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The K Gallery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am~06:00pm
갤러리 더 케이 GALLERY THE K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Tel. +82.2.764.1389 www.the-kgallery.com blog.naver.com/gallery_k
아이러니스트의 서가 – 역설과 이중성의 장면 ● 인적이 드문 곳에서 세속의 삶들이 지분대는 도시 한 가운데로 작업실을 옮기는 중에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우는 다비식을 3박 4일 동안 치렀다. 떠남도 멈춤도 이별도 정지도 없는 모든 흘러감을 일시적으로 묶기 위해 죽은 자(것)와 산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별리(別離)의 의식은 망각과 재생을 위한 것일 텐 데, 그 모든 무상함(의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극적)의식을 치른 자가 며칠 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무엇을 겪었고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뭔가 다른 것, 지금껏 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그에게 이미 있었던 것을 기꺼이 감행하기로, 대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리라. 작가는 다시 시작하기로, 자기를 지우고 다시 생겨나기로 약속한다. 그가 화면에 마치 최초의 시작인 듯 '세우고' 자신의 버팀목으로 의지한 것은 서가(書架)이다. 세상을 사는 것과 세상을 읽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였을까. 근대는 읽는 것에 헌신한/매몰된 자들의 시대이다. 세상을 사는 데 읽기가 무용했던 시절 '시각'은 절대적 감각이 아니었고 인간은 여타 다른 동물과 상당히 유사했을 것이다. 시각이 절대화되고 인식과 앎에의 욕망이 요구되면서 탄생한 '인간'의 서가는 인간적인 세계의 크기를 과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읽는 자는 무지(의 무능)에 대한 공포를 강요당한 자이고, 읽는 자는 지성이 세계와 동시에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확신하는 신경증적 주체이다. 책을 통한 세상의 전유는 심지어 세계보다 세계에 대한 표상이 더 우월하다는 자만심/낙관을 깔고 있다. 삶은 책 뒤로 물러났거나 책 속으로 포획되었거나 책 너머로 숨어들었다. 책을 읽는 자는 그럼에도 책에 세상이 있다고 책과 세상이 똑같다고 믿는/착각하는 자이다. 책은 세상을 반복하면서 은폐하고 세상을 가리키면서 세상을 살해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이다.
책의 집/무덤, 서가. ● 이미지로 세상을 재연/재현하는 작가는 책의 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예술은 지성에 대한 비판이며 감각의 집요함이며 (근대적)인간의 궁핍에 대한 증언이라는 근대적 선언은 예술이 지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작가는 읽되 그 읽기가 감각의 힘을 파괴할 만큼 지성에 가까워도, 감각의 논리가 구성될 수 없을 만큼 광기에 접근해도 안 되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광기와 지성 사이에서 광인의 상태를 갈망하는 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지성의 견제력일지 모른다. 예술가를 광인으로 묘사하는 일은 근대에 흔한 일이었으니. 따라서 예술가는 책에 대해 양가적이다. 읽는 자는 감각을 지성화하는 데 능숙하고 예술가는 자신의 광기를 형식에 가둠으로써 경계 없이 날뛰는 광인과는 지위를 달리한다. 예술가는 읽되 다르게 읽어야, 비스듬히 읽어야 하는 자이다. ● 새로 옮긴 인가(人家) 안 작은 작업실에서 일년 간 그가 서가와 벌인 '전투'는 조금씩 그 양상을 달리했다. 우선 작가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촘촘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배경으로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한국어판 겉표지를 병치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동시대에 들뢰즈만큼 예술가들을 매혹시키는, 예술을 위한 철학자로 거론될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인간을 위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이 부재하는, 인간이 사라진 풍경을 만들려는 반(反)-근대적 인간 들뢰즈의 사투는 곧 예술을 위한 싸움이었고, 그렇기에 들뢰즈는 예술가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근대적 아카이브였다. 들뢰즈를 읽지 않아도 예술가는 이미 들뢰즈-되기를 육화시킨 인간 유형일 텐 데, 박사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문이나 이론서를 접했던 작가에게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들뢰즈를 읽어야 한다는 압박은 들뢰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낳았을 것이다. 독해가능성과 독해불가능성이 중첩된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은 작가에게는 읽기의 공포와 매혹이 중첩된 장면이었다. ● 앎의 탐욕과 무능에 대한 비판이면서 읽기의 희열(jouissance)을 증언하는 텍스트를 시각적 이미지로 선택하는 최초의 장면 뒤에, 작가는 미군부대 내 도서관에서 경험한 일화를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작가는 '닭 생산Poultry Production'과 '커서 나는 ..