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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15_목요일_06:30pm
작가와의 대화 / 2012_0315_목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_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03 www.16bungee.com
기억, 감각의 아우라 - 김현정의 그림에 관하여 ● 이런 시대에 개별자 혹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나는 내 눈으로 세계를 보고 그에 관해 말한다는 것이 의미 있을까? 아마도 우리 시대의 구식 예술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회화와 같이 오래된 매체들은 그걸 증명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현정의 그림은 개별자로서의 화가가 개인적 체험,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세포단위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회화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모든 미술이 그렇듯이. 김현정의 그림, 풍경들은 순간적인 느낌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작가는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김현정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한번 기술해보자. 예를 들어 그림이 가장 단단해 보이는 밤의 학교 주차장을 그린 그림을 보자. 어느 날 밤 김현정은 창 밖을 본다. 학교 주차장이 보인다. 그 순간 김현정은 뭔가에 사로잡힌다. 김현정은 그것을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주차장 바닥의 노란 조명과 얼룩들이라고 말한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오래 전에 본 것 같고 동시에 완전히 새로우며 김현정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장면이다. 아우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했던 아우라가 바로 이런 현상이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시선의 교환 속에 아우라는 탄생한다. 아우라는 주체가 대상을 포획하거나 대상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물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교감과도 같은 사건이다. 아우라를 통해 대상은 수동적 객체가 되기를 멈추고 시선과 욕망을 지닌 새로운 주체로 탄생한다고들 한다. 어쨌든 이런 순간, 뭔가가 몸과 마음을 동시에 건드려와 오랫동안 몰입하게 하는 그런 순간. 물론 어느 개인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장면이 아니라 사소한 것일 경우가 많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진에서 말하는 푼크툼처럼 개인의 감각을 날카롭게 찌르는 것이다. 김현정의 그림에서 예를 들면 평창동 계단의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 예비군들이 있는 운동장에 비친 그림자, 파헤쳐진 공동 묘지, 어느 고가도로 앞 보도의 분위기 따위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다시 되풀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똑 같은 장소를 다른 날 같은 시간에 본다고 해도 그것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현정은 이 장면을 감각으로 붙잡으려 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분위기를 몸을 통해서, 움직이는 손에 쥐어진 붓과 물감으로 캔버스에 정착시키려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착이라기보다는 캔버스 위에 자신이 무엇을 보았던가를 기억해보고 다시 경험해보려 한다. 물론 이때 처음의 감각을 기억하기 위한 보조도구로 사진을 이용한다. 그래서 김현정이 그린 그림은 사진도 아니고, 사생도 아닌 어떤 기억이나 감정, 감각, 아우라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 기억의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것은 인상이지만 순간적인 시각으로 보는 인상이 아니라 마음에 찍힌 일종의 심원한 낙인과 같은 것이다. 그 낙인의 기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붓질을 쌓아올려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김현정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얇고 투명한 색을 겹겹이 쌓아올려 구축하는 것이다. 잘못 칠해진 물감들은 닦아 내고 다시 그리면서, 얇은 물감의 층이 쌓여 그림이 만들어진다. 바르트를 빌면, 여러 번 가필과 정정을 거쳐 아주 달라진 작품을 뜻하는 팔랭프세스트(palimpseste)가 된다. 사실 화가들은 붓질하는 시간 보다 무엇을 어떻게 칠해야 할까 생각하고, 망설이고, 배회하는 시간이 더 길다. 겨우 한번 칠했나 하면 다시 뒤로 물러서서 멍하니 그림을 본다. 왜냐면 그림을 그린 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혹은 보았던 것을 기계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본 것, 기억한 것, 그리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인 형태로 남아있지 않고 막연하다. 사진이 있고, 스케치와 밑그림이 있어도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기억을 돕기 위한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림은 사실 허망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게다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념도 아니고, 완전히 감각도 아니고, 감정도 아닌 - 신체 전체가 반응한 그 무엇이다. 이는 김현정의 경우뿐 아니라 제정신을 가진 대부분의 화가가 그렇다. 김현정은 아무것도 아닌 그림을 이렇게 열심히 그려서 뭘 하나 싶은 순간들이 있으며, 그래서 더 그림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말한다. 이 역설이 화가, 작가들이 가지는 딜레마이다. 화가들은 근본적으로 이게 뭔가 싶은 무망함과 허망함,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없는 욕망과 해야만 하는 당위성 사이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은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기억하는지를 탐색하고 추적하는 과정이다. 이는 시각적 소유와 기억과 육체의 복잡하고 미묘한 상호작용 사이에 있다. 바라보고 생각하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를 외나무다리처럼 잇고 있는 이것들을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는 “Making and Matching”이라고 불렀다. 쉽게 말하면 그리는 과정, 결과와 그려진 대상을 비교해보기. 그러나 이는 단순하지 않다. 무엇을 그리려는 지는 늘 불확실하다. 그리는 대상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그리는 사생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사생조차도 어느 순간 대상을 떠나 그림, 즉 눈앞의 실재하는 이미지가 화가의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로 변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가들은 그 변환된, 붙잡을 가망 없는 이미지들을 붓을 들고 추적하는 것이다. 모든 회화, 그림은 현재형이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깨닫는 것은 그것이다. 지금 붓을 들어 그리는 순간에 그림은 늘 새로운 그림이 된다. 풍경이라고 해도 풍경은 지각 이상의 것들이다. 요약해보면 김현정은 어떤 특정한 순간 특정한 장면에 관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의욕을 느낀다. 이 이미지화의 욕망은 이미지의 소유가 아니라 대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증명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감각, 감정, 정서가 이미지로 전환되기 위해 화가의 육체와 손이 필요하다. 폴 발레리(Paul Valery)가 말했듯 '화가는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우리 앞에 현존하고 있는 사물의 성질, 빛, 색, 깊이 등은 오직 그들이 우리의 신체 속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켜 놓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신체는 그들을 환영하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림이라는 것이 사실은 신체의 연장이며 교환의 체계라는 것을 일러준다. 김현정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가 그린 풍경은 자연, 사물이자 동시에 자신인 것이다.
