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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갤러리 담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월~토요일_12:00pm~06:00pm / 일요일_12:00a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갤러리 담에서는 자화상 주제로 얼굴작업을 하고 있는 박진홍 작가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2000년에 시작한 첫 전시 이후 이번 10번째 전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해 왔던 얼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일찍이 많은 작가들이 자화상을 그려오고 있다. 반 고흐의 경우에도 43점이나 되는 자화상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 자화상에 나타난 작가의 고뇌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진홍의 자화상에는 명확한 얼굴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두운 심연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두텁게 텃칠한 그의 붓 자국에서 느낄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심연에 있는 자아를 바라다볼 수 있는 이번 전시에는 자화상시리즈 12점 가량이 선보일 예정이다. 박진홍 작가는 중앙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며, 이번이 10회 개인전이다. ■ 갤러리 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그러나 개인적 감정의 영역 '얼굴' ● '어둠이 엄습하고 방향을 지시하는 나침반조차 떨림으로 그 의식을 잃어가는 순간, 불현듯 어디론가부터 온 거친 짐승의 숨소리는 모든 것이 명멸하는 장소에서 엎드려졌다. 고요의 공간, 하나의 유성이 사선을 그으며 지치고 불안한 영혼에게 다시 새로운 희망을 불 붙인다.' 우리 몸 가운데 얼굴은 정의할 수 없고 수수께끼 같은, 인간 내부 깊은 곳의 감정곡선을 수 없는 흔들림으로 드러내는 사유의 영역이며, 상징적 의사의 표시를 담고 전달하는 무의식과 의식 사이 교환의 장소이다. 우리의 사고와 정서 그리고 가치관은, 종종 음성언어보다 얼굴에 잠시 정박했다 떠나는 표정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곤 하는데, 이 즉각적인 의사 전달방법은 지극히 정확하며 우리 내부적 감정변화의 부정확함을 명쾌함에 이르도록 안내한다… 사람의 시각은 너무 작거나 큰 것을 보고 인식함에 있어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다. 이보다 우리가 더 힘겨워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여 투영해주는, 은판(거울)에 비친 자아를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것임을 고백한다. 여기 이 자아성찰과 실존에 대한 거대한 철학적 주제에,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존재의 실체를 정면으로 대결하고자 무한한 이미지가 표류하는 화면에, 가느다란 예술가의 '육의 손'과 '마음의 손'으로 감정을 담은 색채를 다스려 골격과 핏줄 그리고 살을 붙여 그리는 작가 박진홍이 있다.
그의 시각적 행위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한 '생명의 실체'와 '본질'을 호출하여, 우리에게 소개하므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직시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선택하기보다는, 그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내부의 감정을 그리는 행위과정을 통하여 고도로 함축된 시각적 실상으로 사유의 장에 부상시키고 있다. 2차원의 화면에 점과 선 그리고 면을 통해 인간실존에 대한 사유를 박진홍은 그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의 이미지를 화면 위에 등장시켰다. 이러한 시각적 행위는 그 자신이 호흡하고 살아있다는 존재가치와 삶의 의미를 인정하는 최소의 반응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식하고 있는 자아와 그렇지 않은 것 사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환경'과 '차원의 영역'에서 꿈틀대는 감정의 세포가 존재하는 생명체로 자신을 자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 그의 화면을 살펴보자! 우리 놀란 눈앞에 등장한 얼굴의 인물은 지금 막 어둠을 헤치고 나온 불안한 눈동자의 작가 그 자신이다. 검붉게 변한 피부는 아직 미지의 어둠에 있을 때 보았던 놀람에 경직되어있는 듯 흥분되어있다. 이제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야기하려 하는 듯 조급해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이미 알고 있으니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만 잊어버리기를, 간곡히 바라는 의미의 태도로 그의 작품 속 대상에게 부드럽게 권고하며 위로하듯 동조의 마음표현을 보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시간의 한계 속에서 잊혀지고 지워져 버릴 수밖에 없는 불안한 존재임을 암묵적인 동의 하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한 예술가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인간 세상'에 놓인 '거친 짐승'인 것 같이 생각되어지는 오늘날, 박 진 홍은 이를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오늘도, 늘 그랬듯이 자신의 모습을 담는 자화상을 하얀 화면에 그리고 있다. 아니 본래 화면은 어두웠고 그는 이 어두움을 닦는 행위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진홍의 시각언어가 펼쳐지는 장소는 그의 몸과 감정의 교류가 합일되는 지점이다. 이 영역은 이제 작가가 그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드러내는 하나의 확장 된 '다른 자아의 대지'이다. 이 존재는 선과 면의 교차와 긴박감 그리고 잠재성과 우연성 사이의 흔적들로, 화면 위에 표현되었다가 지워지는 이미지의 순간을 보도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 작가는 의도된 행위가 탄생시키는 선과 형의 구현을 통한, 대상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내면적 형체에 집중하면서 그 틀 안에서 자유로운 방법적 유희를 즐긴다.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가는 시각적 행위는 색채와 붓의 흔적이 화면을 구축하여 간다. 이 과정은 우연과 필연의 연관성을 통해 드러나는 화면의 시적 리듬으로, 그 자체로 강한 메타포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는 이성적 논리가 아닌 감성적 논리로 박진홍의 회화적 표현 방식으로 채택되고 있다. 