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기창_박생광_이응노
관람시간 / 10:30am~08:00pm / 백화점 휴점시 휴관
롯데갤러리 본점 LOTTE GALLERY 서울 중구 소공동 1번지 롯데백화점 본점 12층 Tel. +82.2.726.4428~9 www.lotteshopping.com
롯데백화점 본점 롯데갤러리에서는 2012년 새봄을 맞아 김기창, 박생광, 그리고 이응노의 작품을 선보이는 『꿈을 품은 화가들 : 한국미의 재발견』展을 개최한다. 본 전시는 한국이 낳은 걸출한 세 명의 대가들을 통해 현대 한국화의 전개과정을 짚어보는 전시로써 한국이 안고 있는 역사적인 트라우마, 전통과의 긴장관계, 한국인의 디아스포라가 과연 그 시대를 헤쳐 나온 김기창, 박생광, 이응노의 작품세계에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전시다. 아울러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점은 전시에 출품된 모든 작품들은 한 소장자의 오랜 콜렉션으로 개인의 미시적 관점과 취향이 '전시'라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힘을 얻고 객관화, 표면화되는지 또한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장승같은 외모에서 풍기는 위엄과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 매무새, 해학적인 재치와 특유의 침묵은 운보 김기창 화백(金基昶, 1913~2001)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었다. 화백을 만난 사람들은 그 당당한 위용에 호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7세 때 청각신경이 마비되어 후천성 귀머거리가 된 비극적 이야기나 당시 촉망받던 엘리트 일본유학생이자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여류화가로 결코 운보에 뒤지지 않을 만큼 선구적인 위치를 점하는 우향 박래현과의 사랑과 결혼은 마치 드라마 한편을 보는 듯했다. 이 금슬 좋은 부부는 십 수번의 2인전을 열었으며 서로 선의의 경쟁과 영향을 끼쳤다. 우향의 7년간의 미국유학 동안 혼자 네 명의 자녀들을 돌보았던 김기창 화백은 74년 귀국의 기쁨도 잠시, 76년 암으로 부인의 임종을 지키고 만다. 자신의 절대적인 지지자이자 선의의 경쟁자였던 우향의 이른 죽음으로 인한 깊은 상실에도 불구하고, 후세 작가의 가장 전성기이자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 바보산수는 바로 이 때 맹렬히 쏟아져 나왔다. 아픔과 고난을 이기고 평소 그가 꿈꾸었던 일탈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 바로 청록산수와 바보산수 시리즈였기에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열광할 수 있었다.
고암 이응노 화백(李應魯, 1904∼1989)은 어떠한가. 1977년 백건우, 윤정희 음악가 부부가 유럽에서 북한으로 납치될 뻔 한 사건이 터졌을 때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에 이응노 부부가 연루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미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라는 미명 하에 간첩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치렀던 화백에게는 6.25때 잃어버린 큰 아들을 그리워한 죄밖에 없었다. 1958년 지필묵으로 세계의 화가들과 겨루겠다고 프랑스 파리로 떠난 후 그림그릴 재료는커녕 집세와 양식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매일 쓰레기통을 뒤져 신문, 잡지를 주워다가 잘게 찢고 풀에 이겨 캔버스에 촘촘히 붙여나갔다. 그렇게 치열하게 자신의 '문자추상'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예술혼으로 국내외에서 꾸준히 인정받으며 이름을 떨치게 되었어도 정작 고국의 전시회에는 작가 없이 그림만 걸렸으며, 한때는 완전히 빨갱이, 간첩화가로 낙인찍혀 우리나라 화랑에서는 그의 그림을 취급하지 않겠노라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1989년에서야 비로소 작가의 대규모 전시회(호암갤러리)가 성대하게 열렸는데, 그 전시회가 열린 바로 다음날인 1989년 1월 11일, 파리의 작업실에서 작가는 심장마비로 별세하게 된다. 죽어서야 고국을 밟았을까.
