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908g | 유현경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9:3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Hakgojae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Tel. +82.720.1524~6 hakgojae.com
유현경: 인물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 유현경은 인물화를 그린다. 거의 모든 작품에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그림들에서는 에피소드와 사건들로 채워진 풍경 속에서 더욱 단순화된 관념의 형태들로 그려지고, 또 어떤 그림에서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피사체(被寫體)처럼 다루어진다. 유현경의 최근 연작은 모두 실사(實寫)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모델을 보고 그린 그림들이다. 그의 인물은 밝거나 어두운, 혹은 불안하거나 아늑한 공간이 아닌 회화적 색채들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 그려져 있다. 그의 사실적 추상기법은 조안 미첼(Joan Mitchell)과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를 떠올리게 한다. 미첼의 직관적인 관찰과 터치들, 자코메티의 인물화가 보여주는 대상의 미니멀한 존재감 등을 그의 작업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유현경의 실사가 흥미로운 점은 그와 모델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특수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이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화가와 모델'의 관계와 달리 그의 작업에서 모델은 재현보다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감화(affect)'의 대상이다. 즉 이 관계에서 화가는 모델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모델은 화가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회화는 그 과정이 '인화'(in-pressed)된 것이다. ● 2009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욕망의 소나타」에서 유현경은,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일종의 '포화상태'를 보여주었다. "난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기도 하고, 비정상적이고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불안할 때는 말을 많이 하고, 흥분하고, 앞으로 걸어가고, 눈을 이상하게 뜨고, 머릿속이 포화상태가 되고, 손잡고 싶고, 떨리고, 잔인한 생각을 한다. 그러한 상태가 찾아오면 사람들이 표피적으로 보이며, 발가벗겨서 경멸하기도 하고, 마구 사랑하기도 한다."_2009년 전시『욕망의 소나타』에 대한 유현경 작가의 글에서. ● 포화(saturation)를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은 시각적 떨림, 감정적 몰입, 상념의 극대화, 대상에 대한 극적 경험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 전시에서 소개된「일반인 남성 모델」연작은 실제로 작가가 섭외한 남자들을 모텔에서 만나 그들을 누드로 그린 것이다. 불안하고 낯설다 못해 위험한 이 교류의 경험은 작가에게 있어서만 아니라 작가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있어서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회화적 면'(plane of painting)과 '삶의 문제'(Probleme des Lebens)가 조우하는 접점들에 대한 것이다. "모든 가능한 과학적 질문들이 대답된다 하여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는 것을 느낀다."_비트겐슈타인,『논리철학논고』, 6.52
회화적 면은 캔버스의 표면일 뿐 아니라, 화가와 대상의 조우에 의한, 동시에 그들과는 무관하게 생성되는 독자적 현실을 가리킨다. 회화적 면은 물리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대상인 동시에 주체와 중첩된다. 벨라스케스의「시녀들 Las Meninas」은 바로 그러한 예라고 하겠다. 이 그림은 회화적 기술의 절정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회화가 하나의 추상적 면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주체와 회화적 면의 중첩에 대해서는 푸코의 탁월한 분석을 떠올릴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사는 대부분 이 회화적 면에 대한 사유의 역사다. 회화가 세계 안에서 독립적이고 초월적인 현실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것이 다른 어떤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노력으로도 해설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적 정리의 한계와 그것이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의 협소함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바깥, 즉 '삶'의 영역을 예술이 담당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회화적 면은 철학의 바깥을 이루는 '삶의 문제'를 회화 안에서 구조적으로 반복한다. 논리학은 언어적 논리라는 좁은 영역 바깥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관계들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회화는 그러한 관계들을 대체한다. 회화적 면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그 안으로 가라앉는다. 화가와 관객은 그 장면을 회화를 통해 목도한다.
