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NANJI ART SHOWⅠ

사실, 주의! Real?! : 모옌가르드 (Moyen Garde)展   2012_0412 ▶ 2012_042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412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 김덕영_김두진_박종호_손종준_조현익_최정규

공동기획 / 조현익_김덕영_김두진_손종준_최정규(6기) 기획협력 / 이진명(독립큐레이터)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시간 / 0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NANJI GALLERY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의 기획전시『2012 NANJI ART SHOW』로서 첫번째 전시입니다. 전시는 현재 입주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입주기간이 끝나는 10월말까지 10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됩니다.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Moyen Garde ●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보다, 현실이 오히려 예술을 모방한다." 이 오스카 와일드의 아리송한 문장에 대해 여러 해에 걸쳐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그 말은 예술이 추구하는 이상적 아름다움을 끝끝내 현실로 하여금 따르게 만들리라는 낙관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예술의 존립하는 근본적인 성격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존립하는 근거는 많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그리려는 예술이든지, 아니면 여기(餘技)의 흥취로 태어난 예술이든지, 예술은 예술이다. 그러나 어떤 예술이 사회화되는 과정(socializing process of art)에는 반드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가치기준이 개입한다. 아방가르드는 너무도 익숙한 개념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다양한 루트와 역사, 그리고 용법을 지니고 있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쉽지 않다.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두는 아방가르드란 기성의 예술을 전복시키면서 자기의 위치를 점유하려는 예술의 근원적 태도를 가리킨다.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emerging'의 현재형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안착했던 과거형의 'establised'를 어떻게 하든지 지면에서 끌어내리거나 공격해야만 한다. 아니면 기성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문화적 가치를 뒤엎든지, 하여간 무언가를 개혁해야만 한다. 오스카 와일드 자신도 만만하지 않은 현실의 하이어라키를 개탄하며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발전해가는 예술사를 보면서 현실역사의 변동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의 사상사와 서구의 예술사가 이렇듯 아방가르드를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우리 몸이 느끼는 시간에 관한 관념은 크게 보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내일 또다시 해가 뜨며 나는 밥을 먹고 어김없이 화장실에 간다는 관념이다. 또 하나는 나는 살아가지만 동시에 죽어간다는 관념이다. 즉, 언젠가 죽는다는 관념이다. 전자의 시간을 가리켜 순환적 시간이라고 하고, 후자를 가리켜서 우리는 직선적 시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매 순간의 실존적 감수성으로 느끼는 춘하추동의 순환적 시간을 존숭했지만, 서구 유럽인들은 시간을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는 직선적 시간으로 파악했다. 성경에서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이 끝맺어지듯이 직선적 역사관(linear development of history)은 서구에 있어서 아주 뿌리깊은 것이다. 직선적 사관은 진보사관이며 통사(通史)를 중시하는 사관이다. 그것은 네러티브의 내밀한 구조를 역사의 목적으로 상정하는 연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파와 오메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말엽적 사고방식일수도 있다. 기독교 사관의 세속화로서 자유의 증식으로 역사를 파악한다거나(헤겔), 계급의 투쟁으로 역사를 파악하는(칼 마르크스) 이면에는 아방가르드에 대한 강박이 숨어있다. 어찌되었건 다 좋다. 그렇다면 예술, 특히 현대미술에 있어서 아방가르드에 대한 강박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깊이 통찰해야 한다. 예술의 아방가르드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가치는 진보에 대한 확신일 것이며, 또한 자유의식의 증대에 대한 신험(信驗, verification)일 것이다. 반대로 예술의 아방가르드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저열하며 용렬한 유산은 개념을 통한 투쟁이 곧 정당성 있는 보편적 가치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절대와 상대가 없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투쟁의 성격이 아니다. 싸울 수도 싸워서도 안 되는 가치이며 각자가 모두 존숭되어야 할 가치이다. 아름다움의 가치 속에 진보가 개입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진보란 언어 속에서나 혹은 개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메타의 세계일 뿐이다. 심미적 감수성에서 진보를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나의 실존의 변화는 있을 수 있다. 어제에 비해 오늘이 더 좋다는 의식은 허상일 뿐이다. 동양인인 우리가 어째서 우리의 직선적 역사의 기차선로도 아닌 서구의 개념적 기차선로에 맞추어서 예술하며 작업하려고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단상에 앞서 두 가지 말이 우선 생각난다. ● 노자는 "세상을 장악해서 다스려보려 해도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세상은 신비로운 그릇이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무언가 하려 한다면 패할 것이요, 세상에 집착하면 세상을 잃을 것이다." 고 말했다. 이 말을 음미해보면 어떤 사람들은 아방가르드의 개념적 인위, 개념적 투쟁이 무용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이 말의 도피적, 수동적 삶의 태도를 지적하여 연약한 사고방식이라고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곱씹어볼 때 예술이란 결코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내면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삶의 감정과 삶의 실존적 느낌들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교통(交通)시키려는 성경신(誠敬信)의 형식에 다름 아니다. 또한 공자의 가르침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공자가 "군자는 문(文)의 세계에 있어서 넓게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예(禮)로써 집약시켜야 한다. 그리하면 도에 어긋남이 없다." 고 말하는 장면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서구의 사조나 현대미술의 개념적 투쟁도 하나의 문(文)의 세계로 존경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투쟁의 역사는 결코 타인과의 공존을 모색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 찬란한 섬광의 빛남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예(禮)를 구축한 적이 없다. 끝없는 윽박지름과 중상모략과 유유상종의 패거리 문화가 있었고, 운동(movement)의 난립과 제도와의 공존의 모색만이 난립하였을 뿐이다. 어째서 우리도 서구를 쫓아 그러한 험난한 길을 가려고만 하는가? ● 그런데 우리 현대미술의 약사(略史)를 성찰해볼 때, 아방가르드는 기단(氣團)과 기단이 충돌하여 취산(聚散)했던 역사이지 결코 한 개인이 아방가르드를 추구하지 않았다. 단색회화와 민중미술이 충돌했고, 민중미술은 신세대미술과 충돌했다. 그리고 현재는 더 이상 기단이 없고 공기분자만이 따로 활동할 따름이다. 즉, 미술의 운동(movement)의 취합이 없고 개체(individual)만이 발산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젊은 작가들은 기존의 개념에 공격을 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개성과 자기의 생각을 발현할 뿐이다. 젊은 작가들은 개념을 위한 개념보다 자기 삶과 자기 감각에 충실하면서 자기 생존의 항상성(homeostasis)을 추구해간다. 이들의 본능적인 생존의 항상성은 중용을 지키면서 글로벌한 문(文), 즉 문화의 안목을 넓히되 언제나 타자에 대한 예(禮)를 집약시키려는 태도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모옌가르드(Moyen Garde)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은 자기 작업의 존립근거를 끝없이 생성되는 자기 삶의 유기체적 성장에 둔다. 이 젊은 작가들의 삶의 태도는 퍽이나 아름다우며 진솔하기 그지없다. 아름다움이 좋다고 솔직히 말하며, 고전을 자유롭게 재해석하고, 사회학적 제문제를 나름대로 형식화해간다. 그들에게는 성속(聖俗)의 고루한 이분법이 없다.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에 경중의 가치를 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교회도 없고, 학교도 없다. 다만 몸 속에서 우러나오는 심미적 감수성을 장기간에 걸쳐 절차탁마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여기서 표현한 불어 'Moyen'의 가운데는 가치중립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고 피투성이로 쓰러진 전위부대의 희생 위에 안락한 카페트를 깔고 그 위를 손쉽게 밟고 가자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집기양단(執其兩端)'의 정신이다. 일단은 실험성과 대중성, 스펙터클(spectacle, 壯觀)과 덱스터리티(dexterity, 精緻), 순수와 혼재라는 극단적 대립의 끝과 끝을 마음 속에 품었다가 마음 속에서 절실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선택하는 태도이다. ● 이번 난지 스투디오에서 개최되는 '사실, 주의!'라는 전시회는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그 중 첫 번째 1부를 '모옌가르드'라고 명명했다. 김덕영, 김두진, 박종호, 손종준, 조현익, 최정규 6인이 참가한다. 모두들 그 나름의 내밀한 인생역정의 스토리를 지닌다는 공통점 외에 위에서 말한 중용의 항상성을 작품에 체현시키는 공통점이 있다.