한편 화려한 오방색으로 그 누구보다 개성 강했던 내고 박생광(朴生光, 1904~1985) 화백. 이슈의 중심에 있었던 운보 김기창 화백이나 이응노화백과는 정반대로 155센티미터의 단신, 마른 체구에 장난기 어린 표정의 박생광 화백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특히 그의 가족이력에 대해서는 단지 내고의 선친 박기준이 동학란에 참여했다가 상하이로 피신했다는 것뿐인데, 이 역시 자신의 자필 연보에 적혀있을 따름이다. 해방 후 한국 진주에 30여 년 머무는 동안 그의 방랑벽은 별나도록 유난했다. 사전에 전혀 기척도 없이 집을 나섰을 뿐 아니라 입은 채, 신은 채 집을 나서 한 해의 절반은 집을 비웠고 돈이 생겨도 가정에 한 푼 보태질 않았다고 한다. 술처럼 평생 남 도와주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친구의 일본 유학을 위해 거금을 투입하고 옷이 없는 친구에게 옷을 지어 준 것이라든지, 이중섭의 전람회를 열어주고 작품이 팔리지 않으니까 노자까지 보태준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는데, 그렇게 술을 좋아하면서도 결코 그림을 그릴 때는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말년에 후두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1985년 7월 18일 운명할 때까지 한사코 붓을 놓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말리면 몰래 화실에 들어가 작업을 계속할 정도로 예술혼을 불사른 한 시대의 위대한 장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태생적 한계, 지역적 한계, 그리고 역사적, 정치적 장애로 인한 활동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며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당 김은호 선생의 문하에 있던 김기창 화백은 일찍이 선을 없애고 채색으로 면을 표현하는 일본식회화기법으로 엄격한 사실묘사를 주로 사용했다. 1945년 해방은 과거 일제의 영향을 지독히 흡수한 동양화에서의 일탈이었다. 그 울타리를 헐어내듯 자신의 아호 '운포(雲圃)'를 '운보(雲甫)'라고 고치며, 동양화의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 그는 형태의 분할과 재구성 작업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바구니 여인들」처럼 반추상의 입체파적인 작품을 이루어간다. 그의 추상작업은 다시 물감이나 수묵의 번짐, 뿌려짐 등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따라 비형상, 또는 반형상적인 화면을 시도해 간「붉은 꽃」이나「문자추상」에까지 이른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풍채처럼 강한 필력과 정확한 필선, 다양한 용묵의 기량을 한껏 살린 '묵화의 강한 선' 계열의 작품들을 병행한다. 묵화의 강한 선은 다시 청록색 산수의 거칠고 굵은 주름을 이뤄「청록산수」를 탄생시켰고, 이윽고 민화의 소박한 세계와 만나며 어깨에 힘을 뺀「바보산수」,「바보화조」의 경지로 이어진다. 본 전시에 선보이는 운보의 청록산수 중 「수성동」을 비롯한 2점과「바보화조」,「바보산수」는 각각 선생의 수작으로 그 시대의 익살과 일상의 해학이 담긴 운보예술의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응노 화백 역시 김규진 선생에게 사사받으며 스승의 그림을 본받아 산수, 인물, 화조, 사군자를 두루 익혔고 대나무그림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본 전시에서는 1910년 '죽사'라는 호로 그렸던 대나무그림과 1930년 이후 '고암'이라는 호로 그렸던 대나무 그림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두 그림이 비슷해 보이지만, 후자는 스승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경험하고 그려 낸 대나무로 그 때의 깨우침에 더하여 호까지 '고암'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해 준 그림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급격히 바뀌는 한국근대사의 모습을「시장가는 날」,「소풍」과 같이 길거리 모습이나 산동네 판자촌풍경, 일하는 모습 등 그 자리에서 얻은 느낌을 솔직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냈던 그는 1930년대 유영국이나 김환기가 이끄는 추상화의 새로운 경향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사람이 한국인의 눈으로 자연이나 물체, 사람들의 모습을 똑똑히 파악하여 생생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믿었다. 1950년대 이후로 제작된「향원정」이나「풍경」은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반영되는데, 앞에 엉켜있는 나무나 넝쿨을 춤추듯 생략된 선으로 표현했는데, 선들이 얽히고 설켜 재미난 율동감을 자아낸다. 이렇듯 이응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 그림으로써 반추상화를 완성시킨다.
역사적 상처로 보자면 이응노 화백처럼 부침이 많은 작가도 없을 것이다. 전쟁 통에 잃은 맏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을 속으로만 삭이며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창작만이 유일한 위로였다.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1958년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프랑스로 향한 그는 마치 글씨 쓰는 듯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 그림들은 때로 상형문자나 글씨같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꼭 사람처럼 보이기도 해서 두 어명이 어깨동무나 춤을 추는 것 같아 보였다. 이를 문자추상이라 했다. '동양예술과 서양예술을 잘 만나게 한다. 서로 훌륭한 점을 조화시킨다'는 평가는 항상 그를 따라다녔고 서양의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한참 왕성한 활동 중에 두 번에 걸친 고난, 즉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으로 인한 옥살이와 '백건우, 윤정희 납치미수사건'의 누명은 오히려「문자추상」을 완성시켰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여럿이 서로 어울려 사는'「군상」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어떤 사람은 그의 군상을 보고 반핵, 반전운동을 벌이는 군중 같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어서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이응노의 말년을 대표하는 군상시리즈는 남녀노소, 생김새나 빈부를 따지지 않고 서로를 위하고 감싸며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기를 원했던 노화가의 인생과 지혜, 그리고 철학이 녹아있는 것이다.
