체화하는 행동이 '반복'이다. 반복은 일상의 '본성'이고, 반복을 반복하는 중에 어떤 비일상적인 가능성,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등장한다. 나는 삶을 반복하는 작업에서 똑같은 것은 사실 하나도 없는 삶의 에너지, 가능성을 발견한다. 매번 같은 방식으로 긋지만 매번 다르게 차이나는 선들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물론, 자연과 생명의 차원으로 확대된다. 나의 작품에서 반복적인 선들은 특정한 종의 재현이라기보다는 미지의 생명체, 또는 생명현상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 김지수
나의 집에는 오래된 물건이 많다. 그냥 버려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버리려하면 엄마는 절대 못 버리게 하신다. 집안 곳곳에 쌓여 있는 이 쓸모없는 물건들은 용도를 잃은 채 늘 그 자리에 있다. 의자 하나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식구들 중 누구도 그 의자에 앉지 않았지만, 의자는 마치 뿌리를 내린 듯 거기에 놓여있다. 점점 그 뿌리가 깊이 드리워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의자는 엄마의 반짝거리던 젊은 시절부터 안타까움과 애달픔의 시간까지 엄마와 함께한 물건이다. 긴 시간 깊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의자의 아래 땅속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인다. 깊은 땅 속에는 어떤 울림이 있을지 의자가 서 있는 곳을 들여다보려한다. ■ 이주은
Vol.20120421e | 나, 내게 적힌 것-Myself: Writing-inscribed Scen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