김덕영_It's OK..._박스 실링테이프, 종이에 프린트_85×55×70cm_2012

김덕영 작가는 패기 넘치는 젊은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다. 우선 작가나 주변지인 등 임의의 실제인물의 사진을 찍어 인물형상을 취합한 연후에 이를 비닐테이핑으로 감아내는 작업이다. 누군가에 대한 인물됨의 세간평가와 그 누군가에 대한 실제 인격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특정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애초에 불가능해진다. 특히 사회가 복합화되고 첨단화될수록, 그리고 자본제에 의한 계약관계, 이득관계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가 오갈수록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요원해지기만 해진다. 19세기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Ferdinand Tönnies)는 그의 명저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에서 사회를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한 적이 있다. 게마인샤프트는 공동사회로 번역된다. 가족과 친구처럼 분리될 수 없는 본연적인 사회이다. 반면 게젤샤프트는 이익사회로 번역된다. 게젤샤프트는 상인의 사회이다. 사회가 첨단화될수록 게젤샤프트의 범위가 강하게 형성된다. 이때 사람들은 서로서로 인간의 본연적인 맛을 알아가려 하지 않고, 이득관계에 몰입하게 된다. 즉, 가면의 사회가 된다. 김덕영이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미덕은 직선적인 파워에 있다.

