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oud Oudshoorn, Dimensions

레이나우드 아우츠혼展 / Reinoud Oudshoorn / sculpture   2012_0302 ▶ 2012_0415 / 월요일 휴관

레이나우드 아우츠혼_Untitled_반투명 유리, 철_80×45×25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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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02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용산구 한남동 32-23번지 Tel. +82.2.747.4675 www.skape.co.kr

무한대의 영역으로 연결되는 통로의 구축 ● 천변만화하는 현상계의 이면에 내재하는 궁극의 질서를 모색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철학의 보편적 명제였다. 그 복잡한 우주의 현상을 검증된 이론의 토대 위해서 분석하고 이해해내려 노력한 것이 서양 철학자들의 태도였다면, 불명료한 현상의 가변성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상호작용에 더 집중해왔던 것은 동양철학자들의 태도였다. 이것은 지극히 일반화된 관점이기는 하나 의외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동시대의 문화적 배경에 그러한 관점의 상이성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 여러 가지 연산식들이 나열되어 있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형태를 구축하는 레이나우드 아우츠혼은 일견 어떤 질서와 법칙을 먼저 부여하고, 그것의 진행 과정에서 얻어지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서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가진 특별함은 오히려 그러한 방법의 역순을 취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는 일상의 장소에서 목도하는 다양한 주변 사물들로부터 어떤 형태적 영감을 얻어낸 후 그것을 가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과정을 밟고 있다. 아우츠혼은 바닷가를 걸으며 지표면 위에 존재하는 해안선에서 어떤 곡선을 유추해내고, 안개 속을 걸으며 구름이 갖는 흥미로운 형태를 생각해 낸다고 말한다. 심지어 과거 자신의 작품들을 보며 새로운 형태의 영감을 얻기도 한단다. 그것은 모든 대상에 대한 선험적 편견을 제거하고 표면 자체를 관조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그 표면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질서를 모색하는 명상의 과정인데, 이는 매우 동양적이다. 그런 과정에서 얻어진 추상적 형태를 입체의 형식으로 구현하기 위해 그는 수학적 계산이 가미된 드로잉의 과정을 갖는다. 이 연산은 그가 의도하는 환영적 형태의 정밀한 구현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며, 재료는 그러한 공간의 물리적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선택되고 활용된다.

레이나우드 아우츠혼_Untitled_철_111.5×277×109cm_2010
레이나우드 아우츠혼_Untitled_ 철_151×151×75.5cm_2011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를 견인했던 원근법의 발견이 평면의 한정성을 초월하기 위한 예술적 의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처럼, 복잡한 수식과 드로잉, 재료의 선택과 제작의 과정은 모두 한정된 평면 속에서 깊이감을 갖는 3차원적 공간을 모색하기 위한 아우츠혼의 예술적 실천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의 작품은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 명상적인 분위기를 발산한다. 그의 작품은 물질적인 대상의 유한성과 비물질적 대상의 무한성, 그 사이의 간극을 모색한다. 이는 그가 조각을 하기 전 회화를 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다. ● 자신의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아우츠혼은 매우 광범위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가 형태에서 영감을 얻고, 질서를 부여하여 만들어낸 원형적인 형태가 모종의 공간의 축조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 작품들은 3차원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벽면에 걸리거나 모서리를 채우는 식과 같이 대부분 원래의 공간 구조의 틀 안에서 존재한다. ● 한국에서 두 번째로 개최되는 이번 개인전은 공간의 속성과 합일되는 작품의 특별함이 전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작품들은 주로 전처럼 벽에 걸려 있거나 바닥에 놓여 있기도 하지만 철로 제작된 몇 개의 큰 작품들은 벽과 바닥에 동시에 일정한 힘을 가하며 서 있다. 무심하게 놓여 있는 것 같은 안정감과 함께 묵직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은 이 작품들이 중력과 반작용 사이에서 교묘한 접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다.

레이나우드 아우츠혼_Untitled_나무_50×116×41cm_2010
레이나우드 아우츠혼_Untitled_철_70×70×27cm_2011

또한 그의 작품들은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변모한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들이 출현한다. 예를 들어 철로 만든 가는 선들로 이루어져 전시장 한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은 보는 거리와 각도에 따라 선에서 면으로, 다시 면에서 일정한 공간으로 변모하며 시선을 몰입시킨다. ● 그의 작품들은 각자가 독자적인 완결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모여 있는 전시장의 분위기는 하나하나가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전체적으로 어떤 새로운 공간의 차원을 환기시키는 각각의 요소들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각은 그것이 소비하는 공간보다 더 큰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그의 언급은 작품에 내재하는 개념적 지평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것은 어떤 법칙과 질서의 연구에 의해 얻어진 결과를 통해 빈 공간을 채워 나가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공간들로 연결되는 통로를 제시하고자 하는 아우츠혼의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완만하게 진행되는 곡선과 명료한 직선,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감을 부여하는 반투명의 표면이나 촉감이 느껴지는 목재의 옆면 등 각각의 작품이 가진 제반 요소들은 관객의 수평적 시야와 조우하며 새로운 공간을 생성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수렴된다.

레이나우드 아우츠혼_Untitled_나무_121×99×69cm_2011
레이나우드 아우츠혼展_갤러리 스케이프_2012

결국 아우츠혼의 작품은 장소를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그의 작품은 특정한 장소의 한정성에서 표면을 지각(perception)하던 관객에게 불특정한 공간, 무한대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인식(cognition)의 경로를 부여하는 것이다. 관객은 그의 작품으로 인해 공간을 인식하는 새로운 경험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 경험은 결국 자신이 속한 장소에 거울처럼 반사되는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인식하는 행위다. 아우츠혼의 작품에 내재하는 명상적 속성은 단순히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성에게 비롯되기보다 물리적 토대의 장소를 심리적 토대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의 언어를 답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는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많은 가능성을 차단당한 채 살아간다. 근대화된 삶이란 것은 바로 그 인위적 구조 속에 신체의 리듬을 부합시키는 것이었다. 그 현란한 표면 앞에서 우리의 사고는 중단되고 만다. 아우츠혼의 작품은 그러한 차단막을 넘어,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무한대의 가능성과 내 안에 존재하는 우주를 접속시키는 통로다. 그리고 그렇게 조우한 대상은 나의 것도 아니고 너의 것도 아닌 새로운 차원의 우주로 귀결되는 것이다. ■ 고원석

Vol.20120303e | 레이나우드 아우츠혼展 / Reinoud Oudshoorn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