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 이후, 네 개의 시선들

Visions of Four Artists since Yangdong Village展   2012_0414 ▶ 2012_0506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414_토요일_03:00pm

참여작가 이종빈(조각)_김남진(서양화)_이인(동양화)_이종수(사진)

주최/기획 / 스페이스통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페이스 통 gallery space tong 서울 종로구 통의동 12번지 Tel. +82.2.722.2088 www.spacetong.co.kr

예술적 거주지와 별리(別離)된 사연들-『양동 이후, 네 개의 시선들(Visions of Four Artists since Yangdong Village)』전과의 동행 ● 세월은 늘 흐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세월을 뒤돌아보며 종잡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가는 것과 오는 것 사이에서 구름도 가고, 달빛도 저물고, 그러다 마침내 봄이 다시 온다. 온기가 따스하게 발밑을 차 올라오는 것은, 저 땅 속 가없는 내핵을 둘러싼 맨틀의 껍질을 뚫고 나와 지구가 푸른 숨을 내쉬기 때문이다. 나도 문득 바다가 그립다. 때로는 당신만큼... ● 한때, 양평 혹은 양동은 내게는 언젠가 어떤 분이 표현했던 것처럼 스타카토(staccato)같은 곳이었다. 도시를 벗어난 짧은 위안, 휴지, 그러면서도 강과 산이 주는 정신적 평화로움...그리고 사람들과의 일상을 벗어난, 그러나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대화들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양평의 한 자락, 고즈넉한 산골마을인 고송리에 작가들이 둥우리를 틀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 곳 말고도 양평의 곳곳에는 서울을 벗어나 작업실을 마련하기 위해 정착한 이들이 이미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공간적 유대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서종리가 그랬고, 문호리가 그랬다. 처음 작업실을 마련했던 조각가 이종빈, 부산에서의 활동기반을 떠나 이종빈 조각가의 뒤를 이어 정착했던 서양화가 최석운, 그리고 나중에 이곳에 잠시 합류했던 서양화가 김남진, 그리고 조금 떨어진 단성리 깊은 산자락에서 밤이면 별들이 쏟아지는 듯한 하늘을 소유하며 작업했던 동양화가 이인이 그 곳에서 아예 살거나 혹은 작업실을 두고서 창작생활을 영위했다. ● 내가 양평을 드나들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대 후반 무렵, 일민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할 때였다. 사진작가인 이종수 선생과 함께 주로 주말 즈음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들르곤 했었다. 몇 번 되지 않는 기억이지만, 나에게는 도시적 삶으로부터 일탈하는 자유의 시간이기도 했다. 한가롭게 둘러앉아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저녁 만찬은 지금도 싱그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양평 속 양동은 외딴 섬의 추억처럼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중앙화단의 위세를 지닌 서울과도 그리 먼 곳도 아니었다. 이 양동의 네 작가들이 인사동에 있었던 사비나갤러리에서 2001년 이종수 사진작가가『양동작업실의 사람들』이란 제목의 전시를 올렸고, 이듬해에는 강남 인데코갤러리에서 두 번째 전시가 열린 바 있다. 이 첫 전시에서 이종수 선생은 작가인물사진과 작업실에서의 에피소드, 그리고 수필식 터치가 묻어있는 양평의 풍경사진들을 곁들여 작지만, 특별한 도록을 펴냈다. 이 도록이 특별했던 것은 한정판이기는 했지만, 도록의 표지에 작가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려 지인들에게 헌정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아트 카탈로그, 다시 말하자면 예술적 오브제로서 책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사비나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이번『양동 이후, 네 개의 시선들』전의 필연적 산지(産地)이자 출생의 표지(標識)라 할 수 있다.

이종빈_영산강_나무에 채색_40×60cm_2008
이종빈_독립가옥들이 있는 풍경_나무에 아크릴채색, 색연필_70×50cm_2012
이종빈_무거운 스케치북_테라코타에 채색_18×21cm_2008
이종빈_가로수가 있는 풍경_나무에 채색_40×60cm_2008