이 될거예요When I grow up I want to be a...'란 제목이 닭과 송아지 이미지와 병치된 책의 겉표지를 서가 위에 중첩시킨다. 근대적 이념/이데올로기로서의 '생산'은 생산 제품이 닭이란 생명체가 되면서 작가에게 낯선 공포와 기이함을 유발시켰고, '커서 나는 ..이 될거예요'란 아이들이 쓰는 문장이 송아지의 말이 되면서 우스꽝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외국어의 이질감, 인간과 가축, 언어와 이미지의 기괴한 충돌이 갖고 온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연상들을 가시화했다. ● 이제 화면 속 서가는 현실적인 서가가 아닌 작가가 상상으로 구축한 비현실적인 서가로 바뀌어간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인용한 서가가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 상태가 투사된 서가로 장면을 전환한다. 책 제목이 거의 '무감각한 사회'로 통일된 서가에 작가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수평으로 병치시킨다. 흥미로운 것과 에로틱한 것, 신기한 것에 몰두했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게르니카」라는 지명으로 고발했었다. 아이같은 피카소가 현실의 비극에 진지함으로 반응한 결과물인 「게르니카」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치적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감각한 사회'라는 책 제목과 '감각'의 산물 게르니카 이미지의 병치는 향수병, 미니어쳐 소품들, 그 외 평범한 인테리어 소품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모호한 맥락으로 들어간다. 그는 진지한 발언을 애써 가벼움과 경박함, 천진함의 이미지로 덮으려 한다. 덧없이 휘발하는 삶의 찬란함과 허무함을 상징하는 향수병들, 아직 삶의 비극에 노출되지 않은 이들의 장난감, 애써 삶의 무거움을 외면하는 소품들은 전쟁의 참극을 재연한 '피카소'를 하나의 실내 장식품의 지위로 추락시키면서, 작가 스스로의 진지함 마저 희화화해버린다. 이는 비극과 소극(笑劇)이, 진정성과 허세가 극단에서는 하나로 겹친다는 것을 '본' 자의 '반성'과 관련이 있을 것인데, 말하자면 작가는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감정이나 인식에 확신을 갖고 몰입하지 못하는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나르시스트가 아니며,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자이며, 몰입과 초연을 동시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자이다. 몰입은 비지성적이고 초연은 무감각적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몰입하는 자신을 동시에 보는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사물과 인간의 진실을 상호모순적인 역설의 상태에서 찾아내려는 자이다. 변증법적 종합이 불가능한 모순의 상태에서 사물과 세계의 느낌을 유지하려는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는 지나친 진지함, 지나친 이성, 지나친 대립으로는 삶의 진실이 드러날 수 없다는 이유에 근거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진지하면서 희극적이고 몰입하면서 초연한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모호성, 양가성, 역설을 실천하면서 일관성, 인과성, 정합성, 종합과 같은 근대적 인식론을 전복시킨다. 아이러니스트는 결론을 내리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동시에 두 가지 상황을 보려는 중에 장면을 열어놓는다. ● 작가는 도덕 혹은 윤리에 대해 역시나 양가적이다. 작가는 교육자였던 아버지를 존경한다. 이것은 흔치 않은 경험인데, 교육자가 곧 아버지이고 그 둘이 중첩된 존재를 아들-학생이 존경하기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이는 예술가에게는 곤궁을 만들어내는데, 예술가는 동시대의 상식과 규범이 어떻게 욕망과 성을 억압함으로써 가능해지는지를 '고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반-도덕적이기에 반-시대적이라는 일종의 예술의 규범과 아버지-살해를 실현하지 못한 아들의 무능은 작가의 화면에서 묘한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 현실에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가져야할 윤리적 덕목을 압축한 공자의 사자성어를 시각화한 「인의예지 仁義禮智」는 아버지-법을 위반해야하는 아들-예술가의 어려움에 대한 장면이다. 규범에 대한 위반을 미적 형식으로 승화시키는 예술가로서의 작가는 아버지-법에 대한 공포와 매혹을 「인의예지」의 풍경에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상태로 담아냈다. 한자 인, 의, 예, 지를 책으로 형상화한 장면은 그 사자성어가 자신을 얼마나 괴롭힌 '아버지'의 말씀인지를 구체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그 사자성어에 갇힌/반복하는 도덕적 존재도 그 사자성어에 혐오감을 갖는 부도덕한 존재도 못된 작가는 이번에도 자신의 도덕적 모호성을 유아적 소품들을 통해 드러낸다. 장난감 주사위, 미니어쳐 용, 양, 기린, 기차, 소방차, 불상, 비밀(욕망의 기표들)이 가득한 가방, 미니어쳐 화분, 등등은 어른들의 삶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는 도덕적 규범을 하나의 농담으로 재배치시킨다. 작가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가볍게 만들면서 아버지를 벗어버리려고 한다. 그는 다 큰 아이처럼 아버지-되기에서 슬쩍 미끄러진다.