그의 화면에 나타난 형상은 이성과 감성이 교차되는 행위의 흔적과, 그 두께에서 발생하는 진동과 확장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 '사실의 실체'로 등장한다. 더불어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사이를 유추해가는 행위처럼 이미지의 존재를 통해, 저 미지의 인간사고 영역 밖, 내면을 밝혀내고자 하는 그의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인간 몸의 의미와 움직임 그리고 자연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인간의 이해를 말하고 있다. 몸과 자연세계는 반발과 융합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실존과 진의의 존재방식이 확보된다고 보았다. 즉 몸이 자연세계에 적응해가는 과정 중에, 몸은 차원의 세계 중 한 부분인 현실에 맞추어져 가면서 한 유형적 형태로 자리하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자연세계는 몸을 사회화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세계에 대한 경험은 하나의 형식적 습관이 되어 몸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 박진홍이 그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던 '자화상'연작을 다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지난 시간, 그의 작품 속 이미지가 잡을 수 없는 자신의 실체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미지는 현재를 포함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까지도, 이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관조적인 한 예술가의 얼굴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무엇으로 살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에 대한 실존과 성찰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작가 박진홍은 그의 시각적 행위를 통하여 인간실체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핵심에 도달하고자 치열하게 의혹과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박진홍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자유' 속에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현재, 그에게 오히려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점유해오고 있다고 불편하게 고백하고 있다.
샤르트르는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자유'에 근거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유를 동반한 삶의 선택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숙명적인 부담을 동반하는데, 인간에게 있어 자유는 어떠한 행동결과에도 그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도 예외 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접근법과 방법론적 사유를 통하여,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예술가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존재를 성찰하고 세상과 그 자신을 알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박진홍도 바로 실존을 찾는 분명한 답을 동반한 질문에 봉착해있었고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확인하고 이해한 것은 그가 화면에서 존재의 가치와 본질과 같은 무거운 주제에, 어떤 답을 이끌어오는 질문이나 세련됨 그리고 완벽성을 찾으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무엇인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도나 행위는 부제하고, 오직 그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기만을 부탁하는 눈빛으로, 그 앞에 마주한 그림 속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고요하고 초연한 모습만을 우리는 느끼고 있을 뿐이다. ■ 구기수
시절을 살아오면서 나의 작업의 첫 소절은 지독하리 만큼의 자신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것이리라.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도 알아내기 힘들었고 부질없음을 미처 깨닫기도 전, 심연을 헤집고 다니는 끝 모를 순간과 정체를 거듭하면서 나의 작업은 짧지 않은 시간을 행보해왔다. ● 온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나의 존재방식과 의미를 찾으러 나의 성찰에 대한 흐름을 위해 나는 캔버스와의 긴 사색과 사투의 시간을 지내며 나의 의문점이나 귀결방식을 나름대로 회화의 진면목과 일치시키려 노력해왔다. 명쾌하지 않은 의식의 정체성을 밝히려 많은 시간들을 진부한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고 혹은 혼란 속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기도 하며 혹은 붓질 위에 나를 온전히 맡겨보기도 했다. 이미 의식과 무의식, 모든 의식과 나의 의지가 접근하지 못하는 내가 있음을, 자유라는 짐의 무게에 눌려있는 나 자신을 미련하게도 늦게 깨닫는 듯하나 아직도 여전히 나는 촌스럽게도 이 자리에 남아 있으려 한다. ● 나의 의식과 현란한 현시대에 비하면 케케묵은 붓질만이 나를 완성시키기에 알맞다는 생각은 '오로지 나일 수 있는' 가장 근접한 방식이라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 시간 속의 난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는' 개인적 표현에 대한 열망의 방법적 모색으로 그간의 작업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왔으며 이제는 조금씩 '나' 또는 '타인'이 갖는 일인이 갖는 익명의 성찰들이 지루한 내면의 대화를 넘어서 나의 의식과 사유만이 나의 존재를 입증시켜주는 것이 아님을 근재(根材)로 하는 이야기로써의 접근도 조심스럽게 내비치려 한다. ● 불충분하지만 채우려 하지 않고 일부러 드러내려 하지 않는 실존(實存)이야말로 내가 가진 지극한 실존이며 결정되어지지 않은 많은 실존들로 하여금 현시대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나에게 작업의 의미는 스스로에게도 큰 거름목이 될 것이다. ■ 박진홍
Vol.20120314b | 박진홍展 / PARKJINHONG / 朴鎭鴻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