이 사비나갤러리에서의 전시이후, 1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양동 고송리에 더 이상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화가 이인만이 단성리의 작업실을 본원적 터전으로 남겨놓고 간혹 들르기는 하지만, 그도 역시 파주'헤이리 아트 밸리'로 작업실을 이전한 상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이유에서, 이들에게 양동은 기억 속에나 자리하는 저 호수 밑에 수몰된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 1994년 무렵, 처음 고송리에 터를 잡은 조각가 이종빈은 3층 규모의 조각 같은 형태의 집을 지었다. 거친 철과 돌을 재료로 하는 자신의 작품성격이나 주물 작업을 병행했던 그로서는 이 고송리라고 하는 변방성은 소음이나 먼지 날리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그야말로 창작의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조각가로서 이종빈은 작품 활동의 황금기를 이곳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조각을 공부하기 위해 이태리에 유학을 가 20대 후반부터 6년여를 보내고 왔던 그는, 지난해까지도 40대 초반에 지은 이 작업실에서 창작에 매진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 무렵, 경희대 미술대학 조소전공 교수로 부임해서는 연구실과 작업실을 오가는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나 3년 전에 뜻밖에 찾아 온 병고로 인해 적지 않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지금은 거의 회복된 상태이지만, 서울에 있는 집과 경희대, 그리고 양동 작업실까지의 지리적 거리와 병의 예후관리 등의 차원에서 결국 양동 고송리 작업실을 처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낙천적이면서도, 자애로운 품성을 가진 조각가 이종빈은 양동작업실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맏형 같은 존재로 그 유대의 끈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김남진_걸어서 오르는 사람- 파도_캔버스에 나무판, 안료채색_60×70cm_2010
김남진_걸어서 오르는 사람- 연꽃_캔버스에 나무판, 안료채색_60×70cm_2010 김남진_걸어서 오르는 사람- 새싹_캔버스에 나무판, 안료채색_60×70cm_2010

서양화가 김남진은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파이다. 그 역시 부산출신이지만, 울산광역시 언양에 집과 가족들 두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 고송리로 올라와 마을 초입의 농협창고를 임대하여 그곳에서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의 작업실은 창고의 삭막함, 빛바래고 틈도 벌어져 위태로운 외형, 난방 없는 싸한 냉기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했던 것처럼, 시간의 궤적을 담고 흐르는 낡은 배처럼 보였다. 가족들을 만나러 양평과 언양을 오가는 생활을 청산하고, 그가 언양으로 작업실을 이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객지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생활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창작적 미래를 담아 줄 중앙화단에서의 성취감을 대신하기에는 결핍감과 상실감의 깊이가 더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언양가는 길이 한층 빨라졌고, 자신의 작가적 성장기반이었던 부산 역시 중앙화단 못지않은 활력을 담보하고 있었다는 것도 낙향결심의 한 요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당시 작품들에서 주된 형식적 소재였던 두터운 질감의 화면 속에서 덩그라니 남아 있었던 배의 형상들이 자신의 예술가적 초상이었다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는 새들, 새벽을 알리는 닭의 형상들은 그의 예술적 열망의 동반자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에게 언양과 부산은 또 다른 양동이다. 그 곳은 이제 저 남쪽의 훈풍 속에서 뒤셀도르프, 양동을 넘어선 고개 너머의, 그의 근면한 창작의 일과 속에서 기름진 창작의 새 터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인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 지점에서의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예술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의 창작세계는 지필묵을 중심으로 펼쳐지긴 하지만 서예, 입체, 설치작업을 오가면서 다양한 해석가능성의 층위를 구축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서예적 제스처는 추상적 관념의 시각적 표상이며, 재현적 혹은 비재현적 형상들은 현대문명에 대한 기호학적 발언이며, 그의 색채조성이 자아내는 미동의 흐름은 종교적 명상성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그가 1996년 무렵, 친구의 전원생활에 동참하여 자리잡은 곳이 양동 단성리 깊은 산속이었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새로운 창작의 불씨를 지피던 그가 4년전 파주'헤이리 아트 벨리'로 중심적 작업실을 옮기고 활동기반을 깊은 산에서 예술가들의 마을로 이전했다. 미술사적으로도 예술가들은 환경이나 작업조건에 지배받으며 그 변화적 국면들을 드러내 왔다. 이인에게 있어서 헤이리는 그의 집이 있는 일산과도 가깝기도 하겠지만, 여러 부류의 예술가들과의 교유는 물론 현장성있는 조류들과의 접촉이라는 측면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수행자의 기도장소와 같은 고적감 혹은 자연 속의 맑은 정신이 주는 예술적 몰입성은 단성리만 못하다 할지라도 헤이리가 주는 이러한 예술적 시류와의 빠른 접촉성은 또 다른 창작적 국면전환의 한 동인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인_Paint it black 5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90cm_2012 이인_Paint it black 3_캔버스에 혼합재료_122×122cm_2012
이인_Paint it black 7_캔버스에 혼합재료_72.5×53cm_2012
이인_Paint it black 8_캔버스에 혼합재료_60×130cm_2012