1985년 예정된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살롱 초대전을 위해 한방에 가득히 그림을 펼쳐놓고 그림 한복판에 쪼그려 앉은 채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색 위에서 강약을 조절하며 붓을 휘두르던 박생광 화백의 모습을 지인들은 마치 신들린 모습과 같았다고 회상한다. 1920년대 오치아이 로우후우(1896~1937)의 문하에 들어가 근대 일본화를 익힌 박생광은 스승으로부터 화면을 평면화 시키고 원근감을 색채로 표현하며 맑고 밝은 색채를 쓰는 화풍을 익힌다. 또한 고우쿠라 센진의 초수사에 기거하면서 현대 감각의 일본화와 강렬한 채색, 불교 벽화제작의 스케일과 색감들을 접하며 배웠다. 젊은 시절, 오랜 기간 일본에서 생활하고 화가의 입지를 다졌던 박생광 화백은 1945년 귀국 후 7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국내에서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해방 당시 민족감정이 팽배해 지면서 일본에서 귀국한 많은 채색계열 화가들은 수묵으로 돌아서거나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환하게 되는데 일본에서 한참 인정받던 화가 박생광 역시 귀국 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수묵화나 화조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70세가 넘는 1973년까지 지속된다. 그러다가 71세가 되던 1974년, 일련의 일본화풍과는 전혀 다른, 한국적 회화로의 중대한 변신을 꾀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1974년 작품인「호랑이」는 그러한 박생광의 변화의 시작을 알린다. 한국민화를 바탕으로 그린 호랑이의 해학적인 모습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노화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이후 일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던 한국적인 전통소재들, 즉 민화, 단청, 장승 등이 강렬한 원색의 대비, 묵과 같은 색감, 원시적 생명의 열기와 신명을 표현해 내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무당, 무속, 그리고 샤머니즘에 이르는 주제로 작품이 이어지는데, 본 전시에 소개되는「신선도」,「장승」,「탈과 학」이나「목불」,「십장생」등은 80년대 그의 말년작으로 2미터~3미터에 이르는 대작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특유의 강렬한 원색이나 한국의 정신과 얼을 조형화 한 수작秀作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살피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믿는다.
김기창, 박생광, 이응노 모두 일제시대에 교육을 받고, 동양화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작가들이다. 모두 동양적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각자 특유의 실험정신을 가미하여 독특한 회화세계를 전개해 나갔다. 오늘날 이들이 존경받는 까닭은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능력과 재주를 가져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질을 믿고 그것을 차근차근 키우고 거기에 꿈을 불어넣어 어엿하게 자기 영역, 자기 세계를 일구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 명의 거장이 한 곳에서 3인 전을 하기는 근래뿐 아니라 전례에 없던 일로 기억된다. 간혹 판매를 위한 작은 규모의 전시가 있었을 뿐이었으리라. 한 장소에서 세 대가의 초기작부터 각 시대별 마스터피스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린 것은 순전히 한 명의 꾸준한 걸음과 노력, 그리고 안목 때문이다. 20대 후반부터 한 점 한 점씩 모으기 시작했다는 피정환 대표는 작품 한 점을 구입하기 위해 수 일, 수개월, 또는 수년의 시간과 발걸음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세월, 오로지 '좋다'는 이유로 공들여 모으기 시작한 작품들이 어느덧 일정 수준의 콜렉션을 이루었고, 이 자리에서 그 첫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축재(蓄財)의 수단으로 여기는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과 매스컴의 보도로 인해 '그림을 소장한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호도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리지 않고 소신 있게 전시로 선보인다는 것 역시, 자신의 소장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신감의 방증일 것이다. ● 자, 이제 고난과 역경을 위대한 예술로 승화시킨 세 대가들의 꿈, 그리고 그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고 발품 팔아 모은 소장품으로 하나의 전시를 완성시킨 소장자의 꿈을 이곳에 펼쳤다. 부디 관람하는 모든 분들이 롯데백화점 본점 롯데갤러리에서 마련한『꿈을 품은 화가들 : 한국미를 찾아서』展을 통해 각자 하나씩 또 다른 품을 품고 돌아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울러, 다시 한 번 이번 전시를 위해 기꺼이 작품을 내어주신 피정환 대표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 롯데갤러리 본점
Vol.20120314m | 꿈을 품은 화가들_한국미의 재발견-김기창_박생광_이응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