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지층

하정희展 / HAJUNGHEE / 河貞姬 / painting   2012_0417 ▶ 2012_0424 / 수요일 휴관

하정희_흔적23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8cm_200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수요일 휴관

씨드 갤러리 SEED GALLERY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교동 9번지 아주디자인타워 1층 Tel. +82.31.247.3317 blog.daum.net/gallerymine

하정희의 "기억의 지층""사람은 누구나 복잡한 개인의 역사가 존재한다. 나의 작업은 개인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경계선을 넘나들며 작품과 관객 사이에 교각역할을 하고자 한다. 평면 속에 모호한 이미지를 더하여 그들의 의식에 충격을 가하고 기억을 차츰 떠올려 그들의 내러티브에 문을 두드리고 싶다. 작은 가상공간 안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전개하며 적극적 수용자가 되어간다. 그러나 빼곡한 이야기들은 진실이 아니다. 왜곡되고 일그러지고, 다시금 기억을 더듬는... 즉 음미하는 것이다. 후미지고 외로운 도시, 아무개(그, 혹은 그녀)와 어떤 장소가 만나 모호한 (ambiguous) 그것들로부터 희미한 기억을 찾아가기를 열망한다."-하정희- ● 하정희는 다양한 회화적 방식과 경계를 실험한다. 그리고, 흘리고, 붙이는 조형적인 조작의 방식 뿐 아니라, 기억의 저장고에서 낯익은 정서를 되살려 현재와 소통하려는 재현 미술의 미덕을 버림 없이 구현해 보려는 것이다. 그림이 그려지고, 지워지고, 구성되는 가운데 화면에는 풍부한 뉘앙스가 쌓여가고 화가는 모호한 기억의 지층을 탐색하고 익숙한 감각을 통해 교감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회화적 매력과 소통의 가능성이 이 보다 더 멋지게 구성될 수는 없다. ● 한 번 차분하게 화가가 기억을 묻었다가 끄집어내는 과정을 뒤 쫒아가 보자.

하정희_흔적19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2×130.3cm_2011
하정희_흔적24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91cm_2009

기억의 지층 쌓기 ● 하정희의 탐색은 하나의 장소로부터 시작한다. 그녀가 선택한 공간은 익명이며 무채색이다. 거대한 구조물이 유령처럼 도사리고 있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쇼핑가 거리나 뒷골목이 출몰한다. 때로 기억들은 제멋대로 엉겨 붙으며 장소를 왜곡하는데 하정희는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굳이 구체적 장소를 끄집어내지 않는다. 개별성보다는 화가가 기억하는 어떤 정서와 관련된 공간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파리의 에펠탑이 배경막처럼 가리고 서있는 공간은 '고독함'의 미장센이다. 차들이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분주한 도시의 거리는 오히려 망망한 '고립감'의 무대일 것이다. 들려진 원근법으로 따라 꼬리를 물며 사라지는 뒷길은 '불안'의 소실점이다. ● 이처럼 그녀가 선택하는 공간은 주로 도시의 거리인데, 이는 화가의 기억을 감싸는 정서가 본질적으로 고독과 우울이기 때문이다. 고독과 우울은 본질적으로 도시적인 감성이다. 공동체적인 관계의 망이 해체된 현대도시에는 이 불편한 감정이 안개처럼 맴돌며 만연해있다. 그 정서는 얼핏 낭만적이지만, 각자의 의식의 차원에서는 빽빽한 연기나 먼지처럼 답답한 실존적 조건이다. 이 같은 화가의 정서는 캔바스 맨 아래 층에 선명한 흑백의 판화처럼 찍힌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러나 기억이 모호한 만큼 구축된 배경의 공학적 구조는 너무 선명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화가는 모노톤의 풍경을 교묘하게 지워내고 거리와 시점을 뒤틀어 왜곡하는 것이다. 공간은 점차 불투명해지며 기억과 정서는 흐려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뿌리기를 할 차례이다. ● 기억을 노니게 할 충분한 여백을 위해서 이미지는 좀 더 모호해져야 한다. 하정희는 "원본의 이미지를 현저히 지연시키고, 겹침과 반복으로 그 밀도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드리핑을 위해 재료의 실험을 빼놓을 수 없었는데 유화물감 외에도 상업용 페인트, 가정용 페인트, 수채화 잉크에 이르기 까지 여러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터득 되어진 방법으로 캔버스 위에서 행위 하듯 물감을 사방에서 뿌렸다. 나이프나 붓으로 농담을 주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겸해야만 원하는 우연성을 그나마 조절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쯤 이르면 하정희의 방식이 분명 잭슨 폴록을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방법적인 차용일 뿐 폴록의 드리핑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중요한 것은 왜곡된 잔상을 은폐하려는 의도와 부분적으로 남겨 놓으려는 화가의 양가적인 심리이다. 이 모순된 심리는 뿌리기의 과정을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성된 화면은 균질하지 않다. 어떤 곳은 접근불가처럼 두텁게 쌓였고, 어떤 부분은 몇 차례 물감을 흘리고 만 듯 가볍다. 선들의 밀도는 장소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거나 혹은 벗어나지 않으려는 작가의 저항에 비례해서 더 풍부하게 부풀어 오르는데, 캔바스가 부조처럼 충분히 두터워졌을 때 비로소 장소에 매인 기억이 캔바스에도 그 자리를 잡게 되는 것 같다. 이제 화가는 마지막 손질을 한다. 명도가 높은 오렌지와 엘로우의 콜라주이다. 이 콜라주들은 그림에 선명한 대비를 만들어내며 순식간에 은폐된 기억을 잡아 올린다. ● 화가는 공들인 그리기와 드리핑과 콜라주를 통해 캔바스의 표면에 여러 겹의 층들을 만들어냈다. 기억과 정서가 서식할 그 풍부한 공간 망이 힘든 노동 끝에 비로소 건축된 것이다. 그리고 애써 쌓아 올린 풍경은 비로소 기억이 타고 흐르는 주름진 너울로 펼쳐진다. 그 너울을 타고 화가의, 그리고 관객의 미묘한 감정과 기억의 파편들이 흘러들게 될 것이다.