「일반인 남성 모델」은 화가가 그러한 관계들에 대해 맺는 계약의 형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예시한다. 모델은 관심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 스스로 주체이기도 하다. 모델은 화가를 바라본다. 화가가 모델과 조우하는 순간은 이러한 상호주관적 관계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유현경의 작품 속에서 모델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각각의 모델들은 지인이거나 혹은 낯선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델로서 작가의 앞에 서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관계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이들은 유현경이라는 여성, 화가, 친구, 낯선 상대의 앞에 상이한 관계들에 의해 호출되어 와서 서거나 앉아 있다가 떠나간다. 작가는 이 인물들에게 때로는 관심을 갖고 대하지만, 때로는 그들이 다녀가는 동안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기도 한다. 모델은 인간적 교류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회화적 사건을 위한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이 파악할 수 없는 응시의 주체(혹은 응시의 대상)가 회화 안에서 그려지고/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화가의 모습은 구슬을 바라보는 점술가를 연상시킨다. 모델(의뢰인)이 그의 앞에 앉아 있지만 그가 응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 5개월간 독일에서 레지던시를 하면서 유현경이 그린 인물화 연작은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회화적 사고의 국면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대부분 속필(速筆)로 그린 것들로, 얼굴이나 신체의 자세한 묘사가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림자나 얼룩처럼 보이는 흐릿한 실루엣을 통해 겨우 인물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대상과의 재현적 유사성은 소멸되고 대신 대상의 현전에 대한 '납득'(apprehension) 같은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현경의 인물화에서 모델은 재현이나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매번 불안한 조우(遭遇)의 단초 같은 것이다. 나는 그를 앞에 두고 그를 그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가 앞에 있어야 했다. / 그는 종종 그를 보지 않고, 그림에 몰두해 있는 나를 보고 가도 되는지를 물었다. / -그냥 있어줘. / 나는 즉각 대답하였다. (...) / 나는 잠깐 그를 그린 것이었는데 시간은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이제 그를 더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나는 그림이 잘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자세히 보았고, 그녀를 그릴 수 있었다.//_유현경 작가 노트에서.
회화의 물질적 관능(sensation)에서 비롯하는 화가와 모델의 전통적 관계는 여기서 회화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물화(portrait)란 무엇인가? Portrait는 중세불어의 'portraire' 그리고 라틴어의 'protrahere'에서 비롯된 말이다. 부정형은 'protraho'로, '드러내다' '앞으로 끌어내다' '베일을 벗기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http://fr.wiktionary.org/wiki/protraho#la) 한편 한자에서 '초상'(肖像)의 '초'는 '닮은' '같은' 등의 이미지를 지닌다. 즉 '닮은 이미지' '같은 이미지'를 가리킨다. 같은 글자인 '초'를 '소'로 읽으면 '소멸' 혹은 '쇠퇴'의 의미로 읽힌다. 인물화가 지향하는 재현의 대상은 감추어져 있거나 이미지를 소멸시켜야만 드러나는 어떤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인물이 외양으로 뒤덮여 있지만 그의 본질은 생각, 인성, 의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대상에 대한 기억, 경험, 분위기, 아우라 등도 이러한 본질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대상이 가까이 앞에 있는 것이 그를 기억하는 충분조건이 되진 않는다. 대상이 먼 곳에 있다고 해서 그의 현전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인물화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오랜 역사를 담고 있다. 실은 그것이 회화의 가장 커다란 주제이기도 하다. 유현경의 인물화는 이 전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인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조건들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숙고한다. 인물화는 회화가 제기하는 가장 복잡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
