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의 계단

장현주展 / CHANGHYUNJOO / 蔣賢珠 / painting   2012_0406 ▶ 2012_0504 / 일요일 휴관

장현주_카이로스의계단_캔버스에 혼합재료_108×244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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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406_금요일_05:00pm

주최/기획 / Art space LOO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루 ART SPACE LOO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110번지 Park110 빌딩 B1 Tel. +82.2.790.3888 www.artspaceloo.com

기억의 서(書), 무의식의 서(書), 욕망의 서(書) ● 장현주는 근작에서 카이로스(Kairos) 곧 영적인 시간에 대한 여정을 주제화한다.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물리적인 시간, 현상적이고 감각적인 층위에서 경험되는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Chronos)와는 비교되는 시간개념이다. 순간으로서의 시간개념이며 절대적인 시간개념이다. ●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에는 시간을 잡아먹는 거대한 거인이 등장한다. 아들을 잡아먹는 아버지며 현재의 시간을 집어 삼키는 과거의 시간을 표상한다. 현재가 없는, 모든 현재가 과거 속으로 밀어 넣어진, 모든 현재가 다만 과거와의 관련 속에서 암시되고 유추될 수 있을 뿐인 거대한 기억 덩어리를 표상한다. 역사며 지식, 인류의 문명사의 악몽과도 같은 메타포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현재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부재 속으로 망실되지 않고 현재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시간을 영원한 현재의 연속이며 연계로서 경험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까. 카이로스가 바로 그 해법이며 해답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개념에서 그와 유사한 경우를 확인할 수가 있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주체의 의식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결합하고 부풀려지고 확장되는 시간 개념이 그렇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 역시 그렇다. 끊임없이 현재로 호출되는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때로 과거를 간섭하고 왜곡하기조차 하는 현재와 더불어 결정되지 않은 과거라는 모순율이 순순히 받아들여진다. 그 모순율과 더불어 모든 시간의 계기들이 다만 분절된 순간들의 연속이며 연계로서 경험된다. 그래서 내 의식은 그렇게 오롯해진 순간들의 집합으로 와글거리는 시간의 집이며 몸이 된다. 작가가 주제화한 영적 시간이란 아마도 그런 의식의 차원을 의미할 것이다.

장현주_시작과 끝, 순환_한지에 혼합재료_190×95cm_2012

작가는 이런 영적인 시간이며 순간의 포착 내지 지속을 궁극적인 지향으로 삼는다. 그런데, 어떤 시간이며 어떤 순간인가. 영적인 시간이 품고 있는 영적인 사건이란 어떤 사건인가. 영적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에 관한한 말해질 수 없다고 했고,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했다. 다만 개인적인 층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경험이며 일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영적인 사건이 일상적인 사건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며, 영적인 경험이 현실적인 경험과는 다른 층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적어도 비현실과 초현실, 비논리와 비이성이 설득력을 얻는다. 의식의 끈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무의식이 자유자재로 유영하도록 방기하는 것이며, 그렇게 원초적인 의식이 열어놓는 비전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영적인 시간을 붙잡는다는 것은 바로 그 원초적인 의식(의식의 원료? 무의식?)에 자기를 맡긴다는 것이다. ● 사실 작가에게 이런 성향이나 자질은 진작부터 예견된 것인데, 첫 전시에서의 「몽상일기」나 연이은 전시에서의 「Swing」 같은 주제의식이 그렇다. 몽상도 그렇지만, 특히 Swing은 흔들리고 부유하는 상태를 표상한다. 의식이 고정돼 있다면 몽상과 무의식은 고정돼 있지가 않다. 마치 정해진 길이 따로 없는 물속에서처럼 몽상과 무의식은 자유자재로 분기하고 분절되고 결합하고 확장된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에는 이처럼 몽상과 무의식의 표상들이 등장하는데, 물속 정경이 그렇고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하늘과 열린 공간이 그렇다. 그리고 몽상과 무의식은 집과 방의 모티브로 변주(혹 변장?)된다. 그 집에는 일기 같은 일상이 들어서고, 일상으로부터 일탈된 이상으로 방이 채워진다. 그렇게 들어서고 채워진 일상과 이상의 편린들이 자유자재로 변형되고 변태된다.

