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권展 / LEESANGKWON / 李相權 / painting   2012_0328 ▶ 2012_0403

이상권_1995~201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0

초대일시 / 2012_032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익숙하고 기이한 - 이상권의 그림들에 대하여 ● 이상권이 오랜만에 개인전을 연다. 17년만인가 18년 만인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반갑다. 그의 작업실엘 찾아가 그림을 본다. 나름 동안인 그도 별 수 없이 제법 중년의 얼굴과 몸을 하고, 여전히 일상적인 중년 아저씨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전에 했던 그의 전시도 비슷한 내용이었고 분위기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18년 전의 그림이 남의 세계처럼 보였다면, 이번의 전시는 자신의 세계, 자기 이야기가 되었다. 18년 전에 내가 그의 전시 서문으로 썼던 글을 다시 찾아 뭐라고 썼나 살펴본다. ● 그의 그림은 앙리 르페브르가 말하는 도시의 일상성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인 셈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일상성은 도시를 무대로 일어나며, 사람들은 그것을 끔찍하게 지겨워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서 밀려날까봐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교통지옥 속의 출퇴근이라는 강제된 시간, 지겨워하면서도 할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의무의 시간, 그리고 술집과 유원지에서 보내는 자유시간이라는 세 가지 양태의 시간 속에서 헛살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된 시간은 점점 증대되고 자유 시간은 줄어드는 속에서 극도의 권태,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사람들이 일상성에서 떨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실직의 공포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직은 단순히 돈을 못 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상실감을 동반한다. 이러한 권태, 피로, 공포감을 잊기 위해, 아니 잠시라도 해방되기 위해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 기대를 건다. 아마도 술집은 그것이 어떤 형태든 간에 그와 같은 여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위로를 받기에는 세상은 너무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상권의 그림은 그것에도 회의적인 것처럼 보인다.'이 세상은 몰락한 백만장자가 기증해준 우리의 병실'이라는 엘리어트의 시귀처럼. ● 인용이 길었지만 그의 그림은 그 범위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놀라운 것이 아니다. 첫 개인전 이후 그의 삶은 삶 자체에 바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청년이 되어 중년이 된 자신을 보며 그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권_귀갓길_캔버스에 혼합재료_45×116.5cm_2011
이상권_내 말은 그게 아니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9×162cm_2011

그의 이번 전시는 주로 술집과 식당과 거리가 주된 장소이다. 주로 중년 남자들 그곳에 모여서 마시고, 옛날이야기를 하고, 정치가들을 씹고 아니면 혼자 늦은 점심을 먹는다. 그런 일들이 지겨워서 밴드를 조직하고, 그를 핑계 삼아 또 한잔 하고 노래를 부른다. 배경은 연립 주택과 약간 낡은 아파트가 모여 있는 이면 도로나 골목 초입의 술집이나 음식점, 혹은 거리이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장소와 비슷해 보인다. 이게 그의 강점이다. 이 상권은 오버하지 않는다. 자신이 뭘 하고, 뭘 알고 있는 지에서 시작한다. 지극히 구체적이다. 그리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이 뭘 하건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이야기가 있고 그에 따른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들은 나직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아니 주장 한다기보다 이야기를 걸어온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묘한 설득력이 있어 그림 자체와 인물들의 직업, 배경과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를 상상하게 한다. 즉 일종의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그림들이 가지는 일러스트적 효과와 서사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즉 그가 그린 장면들은 현실의 장면을 사진 찍듯 옮긴 것도 완전히 상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의 그림들은 현실과 그것에 바탕을 둔 허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 배합된 내용들은 일종의 데자 뷰 효과를 낳는다. 언젠가 저런 자리에 내가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몇몇 친구들은 약속 장소에 늦게 오고,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잠시 이야기가 끊기고, 누군가는 혼자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한다. 이 시시함, 그리고 구체성이 굳이 그림들을 시간에 따라 서사적 배열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한 연상을 하게 만든다. 즉 그의 그림 속에는 한편의 연속된 소설 같은 서사성이 있다. 이 서사는 문자로 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연상을 지속하게 하는 이미지의 서사이다. 비슷한 얼굴과 분위기를 가진 인물들이 마치 캐릭터를 지닌 것 처럼 몇몇 그림에 등장한다. 그것이 그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때문에 장면들-미장센 속에서 그 이미지들은 기억과 현실 사이에 걸려 그림에 살짝 홀리게 한다. 누군가 봄꽃이 만개한 길로 행복한 출근을 한다. 일하는 장면은 생략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누군가가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할지 대개 짐작이 간다. 어쩌면 일하는 동안은 그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강제된 시간일 것이다. 퇴근길에 날나리 여중생과 마주치고, 퇴근 후, 혹은 점심시간에 뭔가를 먹고 마시고, 놀고, 떠들면서 보낸다. 식당과, 술집과 거리에서...