유현경의 근작들은 간략한 제목들을 지니고 있다.「가난한 사람」,「죽은 사람」,「차분한 사람」,「어린 사람」과 같은 단순하지만 함축적인 제목은 인물들에 대한 한정된, 그렇지만 핵심적인 정보를 전해준다. 예컨대 2011년에 그린「가난한 사람」은 푸른색과 검은색의 거친 붓질들로 이루어진 배경에 거의 뒤덮여버린 사람의 실루엣을 보여준다. 그의 머리는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여 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의 붉은색만이 약간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모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가난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우리는 이 빛들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동시에 비좁게 빛나는 붉은빛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착한 사람」의 얼굴은 어둡고 검은 공간을 배경으로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얼굴을 지운 수평적 붓질은 그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의도적인 부정처럼 보인다. 그 사이로 입과 이빨이 어렴풋이 빛나고 있어 미세하게 표정을 알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수치심이나 분노를 참아내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보인다. 그의 목과 가슴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다. ● 「어린 사람」은 긴 머리를 한 여성의 실루엣이다. 그녀는 맑고 푸른 공간을 배경으로 다소곳이 화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파란색의 면으로 뒤덮여 있다. 그 얼굴은 배경을 향해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텅 비어 있지만 맑은 푸른색의 얼굴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그것은 가면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어린 사람」은 밝고 아름다운 미색의 빛 속에 떠 있는 어두운 얼룩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이 얼룩을 다시 밝은 핑크색 붓질로 몇 차례에 걸쳐 내리그음으로써 상당히 지워놓았다. 이 추상적 얼룩은 사이 톰블리의 회화를 떠올릴 만큼 최소한으로 다루어져 있다. '어림'은 여기서 밝고 맑은 빛과 어두운 얼룩 사이를 변주하며 오간다. 반대로,「어른 여자」의 얼굴은 탁한 자줏빛 배경 위에 불투명하고 밝은 핑크색의 붓질로 뒤덮여 있다. 그 위에는 짙은 빨간 립스틱으로 강조된 입이 그려져 있다. 이 여성이 '어른'인 이유는 자신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이 불투명함을 통해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목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몸은 무겁고 짙은 녹색 덩어리로 표현되어 있다. ● 작가가 모델로부터 어떻게 이런 감정들을 포착해내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여전히 불확실하며 추상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인물들은 작가 자신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경험과 기억, 판단이 대상에 대한 관찰과 '납득' 속에 혼재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인물화들은 수없이 변화하는 작가 자신의 다양체이자, 다양체로서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인물화들은「바람이 좋아요」,「밝아요」와 같은 제목을 지니고 있다. 그리는 도중에 모델이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대상의 상태를 보고 스스로 자신의 뇌리 속에서 내뱉은 말일 수도 있다.「바람이 좋아요」의 인물은 어딘지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수평의 담백한 붓질들로 이루어진 푸른 배경 앞에 어둡고 불안한 짙은 갈색의 얼굴이 떠 있다. 그녀의 목 부분 위로 또 다른 푸른 붓질이 지나가면서 이 갈색의 그림자가 아래로 이어지는 것을 중단시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한 줄기 빠른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외적으로, 이 갈색의 얼굴은 슬프고 묵시적인 표정을 흐릿하게 드러내고 있다. 깊은 슬픔 속에서 그녀는 맑은 바람의 스침을 느끼고 있다.「밝아요」는 밝은 그림은 아니다. 단지 짙은 녹색의 배경 위에 같은 녹색으로 그려진 머리가 흰 윤곽에 의해 구분되어 보일 뿐이다. 예의 그 몸은 흐리게 머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어두운 자주색으로 성기게 뒤덮여 있다. 그리다가 지우기를 반복한 이 얼굴이 느끼는 밝은 빛은 그의 머리 뒤에서 나온다. 아마도 화가가 그를 보면서 느낀 후광일지도 모른다. 또는 화가 스스로 그를 보면서 느낀 빛일 수도 있다.
유현경이 그린 근작들 가운데는 정물이나 풍경화도 있다. 이 그림들은 그가 이전에 그린 군상(群像)들을 떠올린다. 원근법 대신 사물들은 화면 안에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세 개의 화분」이나「숲」에서 각각의 화분이나 나무는 인물화에서 등장한 사람들처럼 그려져 있다. 대체로 대작들인 이 그림들에서 인물과 존재 들은 서로 조우하고 있다. 그것들은 구체적인 사물들이라기보다 얼룩이나 붓질의 덩어리들처럼 다루어져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 안에서 밝고 강렬한 빛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이 식물인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자신의 영역에 머물게 되리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 있는 곳은 산책이나 휴식의 공간도 아니다. 상이한 사물들이 회화적 존재로 머물게 되는 것이 이 그림들이 함축하는 조건이다. ● 회화가 그 독자성과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것은 그것이 생산하는 관계의 역설로부터 비롯된다. 회화는 끊임없이 소멸되고 재창조된다. 제스처, 붓의 움직임, 대상의 해석, 시선의 사용법을 통해 회화가 사라지는 경계들이 생겨난다. 이를 통해 구체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조건들이 생겨나는 것 역시 회화적 역설을 구성한다. 유현경의 회화는 이 회화적 역설을 가시화하는 예외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피카소가 죽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들은 그가 일생 동안 무엇을 그렸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아마도 그것은 삶이 무엇에서 비롯되는가와 관련한 것이리라. 우리는 인물화를 새로 배워야 할 것이다. ■ 유진상
Vol.20120328d | 유현경展 / YOUHYEONKYEONG / 劉賢經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