장현주_시작과 끝, 순환_한지에 혼합재료_95×190cm_2012 장현주_The ark_한지에 연필_95×190cm_2011

그 이면에서 일종의 다중주체에 대한 공감이 엿보인다. 주체란 고정된 단일의 실체 내지 총체라기보다는 그저 무분별하고 우연한 타자들의 집합에 지나지가 않는다. 나는 주체의 집이라기보다는 타자들의 집이다. 그 집에는 강과 호수가 등장하고 강과 호수를 건너가게 해주는 배가 등장한다. 열리거나 닫힌 공간으로 연이어진 계단과 통로가 등장하고 그렇게 공간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날개 짓이 등장한다. 이는 분명 통과의례의 메타포가 아닌가. 타자(저편)에게로 건너간다는 것은 결국 타자를 에둘러 진정한 자기에 정박한다는 것이 아닌가. ● 랭보는 자신이 곧 타자라고 했다. 나는 타자들로 분열되고 현실은 일상과 이상으로 분리된다. 표면과 이면이 분리되고 파토스와 에토스가 분열된다. 인간은 현실과 의식을, 실제와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동물이다. 현실 저편으로, 의식너머로 자기를 내보낼 수 있는 동물이다.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 작가는, 우리는 늘 지금과는 다른 상황과 환경을 꿈꾼다고 했다. 보들레르는, 지금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괜찮다고 했다. 그곳 즉 여기가 아닌 저편이 다름 아닌 영적 시간이 흐르는 곳이며, 타자(진정한 주체? 진아?)가 정박해 있는 곳이며, 몽상과 무의식이 세계를 재편하고 수리하는 꿈 공장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 꿈 공장의 메타포 같다.

장현주_Never ending dreams_캔버스에 혼합재료_92×136.5cm_2012

시작 혹은 기원. 작가는 시작 혹은 기원의 메타포로서 바벨탑을 그린다. 어떤 시작이며 어떤 기원인가. 그것은 적어도 세계의 시작이며 기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세계는 카오스로부터 시작됐다. 행복한 혼돈이며 자족적인 혼돈이며 자크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해당한다. 작가의 기원은 이런 상상계를 그려 놓은 것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언어와 기호로 축조된 아버지의 정언명법이 지배하는 상징계를 그려 놓은 것 같다(언어와 기호를 매개로 세계는 세계 자체와 개념으로 분리되고, 실제는 한갓 개념으로 축소된다). 알다시피 바벨탑은 신의 분노를 싸 허물어지는데, 이때 신으로 하여금 바벨탑을 허물게 해 준 계기가 언어며 기호다. 제각각 다른 언어와 기호를 말하게 함으로써 인간 사이를 분열시킨 것이며, 허물어진 바벨탑은 바로 이렇듯 분리되고 분열된 인간사의 메타포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세계의 기원으로서보다는 인류문명의 기원처럼 보인다. 인류문명이 다시금 쌓아올린 이 바벨탑은 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가? 모를 일이다. 신의 의지를, 아름다움에 대한 신의 잣대를 인간이 어찌 알랴. 여하튼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의미 있는 일은 계속해서 탑을 쌓는 일 밖에.

장현주_For a moment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89cm_2011

호흡과 숨결. 내장 대신 마치 복잡하고 정교한 공장을 보는 듯한 기계부품들로 채워진 배 혹은 몸을 보여준다. 장지에 연필로 그린 이 그림이 일종의 기계인간을 예시해준다. 작가는 이 기계인간(마치 기계처럼 제도의 한 부속으로 전락한 인간?)에게 호흡과 숨결을 불어넣어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되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도 그렇지만 작가의 많은 그림들이 연필로 그려져 있고, 그 그림들에선 형식적으로 드로잉이 강하게 어필돼온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선이 갖는 중요성을 생각하면 작가의 연필그림 역시 일정하게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혹은 전형적인 형식논리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서도, 말하자면 한국화를 전공했으면서도 사실상 한국화라는 장르적 특수성이 무색할 만큼 분방한, 특정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자재한 표현과 형식이 일종의 뉴에이지 페인팅의 한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 실제 파라다이스와 실제 환상. 작가는 페인팅과 연필 드로잉, 그리고 공간설치작업을 아우르는 다양한 형태와 버전으로 「실제 파라다이스」와 「실제 환상」을 형상화해놓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분방한 필치와 비정형의 얼룩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화면운영이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무한정 펼치기만 하기보다는 일정한 절제를 잃지 않는데, 그래서인지 화면은 자기 외부로 확장되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정리돼 보이는, 그런, 말하자면 확장과 수축, 긴장과 이완의 상호교호관계가 엿보인다.

