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309_금요일_06:00pm
주최/기획 / CSP111 아트스페이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CSP111 ArtSpac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5번지 현빌딩 3층 Tel. +82.2.3143.0121 blog.naver.com/biz_analyst
인간은 이기적인 힘과 권력을 이용해 자연을 파괴함과 동시에 재창조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작가 고민정은 양면성의 이미지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을 찍어 꼴라쥬시킨 입체물을 다시 사진으로 기록하며, 파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연파괴를 통해 유토피아의 공간으로 재건축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조선의 전기 화가 안견의 산수화로 '몽유도원도'은 왼쪽의 현실세계, 오른쪽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서로 독립된 듯 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은 고민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충해준다. 이번 고민정작가의 개인전 『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는 사진과 영상 작업들로 시각적 리얼리티가 파괴되고 재탄생되면서 형성되는 양면성에 대한 경험을 관람자들과 함께 소통해보고자 한다. ■ CSP111 아트스페이스
고민정의 신몽유도원도 ●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많은 것이 파괴되기보다 건설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도시 건설이다. 도시는 뉘앙스에서부터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도시건설에 윤리적인 문제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고 그렇기에 아무도 자연의 파괴와 연관 짓지 않았다. 지금은 개발도상국이라 하기에 조금 많이 왔다. 삶의 질이나 사유의 깊이가 깊어진 건 아니라 할지라도, 흔히 말하듯 살기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개발은 여전하다. 도시의 본성이 그래서 일까.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문화와 자연을 끌고 와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공원과 조경이 그 예이다. 짧은 시간에 시멘트로만 덮여있던 한강부지는 공원으로 녹지화 되는 중이고, 성냥갑처럼 꽂힌 빌딩에 곡선과 사선을 긋고, 그리고 조경과 조형물에 상당한 공간을 할애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위성이다. 그 현상이 어떻게 변했건 간에 인위성까지 감출 수는 없다. 결국 개발의 논리 저변에 깔려있는 정치적인 속성이 그 인위성에 의해 들춰지는데, 하지만 이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들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보인다면 정치적인 속성은 이를 더욱 악용할 것이고, 직접적으로 들춘다면 정치적인 속성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개발은 본질적으로 파괴를 수반한다. 이제는 자연의 파괴를 연관지어야 한다. 이는 윤리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예술의 실천과 개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식하기보다 감각하는 자의 것이고, 표현을 유머와 은유를 통해 놀이로 위장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고민정의 사진은 보는 순간 개발과 파괴의 동시적인 현상을 연상하게 한다. 사진들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조합한 사진에는 동화같은 파란 하늘과 노란하늘과 함께 말 그대로 조각구름이 있다. 건설되는 건물의 골격과 파괴되는 건물의 골격이 서로 차이나지 않으면서 원색과 대조되는 무색흑백으로 배치되어 있다. 간혹 작가에 의해 색을 부여받기도 하지만 건물은 여전히 시멘트 느낌이 강하다. 따라서 사진에 조작된 자연물과 함께 공사 차단막이 색을 지녔다는 이유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파괴의 대상으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과거적 기와집이나 건물, 특히 텐트는 색이 거세되지 않았기에 역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따라서 사진의 전반을 아우르는 느낌은 도시건설처럼 위압적인 것 같지만, 작가의 시선은 이와 달리 파괴되는 부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단막도 목적을 다하면 사라질 테니 말이다.