이상권_늦게 온 친구2_캔버스에 유채_80×116cm_2011
이상권_정치면 읽는 남자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1

이러한 삶, 일상은 뭘 지향하는 것일까? 아무도 뭘 지향하는지 모른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행복한 삶일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어떤 생각」속의 남자는 맨발에 턱을 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옛날 생각만 하는 남자」는 또 뭘 생각하는 것일까? 이상권의 그림은 그려진 장면이 아니라 그려지지 않은 장면들이 더 중요해 보인다. 아니 그려지지 않은 장면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림 속에는 고통스러운 장면, 삶의 신산함이 거의 한 장면도 그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려지지 않은, 말해지지 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에 관해서 알튀세 식으로 일종의 징후적 독해를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다시피 징후적 독해란 이중적 독해이다. 한편으로는 명백하게 눈에 읽히는 텍스트를 해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서 간과되고 결여된 것을 뒤져 숨어 있는 텍스트가 무엇인가를 찾아 읽는 것이다. 이상권이 그림으로 그리지 않은 것, 말하지 않은 것들, 은폐되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삶이 보여주는 모순, 불가해한 폭력, 미래에 대한 공포, 일상의 지리멸렬함일 것이다. 이상권의 그림에서 우선 눈에 띄는 문제 설정은 여가의 시간, 혹은 노동 이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장소들 역시 노동과 가족을 벗어난 곳이다. 술집과 까페와 거리에서 사람들은 잠시 개인이 된다. 아니면 개인이 되었다는, 자신이 주체적 존재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친구와 지인들에 의해 범위는 확대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들은 일시적인 해방의 장소에서 벗어나 집과, 일터로 되돌아간다. 어쩌면 이상권이 말하고 보여주려는 세계는 바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지 않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그에 관해 대부분 무심하고, 세대와 관계없이 모두 다 살기가 힘들어지지만 그 이유가 안보이거나 은폐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얻는 소소한 위안은 커피잔과 맥주잔과 의자에 있다. 그것은 희극으로 포장된 비극의 세계이다.

이상권_코러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9×130.3cm_2011

이상권의 그림은 현실의 고통에 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뭔가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은 회화에 관해서도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이것이 그의 의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리자 필립스가 이십여 년 전에 쓴『이미지 세계: 시각예술과 미디어 문화』에서 말한 이유들과도 일치할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현대에 있어 '재현이라는 것이 개인의 상상력이라는 절대 영역 내에서만 이루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무엇인가를 의미하도록 허용하는 특정한 컨텍스트들 속에서 실현되는 권력의 기구이다.' 라고. 이 말은 오늘날의 화가, 미술가들이 재현하는 세계란 한 개인의 해석이 아니라 그런 해석을 용인하고 허용하는 미술, 혹은 사회적 문맥 속에서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사실 오늘날의 다양한 재현 방식들은 새롭고 낯선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점에 있고, 그것이 가능한 척하는 제스처만이 허용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이상권의 그림들은 알기 쉬운 기법과 배치를 통해 대중적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대중적인 것이 무엇인가, 혹은 우리에게 허용된 재현의 방법의 핵심을 찌른다. 그것은 회화적이되 읽히기 쉬운 외양을 하고 있다. 더 이상 가봐야 별거 없다는 듯이 아는 길을 걸어간다. 물론 이러한 관습적인 이미지 제작방식의 한계도 있다. 너무 익숙해서 여간해서는 이 익숙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잊게 만든다. 즉 익숙함에 너무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상권_행복한 출근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cm_2011

이상권의 그림에서 개인적으로 흥미 있는 작업들은「늦게 온 친구 2」나「정치면 읽는 남자1.2」와 같은 그림들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인물들과 풍경을 좀 더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바라본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하는 현실감과, 상상의 분위기가 잘 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제 이상권이 가야할 길, 혹은 그림들의 방향이 그쪽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래전 이상권의 전시 서문에서 나는 레지스 드브레를 빌어 회화란「노동과 광선」이라고 썼었다. 그것은 아직도 유효해 보인다. 노동이란 회화가 떨구어 낼 수 없는 육체성을 의미한다. 아니 신체성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몸으로 느낀 것과 몸으로 다루어야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의미이다. 그 신체성은 감각과 몸이 가진 작가의 의도에 저항하는 물감들의 버팅김까지도 포함한다. 그리고 광선은 그림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물적, 외적 조건을 대표하는 광선이라는 말은 문화적, 역사적 무게를 털어버린 회화의 존재적 기반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 말하지 못한다. 회화란 그런 것일 것이다. 아무리 의미 구조화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더라도 원초적인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이상권이 그림에 끌린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다시 그 밀고 당김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가 이제 술집 골목을 나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그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 강홍구

Vol.20120328e | 이상권展 / LEESANGKWON / 李相權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