장현주_The shadow_한지에 혼합재료_105×92cm_2012

여기서 파라다이스란 아마도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일 수도 있겠고, 일종의 이상향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작가는 우주과학에 관심이 많은데, 그 관심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이상향에 대한 염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염원은 이상향의 표상으로서 화성 내지 행성을 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림에서 행성은 사람의 머리(꿈꾸는? 이상향?)로, 공으로, 과녁(지향?)으로, 하늘을 나는 놀이기구로 변주된다. 어차피 이상향을 표상한 것이라면 정해진 형식이 따로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밖에도 배와 하늘을 나는 기구, 모노레일과 같은 놀이기구, 아마도 상승을 상징하고 암시할 계단과 같은 여러 자잘한 풍경의 편린들이 하나의 거대한 풍경 속으로 싸안아진다. 그런가하면 피아노 건반 같은 계단이 초현실주의의 영향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사물의 전치 같은. 그러면서도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연상시키는, 그림 속에 다른 그림이 포개진 경우가 일종의 이중그림 내지 다중그림으로 부를 만한 경지를 열어놓고 있다. 모티브와 모티브, 그림과 그림, 풍경과 풍경이 겹겹이 포개지고 중첩된 화면은 비록 평면적이지만 일종의 유사 원근법 내지 공간감을 암시한다. 마치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놓은 것 같고, 머리 위로 생각의 다발을 풀어놓은 것 같다. ● 작가는 이 시리즈 그림을 각각 컬러 화면과 흑백 모노톤의 화면으로 재현한다. 컬러 화면으로 재현된 그림은 그림 속의 서사나 모티브 때문이라기보다는 현란한 색채가 파라다이스를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흑백 모노톤 화면은? 그 그림은 비록 파라다이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실은 파라다이스와는 거리가 먼 현실처럼 보이고 일상처럼 보인다(원래 파라다이스란 암울한 그림에서처럼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 위로 싹트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은 현실과 이상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비교 설명하고 있는 쌍 그림처럼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출구」라는 그림에서 그런 현실을 일탈하게 해주는 관문이며 통로를 그려 넣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이 그림들과 함께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실제 파라다이스와 실제 환상이라는 제목이다. 아마도 작가는 실제란 말을 통해서 선입견으로 굳어진 파라다이스 내지 환상과는 다른, 그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개인차와 개인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영어 Practical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Practical의 의미는 이중적인데, 실제를 의미하고 실천을 의미한다. 아마도 진정한 파라다이스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고 획득되어지는 것이라는 실천논리를 암시할 것이다.

장현주_Breath_캔버스에 혼합재료_100×100cm_2012 장현주_Breath_캔버스에 혼합재료_100×100cm_2012

이 외에도 작가는 「진실」 혹은 「네 마음을 열어봐」와 같은 그림들에서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 혹은 억압된 욕망을 매개로 자기와는 또 다른 주체(어쩌면 진정한 주체일지도 모를)와 대면하게 한다. 알만한 기호와 알 수 없는 기호들, 숫자들,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태와 패턴들 등 상호간 이질적인 모티브의 편린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풍경, 그러므로 일종의 내면풍경이며 무의식 풍경으로 부를 만한 어떤 차원을 열어 놓고 있다. 「순간을 위하여」에서는 아마도 미처 생생함이 가시기 전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착상 그대로를 기록하고자 하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계기가 반영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출구」 같은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관문은 아마도 현실 저편의 어떤 궁극적인 세계, 원형적인 세계, 절대적인 세계로 연이어져 있을 것이며, 그 자체를 작가의 무의식의 표상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기법을 매개로 실제와 현실을 재구성해 보인다. 모티브들은 흔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지며, 논리적인 개연성을 벗어나 분방하고 자유로운 사고의 전개를 가능하게 해준다. 철저하게 상황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의미가 의미를 고정하려는 모든 기획을 의심하게 한다. 혼돈과 질서, 카오스와 코스모스, 파토스와 에토스가 상호작용하면서 긴장과 이완을 교환하고, 만화에서나 볼 법한 말풍선이나 심지어 서명이나 사인마저 그림의 일부로서 완벽하게 녹아들어있는 그림이 흡사 무분별하고 분별한 인식지도를 보는 것 같다. ● 그리고 옆으로 긴 그림이 두루마리 그림을 예시해주는데, 전통적으로 두루마리 그림은 일종의 그림책으로 여겨져 왔다. 여기서 그림은 다만 그 길이가 긴 것만이 아닌, 그 의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지는, 끊임없이 다른 의미를 불러들여 덧붙여지고 부풀려지는, 그렇게 무한정 펼쳐지고 전개되는 일종의 기억의 서(書), 무의식의 서(書), 욕망의 서(書)로 부를 만한 어떤 차원을 열어놓고 있다. 그 그림책이 수수께끼로 가득한 삶이며 존재의 생리를 표상하는 것 같다. ■ 고충환

Vol.20120406e | 장현주展 / CHANGHYUNJOO / 蔣賢珠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