20세기를 시작할 즈음 앗제(E. Atget)는 인물을 배제한 풍경을 찍음으로써 벤야민에게 사진에 대한 성찰을 제공했다. 벤야민은 "사진촬영은 앗제에 와서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사진의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인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고민정의 사진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건설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전하는 그녀의 사진은 일종의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다. 도시건설, 파괴, 억압, 과거의 부정, 자본, 욕망, 권력 등 역사적 사건의 동기들에 대한 증거이다. 왜 더 좋은 삶을 위한 재건이 이렇게 부정적인 뉘앙스밖에 줄 수 없는 걸까. 여기에 강하게 작용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권력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한 계몽주의이다. 이미 알듯이 역사는 항상 파괴를 통해 전개되었다. 헤겔은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이를 변증법적이라고 틀지었다. 여기에는 이상(이념)을 향해있는 방향성이 전재되어 있고, 이것이 폭력과 파괴의 논리를 정당화시킨다. '새로운'에는 항상 '더 나은' 이 깔려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파괴의 주체를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도록 한다. 이로 인해 여기서 덧입혀지는 수단이 계몽이다. 파괴를 당하는 수동주체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괜찮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할테니. 그러나 계몽의 수동자는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행하는자에게 흡수된다. 자신의 색과 함께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거부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베일을 드러나게 거부한다면 흡수되지도 못하고 파괴될 것이다. 어느 누가 흡수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능동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고민정은 도시건설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증거하는 사진을 찍고, 드러나지 않게 파괴에 대해 저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단지 사회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러한 표현을 자청한 것일까.
심리학자인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은 자신의 저서 『트라우마』에서 사회의 힘, 또는 남성의 힘으로부터 파괴된 자들인 참전용사나 여성을 치료했던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고 나아가 이를 적용한 역사의 바람직한 재건을 희망한다.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은 창조적인 에너지의 발생과 같다고 말한다. 그녀의 방법에 따르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재생하고, 수동적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슬퍼함으로써 관계가 회복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생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재생 말이다.
사회에는 반드시 권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하지만 메신저가 있었듯 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목격할 수 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권력 행사를 통해 남성을 강화시키는 자들이다. 가정해보자. 만약, 현재가 이러하다면 남성을 사회와 동일한 위치에 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의 권력은 남성을 지칭하게 된다. 사회의 많은 재건과 계몽은 일종의 '남성-되기'라고 할 수 있다. '남성-사회'는 모든 것에 이것을 적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남성은 약화된다. 남성의 우위는 반대급부인 여성이 있는 만큼만 인정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저항은 권력의 양만큼 필연적이어야 한다. 허먼이 제안한 방법을 적용해보면, 저항은 재생과 동일하다. 과거의 재생, 이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던 것에 대한 재생을 통해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에 권력의 존재를 그 자체로 유지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봐야 한다. 이를 예술에 적용해보면, 재생을 표현과 동일하게 볼 수 있다. 만약 예술가인 고민정이 사는 세계가 남성중심의 사회라면, 그녀의 사진은 '남성-되기'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표현에서 더 중요한 의미는 권력에 대한 존중이며, 관계에 대한 회복이다. 양자의 동등한 지위와 서로에게 행하는 힘(권력)을 통해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를 꿈꾸는 것이다. 증거물, 재생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로 저항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회복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뉴타운프로젝트를 몽유도원도라 명명한 것은 아닐까. ■ 박순영
산, 바다, 그리고 인간에게 제일 살기 적합한 우리가 늘 생각하는 몽유도원도는 여기에 없다. ● 늘 꿈꾸던 유토피아는 찢어지고, 어눌한 배합의 빌딩들처럼 허술한 모습으로 다시금 창조되고 있다. 파괴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유토피아를 만들어 간다. 이리저리 지어진 신도시 아파트같이 절박하고 파괴적인 모습과 이상향을 이루고자 하는 양면성은 불편하게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 관객이 바라보는 몽유도원 속 세상은 당신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 아니다. 어쩌면 보기에 불편한 파라다이스일 뿐이다. 나의 몽유도원에는 파란 하늘이 어긋나 붙여지고, 푸른 물, 바다가 투명해 보이지만 비춰지는 것은 흩어진 모래언덕, 갓지어진 아파트의 형태다. 지어진 건물은 다시금 쌓여졌다 무너졌다를 반복하고, 수백번 반복된 건설과 창조 그리고 파괴는 결국 사라져가며 결국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illusion임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길 바란다. ■ 고민정
Vol.20120309j | 고민정展 / M.J Ko / 高旼政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