사진작가 이종수는 미술계의 산 증인과 같은 사람이다. 작가들의 인물사진은 물론 작업실의 역사, 작품의 변화적 양상을 사진으로 기록해 왔고, 그것을 오롯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에서 이종수의 사진작업을'한국미술의 사진아카이브'라 표현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미술계의 기록만을 사진에 담아 온 것만은 아니다. 그는 늘 사진예술로서 새로운 표현가능성, 사진작가로서 창작적 정신을 놓치지 않아 왔다. 아직 미발표작들이기는 하지만, 백두대간 산 시리즈 작업이나 한지에 인화한 회화적 풍경작업들은 그가 사진으로 구현하려 하는 조형적 환영성에 관한 실험적 일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2005년 무렵,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가서 4년 여 간의 생활을 하다가 귀국했다. 내가 2007년도 시카고에 가서 그의 집에 머문 적도 있었지만, 이때에도 그가 이민 초기의 생활을 유지해나가는 어려움 속에서도 사진에 대한 내재적 열정과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인생의 동반자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제, 사진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다. 세상의 풍경들, 그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사물의 정경들을 사진의 기본적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인화지, 인화방식의 변주를 통해 환영적 효과를 드러내고자 한다. 한지에 인화된 화상(畵像)들은 마치 판화와 같은 회화적 아우라를 창출하면서 시간적 변이성(變移性)까지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카메라로 세상이라는 대상을 포착하는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회화적 사진의 표상(表象)들은 양동을 오가면서 각인된 인간적 교감과 세상사의 흔적들, 산과 강의 무심한 변화 속에서 얻어진 정서적 감흥들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종수_명성황후를 기리며 Tribute to Empress Myeong Seong_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_46×31cm_2010 이종수_명성황후를 기리며 Tribute to Empress Myeong Seong_종이에 젤라틴 실버 프린트_46×31cm_2010
이종수_시간속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 within time_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25×95cm_2011
이종수_시간속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 within time_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11
이종수_시간속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 within time_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55×55cm_2011 이종수_시간속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 within time_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55×55cm_2011
이종수_시간속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 within time_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55×55cm_2011 이종수_시간속 또 다른 풍경 Another landscape within time_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55×55cm_2011

이『양동 이후, 네 개의 시선들』전은 어쩌면 우리 시대 미술인들이 지나 온 2000년대 궤적의 한 함축적 지층을 드러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서울과는 지근거리지만, 강과 산을 품고 있는 천혜의 자연이 있는 양평 혹은 양동은 작가들에게는 창작적 열정을 자폐적으로 펼칠 수 있는 혹은 작업으로 파생되는 소음과 같은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별거적 성격의 장소일 수 있었다. 더구나 대부분 40대와 50대라고 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그들은 자신의 예술적 지평과 미래를 꿈꾸었던 곳이기도 했다. 이들은 각기 조금은 다른 변화적 궤적을 그리며 새로운 터전에서 그들의 50대, 60대를 기약하고 있다. 대학에 재직하게 되면서 교수와 작가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이중적 부담으로 거리적인 측면에서 작업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상황의 도래(이종빈), 가족들과의 합류가 주는 안정감과 변화된 예술적 지형도를 감안하여 고향에서 창작의 기반을 다져가기 위해 의식의 전환을 모색한 경우(김남진), 집과의 거리적 측면에서나 다양한 예술가들의 집단적 교류지에서 새로운 창작의 동력을 마련하려는 예술적 국면전환의 경우(이인), 미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사진작가로서 본격적 활동을 펼쳐나가려는 내재적 욕구의 실행(이종수) 등에서 이들이 그리고 있는 현실적 상황은 그들의 작품이 드러내는 형식적 차이만큼 다르다. 이들에게 있어서 양동의 시간, 지난 10년의 궤적은 근면한 농부들의 특권인 일련의 풍성한 수확의 시기이기도 했고, 뜻하지 않은 개인적 불행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독행(獨行)의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연들과 더불어 양동이 예술가들의 성지(聖地)로 여전히 지속되지는 못했다할지라도, 우리가 잊지 못하는 것은 그 공간 속에서 보았던 인간적 삶, 인생의 길에 걸려있었던 예술가들의 초상이었다. 밤이면 별빛으로 출렁이던 먹빛 하늘에 처연하게 떠 있었던 양동의 달을 기억시키는... ■ 장동광

Vol.20120414b | 양동 이후, 네 개의 시선들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