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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세상과 거리두기, 자아의 비평적 내려놓기 ● 1. 사유의 드넓은 스펙트럼 영원과 유한한 시간에 대한 묵상,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세계의 연결고리들, 사유와 실존의 상관성 또는 긴장 ... , 배석빈이 관계하는 세계의 스펙트럼은 넓다. 관념과 일상이, 리얼리티와 상상이, 공간과 공간의 해체가 모두 이 세계에 개입한다. 문명과 교란된 문명이 공존하고, 도시와 도시에 대한 염증이 중첩된다. 그리고 분석적 지각과 상념, 무기력과 조심스러운 활력이, 우울감과 끈질긴 희망의 심리학이 수시로 교차한다. 심경의 격의 없는 고백이 있는가 하면, 우주와 존재의 근원과 현존에 대한 심오한 해석이 있다. ● 배석빈의 회화 산책은 「중력」에 관한 사유에서 「학교버스」같은 일상의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그 여정은 「화무십일홍」을 거쳐 「카르마」연작으로 까지 이어진다. 그의 최근작들은 '알지 못 하는 세계에 관한 것들'에 다가서고 있다. 아마 초월적 차원의 추구이거나 그저 인식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다. 언젠가 (2011년에 있었던 『드로잉전-붙잡다』 전(展)에서.) 배석빈은 자신의 세계를 일컬어 '체험하는 세계에 관한 근원적 해석'으로 함축한 바 있다.
배석빈의 사유(思惟)의 궤적은 베일 뒤로 스스로를 감추려는 듯, 암시적 수준의 발화(發話)를 결코 넘어서지 않으며, 자주 모호하며 열려 있다. 분명한 건 그가 정치, 이념적 상황이나 사회 부조리를 들춰내는 것만큼이나 실재와 무관한 관념적 사유에 붙박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배석빈은 어느 쪽에도 전적으로 귀속되어 있지 않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세계로 선뜻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자리로 선별된 세계를 호출하고 불러들인다. 그는 끊임없이, 그리고 때론 고통스럽게 자신의 구획을 실현하는, 까다롭고 예민한 경계인이며, 결코 손쉬운 가담자, 고분고분한 시민이 아니다. 그는 내부자, 수행원, 시키는 대로 하는 자, 음험한 가담자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다가서지 않는다.
배석빈의 조형언어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소묘와 색채를 넘나들고, 이미지와 그것의 거부 사이를 오간다. 형태는 현저하게 축약되고, 단순화된다. 굵고 뚜렷한 선이 형태에 윤곽을 제공하고, 흘러내리는 안료는 그 형태에 반투명한 톤을 부여한다. 형태는 형상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1993년의 「바깥세상」연작이나 「필운동 집」, 「안양교도소」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들 작품에는 단 하나의 퍼스펙티브가 존재하며, 이야기는 훨씬 더 서술적이다. 1997년 이후 점차 경직된 직선들은 자유분방하게 굽거나 뒤틀리고 흐트러진 톤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워지거나 해체된다. 그리고 그 위로 제스처, 몸짓, 곧 행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흘러내린 물감 위로, 역력히 의도적인 터치들이 중첩된다. 격한 표현과 내밀한 절제가 중층구조를 구성한다. 기하학적 질서와 표현적 아노미, 톤과 선, 원색과 모노크롬이 공존한다.
과정이 진행될수록 이 세계는 열린다. 의미는 확정되어 굳어지는 대신 더 개방된다. 판단의 기준은 모노크롬인가 색채인가가 아니다. 안료의 해체적 흘러내리기냐 형태의 투시도적 엄밀성이냐도 핵심사안일 수는 없다. 고전주의적인가 낭만주의적인가도 아니고, 진실인가 거짓인가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 내의 일체의 요소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개성, 곧 '그 자체성'이다. 진정한 예술적 개성의 특성인, 그보다 더 작은 요인들로 분해되거나 미분되지 않는 궁극의 존재성이다. 바로 그것에 의해 예술의 정신적 가치, 곧 이성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실리적인 여타의 인간 활동과는 다른 예술의 가치가 확보되는 개성!
2. 세상과의 비평적 마주하기 ● 하지만, 2008년 '생각의 무게'라는 주제로 가졌던 전시에 자신이 썼던 것처럼, 배석빈은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인식의 주체가 제거되는' 곳, '내가 소멸되는'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가장 우선 소멸되어야 할 나의 차원은 감각이다. 그리고 보는 이에게 즐거움과 활기와 재미를 제공하는 회화, 매혹적인 감상과 시선을 유인하는 자극에 바쳐진 회화를 내려놓는 것이다. 비만한 자아, 감각과 표현의 향연은 배석빈에게는 퇴폐요 향락이다. 피티림 소로킨(1889~1968)을 따르면, 그 막바지는 '이윤을 남기려는 의도'와 '후폐한 상업주의다. ● 그러므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배석빈의 회화는 자신에게 부단히 등 돌리는 그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 자신만의 세계라고 말이다. 여기서 형태는 현저하게 축약되고, 단순화됨으로써만 구체화된다. 이미지는 그 부단한 지워짐에 의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왜 지워짐인가? 그가 회화적으로 시도한 사유의 모델들은 대체적으로 "현재의 경험과 상식, 소통이 가능한 보편적이고 낮은 차원에서 구체화하는 데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기 뒤에 자주 지우기가 따라붙는 이유이고, 명료함이 그것을 교란하는 선의 난맥으로 덮이곤 하는 까닭이다.
배석빈의 2006년 작 「미술전문가를 위한 그림」은 그에게 '미술전문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 작품은 흰 종이에 무색의 엠보싱으로 쓰여지고, 위 아래와 좌우가 이중으로 뒤집어진 것으로, 마치 '읽기'가 아니라, 오히려 '읽기를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과의 비평적 마주하기'라는 배석빈의 접근이 잘 반영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배석빈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연한 중견의 작가다. 학문적 여정과 이후의 경력, 부단한 창작과 발표, 연배 등에서 부단히 그렇게 해왔다. 예컨대 지난 1992년 이후 그는 내용과 그 언어에 대한 지적이고 긴밀한 탐사와 관련된, 매우 일관성 있는 열한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의 통상적이고 관례화된 여정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만을 채택해 고유한 방법론을 추구해 왔다. 거기엔 우선 직업적인 화가라는 제도적 범주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거나,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소위 직업적인 평론을 의뢰하지 않으며 메이저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들락거리지 않는 것이 포함되었다. 전시도록은 간략한 브로셔나 우편엽서로 대체되었다. 자신의 행보에 대한 과장과 포장이 당연시되고, 화려한 카탈로그가 성공예감이 되는 시대에 그는 그런 욕망의 도상학과는 무관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 배석빈에게 화가의 소임이란 세상을 미화하거나 자신의 주체를 과장해 도덕적 교훈을 전하는 미의 사제가 되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자아를 현저히 줄인 채 기꺼이 세계로 조금씩 다가서는 것이다. ■ 심상용
Vol.20120321j | 배석빈展 / BAESUKBIN / 裵錫斌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