김현정의 그림은 지금까지 집요하게 자신에게 낙인을 찍은 사물과 풍경을 추적해 왔다. 그 추적의 길은 느리고 더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림을 본격적으로 처음 그리려던 고등학교 시절 나무를 그린 경험과 만나게 된다. 김현정은 그림을 그릴 때 마다 나무가 달라 보인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왔고, 그 때 느꼈던 나무의 존재감이 자신을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이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드문 일이지만 김현정은 그림을 그리는 순간 자신이 뭘 할지를 거의 결정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김현정이 그린 그림들 모두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경험들을 잘 구축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 그림들은 프로세스에 비해 나무의 존재감이 부족하고, 안개 낀 바다나 냇물 그림들은 뭔가 싱겁다. 아마도 그것은 촉각적 느낌이 부족한 막연한 대상이라서 그럴지 모른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걸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현정이 그린 풍경들은 아주 일상적이고 특별한 의미가 없는 순간들이다. 더구나 그녀가 그림 전체에서 주목하는 것은 화면에 담긴 극히 일부이다. 나머지는 그것들이 존재하게 하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림은 그런 그녀의 의도를 배신하거나 뒤틀어 버린다. 예를 들면 예비군이 모여 있는 운동장을 그린 <어떤 그림자들>의 경우 김현정이 그리려 한 것은 앞쪽의 운동장에 깔린 그림자들이 주는 그 무엇이지만 그림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오히려 산만한 예비군들의 집합이나 그 뒤의 흰 건물 벽의 존재감이다. 그리고 사실은 이런 것들이 그림의 핵심이기도 하다. 왜냐면 그림이라는 것도 마치 자연처럼 화가가 전체를 잘 통제했다고 믿지만 언제나 의도를 거스르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없는 그림은 오히려 무의미해진다. 화가의 통제와 통제를 거스르는 물감, 캔버스, 붓 따위의 물질들과 싸움이 그림에 긴장을 주는 것이다. 이는 그림이 화가의 마음과 육체 사이의 길항의 결과라는 점과 더불어 화면을 일종의 전장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전장에 몰입하는 순간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지, 뭘 하는지를 잊는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는 '오직 화가만이 자기가 보는 것에 대해 평가해야 할 의무를 일체 지니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다. 화가에 있어서는 지식과 행동의 표어들이 그 의미와 힘을 잃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라고 한 것이리라. 김현정은 자신의 경험을 천천히 시각화 해왔다. 회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뭘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 왔는지에 대한 확신과 존재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 길은 한 개인이 세계에 대해 할 수 있는 전부에 가깝지만, 동시에 전부가 아니기도 하다. 왜냐면 그림, 혹은 이미지들이란 아무리 개인적이고 싶어 해도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의 말대로 시간을 두고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실어 나르는 개별적 운반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 김현정이 할 일은 자신이 도대체 무얼 실어 나르고 있는지에 대한 뒤돌아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물론 아니어도 상관없다. 우리 시대에 회화와 같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시대적 당위보다 개인적 필연이 먼저일수도 있으므로. ■ 강홍구
나는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가 없는 평범한 장면을 선택한다. 대부분 늘상 보지만 특별히 인식되지 않던 장면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감각에 몰입하게 되고 '정말로 보게' 된다. 이는 매우 감각적 경험이고 이전과는 다른 '존재감'을 인식한다. 예를 들어, 집 근처에 흐르는 개천을 매일 보지만 지나고 나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녹초가 낀 녹색 빛의 물을, 햇빛에 빛나는 하얀 돌들을 '정말로 보게' 된다. 그것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고 대상의 촉감, 질감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 짧고 강렬한 순간으로 인해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계속해서 그 장면을, 감정을 다시 보도록 내면으로부터 '강요' 된다 ■ 김현정
Vol.20120315c | 김현정展 / KIMHYUNJUNG / 金玹靖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