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418_수요일_05:00pm
한메 장선백 유작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동덕아트갤러리 THE DONGDUK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51-8번지 동덕빌딩 B1 Tel. +82.2.732.6458 www.gallerydongduk.com
시류의 현상을 넘어 내면의 본질과 마주하다.-한메 장선백 선생 유작전에 부쳐 ● 한 작가의 작업은 작가 개인의 삶은 물론 그가 관통해 온 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게 마련이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란 바로 이러한 내용과 사실에 대한 진솔한 반응이자 기록일 것이다. 작가로서, 또 교육자로서의 故 한메 장선백 선생의 삶과 예술은 바로 자신이 속한 시공에 대한 부단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선생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삶을 통해 축적해 온 가치에 대한 신념을 전제로 자신의 삶을 일관하였다. 그것은 때로는 타협을 모르는 외골수의 고집으로 인식되기도 하였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원칙주의로 경원시되기도 하였지만 선생은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진실 되고 본질적인 것에 충실히 반응하며 이를 실천하였다. 선생이 평생을 통해 일관되게 견지한 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존중, 그리고 예술의 절대가치에 대한 확인과 실천이라 할 것이다. 이는 시류라는 현실적인 삶의 행태와 거리가 있는 것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외로운 것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러한 소신을 견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엄격한 가치를 적용해야 하는 고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삶과 예술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원초적인 원칙과 가치에 충실히 반응함으로써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념을 일관하였다.
선생의 일생은 부단한 자기성찰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회의 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직선의 길이었으며, 번다한 수식어로 내면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알몸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것이기도 하였다.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역사, 사회적인 관심사에 이르기까지, 또 세태와 시류에 대한 비판에서 삶과 예술의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자신에 대한 한없는 엄격함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견해를 피력하였다. 좌우를 살피지 않고 타협과 절충이라는 말을 뒤로 한 채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판단에 따라 자신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가치에 충실하고자 하였던 선생의 삶은 때로는 모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운 추상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러한 가치들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어떤 것보다 분명한 설득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선생의 삶은 그렇게 일궈진 것이다.
선생의 삶이 그러했듯이 그의 예술 역시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부단한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사에 대한 주관적이고 올곧은 인식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통해 선생은 '달빛 문화 청산'이라는 상징적인 화두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우리미술이 지니고 있는 숙명적인 것들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반성의 결론이다. 선생은 전통미술에서의 사대주의와 일제 강점기에 유입된 왜색화풍과 제도의 폐해, 그리고 서구제일주의에 함몰된 현대미술의 왜곡된 가치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며 각성을 촉구하였다. 선생의 견해와 주장은 시류와 때로는 시의에 어긋나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적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었기에 외면 받거나 경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오로지 자신의 체험과 사색을 통해 확인된 내면의 진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상황들과 마주하였다. 그것은 치열한 역사인식과 냉철한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한 우리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절절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구애됨이 없는 분방하고 다양한 작품세계를 펼쳐 보였던 선생의 작업은 결국 수묵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나 형식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선생의 삶과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불같이 뜨거운 열정과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으로 수묵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거침없는 운필과 거침없는 기세로 표출해 낸 「부활」은 선생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명쾌한 화면과 여유로운 여백, 그리고 활달한 운필을 통해 표출해 낸 동해 일출의 장관은 어쩌면 단순한 자연에 대한 예찬이거나 수묵의 심미적 발휘에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선생이 말한 「부활」은 바로 우리미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확인을 통해 현대라는 시공 속에서 다시 한 번 부활할 것을 염원하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달빛'으로 상징되는 왜곡된 가치의 온전한 청산이었다. 결국 "예술에 국경은 없어도 국적은 있다."라는 선생의 말은 바로 당신이 추구하던 예술의 궁극적 지향의 해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1972년 영남대학교에 한국화과를 개설한 것 역시 이러한 신념의 구체적 실천이라 할 것이다. 더불어 동서의 시공을 넘나들며 전통과 현대의 의미에 천착했던 선생의 일생 역시 분명한 좌표의 확인을 통한 근본과 실존의 확인인 셈이다. '달빛'을 대신하는 욱욱한 동해의 붉은 '햇빛'은 바로 선생의 삶과 예술을 통해 육박하고자 하였던 절실한 상징인 셈이다.