「PEEP」은 peep란 단어의 좌우대칭 구조 때문에, 또 '엿보다'란 단어가 갖는 의미망 - 비밀, 포르노적 시선, 여성/타자의 대상화 - 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연작이다. 여기서도 서가는 작가의 상상의 서가로 전환되었고 P E E P를 시각화하며 인포커스된 책들과 후면으로 아웃포커스된 책들 사이에 형성된 깊이/공간은 흐릿한 후면을 엿보고 싶은 욕망을 발산시킨다. 물론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우리의 엿보기의 대상은 인포커스된 책 제목들이고 「페미니즘의 거울」, 「정복의 법칙」, 「국가 이미지 전쟁」, 「레닌」, 「매맞는 여성」, 「Answer to History」과 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을 이야기하는 진지한 책들과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제목이 유발하는 웃음 사이에서, 화면은 농담과 진지함이 뒤섞인 모호한 장면으로 전환된다. ● 작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특권)으로 산다는 것, 남성이 이미 항상 갖는 유리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남성이다. 작가는 여성이 억압당하는 사회, 여성의 곤궁에 대해 배운 자이고 그것이 여성에 대한 자신의 남성적/포르노적 욕망/환상을 반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자신의 화면에 드러낸다.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남성이고자 한다. 인의예지가 극히 일부유교사회 기득권의 덕목이었음을, 그것이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와 억압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성찰하면서 작가는 '아버지'보다 더 윤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기를 욕망한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peep이란 단어와 병치시키는 이중적 존재이다. 그는 욕망과 의식, 앎과 감각, 진지함과 가벼움, 비극과 희극이 벌이고 있는 '전투장'으로서의 삶을 상연한다. 그의 화면은 의식적이고 성찰적이면서 희극적이다. 그는 그런 면에서 '인간적'이다. ● 그의 1년여에 걸친 작업의 맨 마지막은 「여성 wifmann」이 차지한다. 고대 영어 wifmann은 글자그대로는 '여자남자'로 번역될 수 있을 텐 데, 이는 모든 사람은 남자mann이고 그 중에 '여자남자'와 '남자남자'가 있다고 생각한 고대인의 생각의 방식을 확인시켜준다 – 물론 한국어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wo'man'도 그런 표식을 갖고 있다. 앞서 분석한 작품 「PEEP」의 구조를 상하 대칭의 구조를 통해 반복하고 있는 「wifmann」은 베르미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와 고흐의 자화상이 인포커스와 아웃포커스의 방식으로 중첩되게 되어 있다. 예술가로서 고독하고 궁핍한 길을 걸었던 고흐를 하단의 인포커스 화면으로 배치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베르미어의 저 유명한 걸작을 상단의 인포커스 화면으로 배치하면서 작가는 예술과 관련한 자신의 욕망의 이중성을 가시화한다. 즉 오직 자기자신을 위해 그렸던 작가가 되고 싶은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성/사랑의 승화로서의 예술이라는 저 오래된 '남성' 작가의 욕망을. 자신이 되고 싶은 환상과 자신이 그리고 싶은 환상 사이에서 작가는 자신이 되고 싶은 환상을 저 '아래'에 뒤집어 배치함으로써 '위대함'의 자리에 대한 통념을 배반하고, 그럼으로써 작가의 지위를 희화화하고, 그럼으로써 나르시스트적 진지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기이한 존엄성을 성취한다. ● 책과 이미지, 성과 윤리, 규범과 위반, 진지함과 가벼움, 비극과 희극. 작가는 양립불가능한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적인 장면이 자신의 삶의 풍경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결백, 순수, 진지에의 수사(rhetoric)에, 더 우월하고 위대하고 선한 지위에 이르려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존하려고 한다. 삶은 본래 모순되고 모호하고 양가적이고 그래서 어려운 타자이기 때문이다. 양 극 중 어느 하나를 더 우위에 두지 않은 채 두 극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싸움이 아니라 놀이이다. 싸움은 타자를 적으로 상정한 자들이 벌이는 맹목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타자를 살려두고 나의 힘을 최소화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이다. 작가가 벌이는 싸움은 전쟁이 아닌 놀이를 삶으로 환대하려는 이가 경계해야 하는 근대적 구도와의 싸움이다. 아이는 그냥 놀지만 어른은 놀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 적과 아군, 나와 너, 옮은 것과 틀린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는 인식적 폭력을 경계하면서 놀기. ● 그것이 새로 태어난 사람, '신생아'로서 기억과 싸우고 인식의 집요함과 싸우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 모순과 비일관성의 삶을 환대하려고 하는 작가의 1년의 결과물이다. ■ 양효실
Vol.20120310e | 한인규展 / HANINGYOO / 韓印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