김두진_The birth of venus_3D 디지털 프린트_203×140cm_2011

김두진 작가는 살이 발라진 뼈로써 서구 고전의 회화를 재해석한다. 작가의 작품은 모두 컴퓨터그래픽의 소산이다. 정교한 컴퓨터그래픽은 휴먼터치를 의도적으로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실 김두진 작가는 놀라운 페인팅 스킬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세기 이래로 19세기까지 진행된 서구 회화의 일관된 공통점은 상향(上向)의 메타포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상향이란 모든 가치를 저 위에 둔다는 의미이다. 우토포스(Utopos), 이데아(Idea), 천국(Heaven) 등 상향적 허구들은 현실에 있지 않고 있을 수도 없다. 속류의 가치 속에 사람들은 끝없이 매몰되었던 것이다. 상향으로의 충동은 현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거세시킨다. 그 결과는 허무(emptiness)와 없음(nothingness), 부재(absent)의 지속이다. 이렇듯 나의 삶으로부터 멀어진 상향의지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해 죽은 다음의 부재의 이미지로서 대응시킨 점이 작가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박종호_그리기_린넨에 유채_181.8×227.3cm_2011

박종호 작가는 자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시공간을 회화의 소재로 삼는다. 자기 작업실은 화가로서의 박종호를 존립시키는 가장 일차적인 공간일 것이다. 이 솔직한 자기와의 투쟁의 장소에서 작가는 정념의 살을 모두 발라낸 순수한 메타의 세계를 창조한다. 작가는 감성적 기제가 제거된 붓질을 통해서 순수한 게임을 한판 벌이고 있다. 회화의 소재가 되는 실제 사물을 실제사물이 그려진 화폭 속에 병렬시키고 중첩시킴으로써 작가는 재현하는 행위 자체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질문한다. 우리가 '국가'라는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리도 많이 확인했던 존재의 구분법을 작가의 질문방식 앞에서 다시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손종준_Defensive Measure_알루미늄_115×120×115cm_2009

손종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관계에 대한 의미를 철학화한다. 자연세계에서 동물들이 생존을 위한 보호기제나 번식능력은 천차만별로 다양하지만, 작가는 인간의 생존의 수단은 단점을 최소한으로 노출시키고 장점은 최대한으로 극화시키려는 연출의지에 있다고 파악한다. 가령 작가의 작품 중에서 하반신이 부자연스러운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무기화되어 공격적인 휠체어를 보자. 인간의 언어와 이성이 극단적으로 발전되어있음을 암시하는 마스크를 보자. 손종준은 인간의 의미를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다자적 관계 속에서 찾는다. 작가는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상처와 아묾이라는 변증적 형성의 페르소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요구한다.

조현익_The Altar of Light_철판, 패널에 혼합재료, 조광기, 음향 장치, 전기 촛불, 체인, 후크_350×600×350cm_2011

조현익 작가는 차가운 금속 표면에 시크한 여성의 이미지를 극화시키는 젊은 작가로 부각되고 있다. 작가는 회화의 정격성(authenticity)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회화의 영역확장가능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한다. 작가가 나타내려고 하는 주제는 여성이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신성(神性)의 의미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원초적인 노력과도 같다. 여성성과 대비되는 차가운 메탈의 표면에 여성의 가장 에로틱한 얼굴표정을 그려낸다. 그러나 작가의 구성에서 에로스로 일관되는 삶의 격정과 또 다르게 불길한 죽음의 분위기가 엄습해온다. 성(聖)과 속(俗)이 둘이 아니고, 삶과 죽음을 시간 속에서 구분할 수 없으며,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를 돋보이게 도와주듯이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대비되는 속성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노자의 '난이상성(難易相成)'이라는 말은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완성시킨다."는 뜻이다. 금속 표면의 차가움과 여성의 따뜻한 체온의 대비는 서로 다른듯하지만 영원히 한 몸일 수밖에 없는 죽음과 에로스의 변증적 이중주를 완성시킨다.

최정규_진주귀걸이를 한 소녀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09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결단(Entscheidung)을 말한다. 불확정성의 미래에 자기가 느끼는 가장 원초적 솔직함을 근거로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을 결단이라고 한다. 최정규는 결단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고졸이며 31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어느 날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고 알 수 없는 충동에 빠졌다.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를 보고 베르메르 원화의 기법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완성했다. 그것이 작가의 최초의 유화 작품이라고 했다. 작가의 삶에는 전략과 대비와 근심이 없다. 충동과 실존적 감흥에 가장 솔직한 선택, 즉 결단을 내릴 뿐이다. 어쩌면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드는 결단이야말로 작가의 주제의식이 아닌가 한다. 작가는 무엇을 그릴지 몰라서 고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내면에 모든 것이 벌써 다가왔다고 느낀다. ■ 이진명

2012 난지아트쇼 전시 안내 Ⅰ. 0412 목 - 0422 일 Ⅱ. 0427 금 - 0506 일 Ⅲ. 0525 금 - 0606 수 Ⅳ. 0612 화 - 0624 일 Ⅴ. 0629 금 - 0711 수 Ⅵ. 0717 화 - 0729 일 Ⅶ. 0830 목 - 0909 일 Ⅷ. 0918 화 - 0930 일 Ⅸ. 1004 목 - 1014 일 Ⅹ. 1019 금 - 1021 일

Vol.20120412i | 2012 NANJI ART SHOWⅠ-사실, 주의! Real?! : 모옌가르드 (Moyen Garde)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