靜中動 고요함속의 움직임 Movements in the Silence

이윤진展 / LEEYUNJIN / 李允珍 / painting   2012_0411 ▶ 2012_0417

이윤진_유유자적(悠悠自適)_순지에 수묵_280×597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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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41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4번지 1층 Tel. +82.2.734.7555/+82.2.722.9883 www.topohaus.com

사람은 공포를 영혼 속 깊이까지 사랑할 수도 증오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일주일에 금요일이 일곱 개'라는 말과 같은 것이고, 동시에 진실성 있는 말이다. 자신 속에는 이 빛, 그리고 저 빛으로 (스스로) 자기를 비추는, 즉 외관상 한 측면으로는 이렇게, 다른 측면으로는 또 저렇게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있게 된다. 우리, 사람들은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것들 앞에서 자신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지독하게 운이 나쁜 경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앞에서 지독하게도 무력하기 때문이다. '신께서 사물의 끝을 잡아, 풀 수 없는 매듭을 지으셨다.' 그것을 푸는 것은 불가능하고, 만약 잘라버린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러니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푸르고, 하얗고, 붉다' 라고.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로자노프. 『고독』) ● 세상을 배워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의 질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 질서가 명료하고 명징하다면 더욱 그럴듯할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삶의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불확정성은 벽돌을 쌓아가듯 구축하던 가치관을 일단은 해체하고 또 다른 요소들을 섞어 재조합 한다. 이러한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결국 질서와 원리의 이면에는 무질서와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순환적으로 익히게 된다. 인간의 신화는 모두다 혼돈과 무질서에서 시작하고 있다. ● 그리하여 많은 철학자들은 삶은 지속적으로 해결을 해야만 하는 과정이고, 지속적으로 살펴야만 하는 구도의 길이라고 설파한다. 질서와 무질서, 안정과 불안정, 구축과 해체, 음과 양, 이러한 등가의 이중성은 결국 두 축이 되어, 무한의 움직임을 낳는다. 이러한 움직임이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진 않을지라도 생 자체가 되기도 하고, 삶의 기본적인 모양새를 잡기도 한다. 이제 서른이 되는 이윤진은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 사념이 가득하던 어느 날, 작가는 종종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 찾던 부석사를 향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목조 건물의 단청에 눈이 가지 않고, 절 입구의 과수원으로 시선이 갔다. 그 시선의 끝은 과수원에 가득하던 사과나무였다. 사과나무의 줄기를 눈으로 따라가면서 그 나뭇결에 가슴이 뛰기도 하고, 평안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하였다. 그 고요한 움직임에서 많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에너지를 몸으로 느끼고서야 결국 붓을 잡고, 먹을 묻힐 수 있었다. "고요함 속의 움직임", 십 년을 넘게 한국에서 입시 미술을 하고, 원하던 미대에 진학을 하고, 그리고 당연히 내 일이겠거니 하며 그림을 그려오던 그녀가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과 모호한 불안감으로 어찌할 바 몰라 할 때, 다가왔던 진실이었고, 찾아내었던 방법이다.

이윤진_호수_순지에 수묵_75×110cm_2009

이윤진은 담담하고 의연하지만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요동을 잡아내기 위하여 색을 제거하고, 먹을 묻힌 붓을 종이에 찍어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초기의 나무를 소재로 한 작업들은 나무기둥 하나 하나를 선적인 요소로 보고 여백과 채워지는 면의 조화를 고려하여 화면이 구성되었다. 선묘가 강화되면서 나무들의 형태도 간결해졌고, 기둥을 채우는 결의 모습도 점점 패턴화되었다. 이러한 패턴들은 화면을 추상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무라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오롯한 유기적 생태성을 환기시킨다. 농담을 주지 않은 화면은 평면적이고 다시점을 포용하며 나무라는 소재가 작가에게 준 큰 의미에도 불구하고, 소재에서 시선을 벗어나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가 그리고자 한 것은 나무로 인해 깨달은 에너지이며 기운인 것이다. 이후 본격적인 "정중동" 시리즈의 작업들은 작가의 반복적 작업 행위가 극도로 드러나게 된다. 붓의 끝만을 이용하여 자잘한 패턴을 끊임없이 채우는 작업의 반복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모호한 소재가 화면에서 발견된다. 이는 작가의 감정의 결정화(結晶化) 과정이다. 작은 선들로 면을 채우는 작가의 감정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승하고, 하강하고, 중첩되며 부유하다가 겹쳐지며 결정체로 발전한다. 이성적이 될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 음영, 움직임, 배치 등의 미묘한 차이를 보이면서 지속적으로 화면에서 또 다른 화면으로, 작업에서 또 다른 작업으로 움직여가고 있다. 정중동 시리즈의 결정체들은 조금씩 움직이다가 화면에 수평선을 만들고, 그 수평선은 다음 작업인 '섬' 시리즈의 근간이 된다. 구상적인 세밀함이 보여지는 이 시리즈들에서는 나무로 회귀하는 다음 작업의 지짓돌이 되면서 작가의 감정적 자신감이 보여진다. ●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예술이란 '예술가 자신이 자각한 바를 본질적이며 내적인 존재로서 명징하고 잡스러운 것이 빠진 진수로 이뤄진 관점을 갖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획득된 지식을 그 자신으로부터 제거시키는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윤진은 "정중동"의 움직임을 일깨워준 나무들을 다시 한번 그려내었다. 거대하게 확장되고 증폭된 규모의 작업에서 분명 또 다른 움직임이 보인다. 이윤진은 작가 자신에게서부터 끊임없이 흘러가는 상호적 관계망에 집중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속의 에너지에 대해 구도자적 자세로 부단한 작업을 통해 하나씩 고찰하고 있다. ■ 최효진

Vol.20120411h | 이윤진展 / LEEYUNJIN / 李允珍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