"예능 과목은 교사가 교본이요 교재다."라는 선생의 교육신념은 교육현장에서 일관된 지표였다. 가르친다는 것이 단순한 기능적 전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기본적인 성품과 인간적인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며, 이는 일방적인 수혜가 아닌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자세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선생의 교육철학이었다. 전 근대적인 도제식 교육과 화풍의 답습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선생은 '절대적 독자성의 창출'을 예술 교육의 목표로 인식하고 실천한 것이다. 동서미술의 이론을 두루 섭렵하고 서구의 현대미술사조의 발전과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내용의 수용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전통에 얽매인 국수주의적 폐단을 극복하고 현대라는 시공을 여하히 해석할 것인가라는 시대정신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선생은 한국화, 특히 수묵을 자신의 작업 화두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결코 전통의 나락에 들어 안주하는 것을 용인치 않았다. 작업의 연륜은 물론 삶에서 배태되어진 경륜을 바탕으로 한 노경(老境)의 원숙한 경지를 예술의 완성에 접근하는 것이라 이해한 선생의 작업은 거칠고 강하며 거침없는 수묵의 맛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것은 여성적이고 감각적인 음유(陰柔)의 심미가 아니라 강인하고 남성적인 양강(陽剛)의 기운이 단연 두드러지는 것이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며 필도(筆道)가 완강하여 구부러지고 휘어짐이 없는 필치는 선생의 성정과 잘 부합되는 것이다. 단숨에 휘몰아치는 격정과 수식의 군더더기가 배제된 담백한 화면은 선생의 삶과도 매우 흡사하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존엄의 확인과 유한한 삶에서 추구해야할 궁극적 가치에 대한 선생의 신념은 어쩌면 그의 수묵에서 드러나는 일회적이고 명쾌하며 단순하고 담백한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줄곧 '우리나라'라는 공간성과 '나'라는 주체성을 근간으로 현대라는 시공을 호흡하고자 했던 선생의 생애는 전통을 통해 길을 찾고,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현대로 나갈 수 있는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즉 수묵이 지니고 있는 전통성은 용인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섬약하고 장식적인 것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며 질박하고 거침없는 수묵의 표현을 통해 선생은 바로 한메라는 개인의 정체성과 자신의 내면에 충만해 있는 본질을 현대라는 시공 속에서 표출하고자 한 것이다.
고독을 담보로 외로운 길을 홀로 걸으며,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함으로써 안위를 취하기보다는 당당히 현실과 맞닥뜨림으로써 한 개인의 존엄과 실존을 확인해온 선생의 일생은 어쩌면 투사의 그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혼탁한 세태와 맞서고 경박한 시류를 경원하며 치열하게 자신이 속한 시공을 보듬어 안고 살아왔다. 비록 20회를 손꼽는 적잖은 개인전의 횟수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삶과 작업은 여전히 고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일 것이다. 선생이 평생을 강단과 지면을 통해 강조하였던 예술의 자율성과 우리화단의 병폐, 그리고 서구미술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 대한 경고와 한국미술의 가능성에 대한 역설은 여전히 유효한 것들이다. 예술가로서의 존엄과 교육자로서의 책무, 그리고 깨어있는 지성으로서 자신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혼탁한 세태와 경박한 시류에 분연히 회초리를 들고 호통을 치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선생의 사자후는 어쩌면 요즘과 같은 세태에 더욱 절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화의 위기와 그 근본적인 원인을 통렬하게 적시한 선생의 지적은 바로 오늘의 현실을 통해 고스란히 증명되고 있다. 평생을 두고 일괄해 왔던 수많은 부조리한 것, 혹은 개선되어야 할 것들 역시 산적한 채로 오늘의 시공을 어지럽히고 있다. 서구미술 중심에서 점차 동양미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우리미술의 새로운 이정 제시가 절실한 즈음 새삼 선생의 유훈과도 같은 견해들이 상기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선생에게 진 부채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유난히 우렁차고 힘 있는 목소리와 부리부리한 외모, 그리고 강직하기만한 성품은 호랑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호랑이는 무리를 짓지 않음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존엄을 확인한다. 평생을 무리를 규합하여 세를 과시하거나 연륜에 의탁한 허세를 경계하였던 선생의 삶은 정녕 호랑이의 그것과 닮은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부재의 상황을 염려하고 평론부재의 세태를 강하게 질타하며 끝내 주례사 같은 평문을 받기 거부하셨던 선생의 유작전에 글을 붙인다는 것은 참으로 외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학의 입장에서 작가와 교육자, 그리고 스스로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진실 된 이야기는 기록되어야 한다는 설익은 강변을 선생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전전긍긍하며 이 글을 선생의 유작전에 바친다. ■ 김상철
Vol.20120418a | 장선백展 / JANGSUNBAEK / 張善栢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