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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40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아카 스페이스 AKA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27번지 태화빌딩 B1 Tel. +82.2.725.5757
신소연의 작품세계-선(禪), 그건 정말 소통이 불가한 언어일까. ● 1. 8,90년대에 유행어처럼 번졌던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 이 철학적인 무게를 지녔던 말은 이제 그 순결을 잃었다. 말(言語)이란 언제나 최초의 발명자가 발화(發話)할 때에만 제대로 소통의 긴장감을 지니는 법이니까. 필자의 기분 같아서는 신소연의 작업에다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하지만 이미 그 말의 기의(記意)는 순결을 상실해 버렸으니 정말 아쉬운 일이다. 어찌되었건 군중 속에 자기를 발견하고 그 자기를 대상화(對象化)하는 일(Self-Identification)은 오늘의 우리미술계에서는 이미 고전(古典)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그 고전에 목을 매지 않는다. 고전이 사라진 우리미술의 오늘은 정말 쓸쓸하고 허무하기 이를데 없다. 하지만 올페우스의 잘려나간 머리는 그 어디로 굴려 다녀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 법이다. 고전이란 것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신소연이 2007년에 보여준 작업은「mono-meditation」시리즈였다. 그의 이 명상법도 올페우스의 노래와 같은 것이지만 그 소리는 주변에 퍼져 있는 잡음과 선명하게 분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신소연은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언표(言表) 했다.「한지의 흰색으로 저 너머의 내적공간을 이야기한다.」 한지와 저 너머에 있는 내적공간, 그러니까 이 말은 한지작업을 통해 군중속의 고독을 이야기하려는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존재의 '저 너머'를 생각하려는 그의 조형 언어는 소극적이고 강하지 않다. 그런 후 그는 2009년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그 너머'의 세계를 한층 더 진지하게 구체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불가(佛家)에서는 선(禪)을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不一而不二)' / 라고 한다. 나는 작품「명상」으로 이를 대변하기 위해 공(空)과 색(色), / 현상(現象)과 실재(實在)를 사색하려 한다._신소연, 2009년『색-명상전』카탈로그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속으로 들어가면 군중속의 고독이고 군중 속에 있는 자신을 대상화한다는 뜻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선택한 소통의 언어가 불교적인 화술을 통해 관객과 만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석사학위의 논문도「현대회화에 나타난 禪사상에 대하여」이다. 그는 이 선(禪)의 화두를 '하나가 아닌 것은 둘도 아니다(不一而不二)'라는 불가의 문구를 내세우고 싶어 한다. 사유(思惟)를 막다른 골목에다 가두는 화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선이란 문도 없고 출구도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그래서 되돌아 나올 수도 없다. 길은 반대로 자신 안에서 출구를 찾는 일로 일반적으로 잡다한 의식을 모조리 내 쫓는 일로 생각한다. 마약인 LSD가 70년대의 전위예술에서 일시 "깨달음의 약"으로 통했던 것도 이런 전략을 실천하기 위해 등장했다. 하지만 잊어버린다는 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선이 요구하는 버린다는 언어의 탯줄을 끊는다(言語道斷)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소연의 이번「적(跡)」>시리즈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번「跡」시리즈에서는 '저 넘어'라는 주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아간 작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의 한지작업이 어떻게 이런 거창한 주제를 소화하게 되는지는 나로서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2. 2007년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자신의 조형작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반복적으로 네모형상을 채우고 비우는 것은 요란한 예술을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고 부단히 명상으로 가기 위한 정화의 수단'이다. 이때 '정화(淨化)'는 지난 209년의 전시에서 선(禪)의 막다름과 대결하는 적극적인 조형작업으로 나타났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이번 전시에 또 다른 기대를 거는 것은 나의 욕심만이 아니다. 신소연의 작업을 일관하는 특징은 대체로 혼합재료로 만들어진 한지와 돌가루를 이용하여 구축한 쿨 미디어감각을 토대로 무수한 네모꼴의 단편(斷片)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얼른 보면 그것은 점토판에 새겨진 쐬기 문자처럼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다. 70년대의 미술에서처럼 여기에 존재의 '낯설어지기'책략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해 볼 수 있다. 어찌되었건 그 네모꼴의 무채색(無彩色)단편들이 선방(禪房)의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은 그럴법하다. 주목할 것은 그가 만들어낸 네모꼴의 단편들이 장이의 벽돌쌓기처럼 횡으로 종으로 반복되어 나열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벽돌쌓기는 분명 목표가 있는 행위이고 신소연의 단편의 나열은 무목적이 목적이라고 해야 옳다. ● 무목적이 또 하나의 목적이 되면 그것 다시 목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작가가 언급했듯이 자신의 네모꼴단편이 '하나가 아닌 것은 둘도 아니다'라는 선에 도달하는 언어작업이 되자면 또 다른 실험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공(空)과 색(色)이라는 개념에 유의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연기(緣起)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연고(緣)라는 말과 '생기다(起)'는 말의 합성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고에 의해 생겨나고 연고에 의해 소멸한다는 뜻이다. 신소연의 네모단편이 '낯설어지기'의 고전적인 전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전개한 단편의 되풀이가 실은 아무런 인연의 끈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를 반어적으로 읽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타는 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실재(實在)하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나타난다." 신소연의 네모단편은 그러니까 인연의 사슬을 끊고 있다고 말해도 된다. 하지만 불타는 또 그랬다. '인연에 의해 존재한 것은 또 인연에 의해 변화하고 인연에 의해 사라져 간다." 이 말에서 불가가 사용하는 무자성(無自性), 공(空), 선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신소연의「跡」시리즈에서 이런 점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색채의 모노톤을 기조로 한 적극적인 화면들의 출현에 의해서다. 그것은 무채색의 침묵을 깨고 연기(緣起)가 부정(否定)으로서가 아니라 반대로 긍정의 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채색의 모노톤은 녹색, 청색, 황색, 적색으로 그것들은 기본적으로는 솔로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상호공존형식이나 색의 퓨전방식을 통해 구조로 나타난다. 연기라는 말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깰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번「적」시리즈에서 녹색, 청색, 황색, 적색이 사계절의 기호가 되는 것은 그러니까 이 작가의 만만치 않는 저력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글이 좀 난해진 것을 걱정하면서도 이것 또한 연기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한가닥 위안이 된다. ■ 박용숙
Vol.20120404j | 신소연展 / SHINSOYEUN / 辛所姸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