하정희_교감14_캔버스에 혼합재료_112.1×145.5cm_2010
하정희_흔적25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90.9cm_2009

이미지의 푼크툼, 교감하기 ● 하정희의 이야기를 거는 방식은 이처럼 시간을 두고 뜸을 들여서, 은근하다. 세 겹의 회화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며 풍부한 뉘앙스의 세계이다. 작가가 평면에서 의식으로 이야기의 차원을 올려가는 방식은 매우 체계적이지만 그 효과는 융통성이 있으며 큰 흡인력을 지닌다고 하겠다. 어쩌면 이는 하정희의 회화작업이 순간적으로 의미를 발현하는 사진의 프로세스와 흡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작가가 그림의 그리기 위해 실제 사진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산만한 기억의 층에서 특정 이미지를 끌어올려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사진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캔바스의 표면에 이미지를 천천히 올리고 그곳에 매개 이미지를 콜라주로 강조하여 의미를 정박시키는 하정희의 방식은, 사진의 노출과 현상, 그리고 의미구현의 과정과도 흡사하다. ● 왜 그런가. 다시, 맨 처음의 캔버스의 밑면을 생각해보자. 장소에서의 물리적 움직임은 오래 노출된 흑백사진처럼 현상되었다. 거리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고 그 궤적만이 남아 있다. 공허의 바탕이다. 이때 정교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쌓아 올린 거미줄 같은 드리핑은 화가의 상념의 길이와 대상에 엉겨 붙은 지각의 끈끈함을 말한다. 이는 길고도 느린 의식의 흐름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하정희의 선들은 물질과 육체에서 뿜어 나오는 추상표현주의 류의 에너지의 과시가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콜라주는 화면에 강렬한 엑센트를 찍는다. 이는 마치 순식간에 지나쳐가는 자동차의 섬광처럼, 무채색의 화면에서 선명한 붉은빛으로 솟아난다. 이 때 콜라주 된 이미지들은 기억의 매개체이다. 하정희는 그 매개체로 자동차의 백미러, 늘씬한 보넷, 원근이 뒤틀어진 나무의자, 드리워진 백열등을 사용한다. 틀어진 의자는 "불안"의 매개체이다. 여자의 다리처럼 매끈한 자동차의 사이드는 "군중속의 고독"의 느낌을 잔인하게 상승시킨다. 대롱 매달린 백열등은 의식을 최면의 상태로 끌고 내려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참담함"을 까벌린다. 위태롭게 화면을 가로지르는 계단은 "불안"의 지수를 극대화 시킨다. 이처럼 마지막 콜라주의 액센트는 화면에 선명한 '푼크툼'으로 우리의 "불우한(인간의 실존은 기본적으로 불편하므로)" 기억을 나꿔채서 올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은 화가를 찌르는 기억의 '푼크툼'이며, 장소에 사람을 걸어주는 미늘이다. 프랑스의 철학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말에 따르면 사진에서 푼크툼은 보는 이를 갑자기 놀라게 하여 부유하던 기억을 연쇄된 사슬로 끌어들이는 덫이다. 이렇게 화가의 붉은 콜라주는 사진의 푼크툼처럼 무채색의 화면에 선명한 화인(火印)을 남긴 것이다. 하정희는 이렇게 생각한다. ● "인간은 결국 명확한 의미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흔적'을 주고 받음 으로써 의미를 매끈하게 정립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게 한다. 내 작업 역시 이미지를 모호하게 일그러도 놓고, 해체도 시켰다가 다시금 형상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이 작업에서 나는 관객들이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개개인의 내러티브를 떠올리고 각색하며 그들(그녀)의 또 다른 의미를 읽기 바란다." ● 어찌 되었든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하정희의 겹이 풍부한 "지층의 회화"는 우리의 삶의 실존적인 조건이 장소에 얽매인 기억의 현상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내 몸이 지각했던 특정 시간의 경험, 그것들이 쌓여 이루어진 감각의 집합체에 다름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의식의 '지각'과 '망각' 그리고 '반추'의 과정이 그녀의 캔바스 위에서 물리적 몸짓으로 다시 되풀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정희는 익숙한 감각의 정서를 통해 교감하자고 한다. 화가는 거듭, 장소의 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범상(凡常)의 일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 화가가 내밀해 보이는 사적 풍경에, 굳이 "교감"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은 '고독'과 '불안'이 개개인의 특정한 체험이 아니라 공감하는 소통의 정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정희의 회화는 포용력이 발휘하는 따뜻함이 있다. 타인과 이어진 소통의 끈은 시끄러운 대화가 아니라 경험의 공유, 그 기억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 김미정

Vol.20120417a | 하정희展 / HAJUNGHEE / 河貞姬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