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ory Overload

장영원展 / JANGYOUNGWON / 張榮元 / painting   2012_0301 ▶ 2012_0317 / 월,화요일 휴관

장영원_A Few Little Pricks 몇번 찔렀을 뿐_리넨에 유채_162.5×258.5cm_2011

초대일시 / 2012_0302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화요일 휴관

옆집갤러리 NEXT DOOR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8번지 Tel. +82.2.730.2560 www.nextdoorgallery.co.kr

장영원의 그림은 '감각의 형상'이다. '감각'은 예술과 무관했던 그를 이 세계에 발을 딛게 한 동기임과 동시에 풍성한 그림 소재이기도 하다. 감각의 발견은 공대 재학 당시 우연히 펼쳐 든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성적 사고를 우위에 둔 공과대에서 합리적 답을 원하는 물리, 화학 실험에 지쳐있었던 그에게 로스코의 색면 추상은 새로운 경험임과 동시에 전에 없던 그의 감각의 일부분을 살짝 들추어내는 계기가 된다. 특히 밝은 시각 효과를 내는 색면을 통하여 신체의 감각을 탐구한 로스코의 작품은 '감각의 기억'을 표현하는 장영원의 회화와 묘한 연결고리를 갖는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의 감각 탐구의 결과물은 진심으로 무언가에 감동 받았던 기억이 흐릿한 아니 아련한 장영원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고 그후 공대가 아닌 예술이, 차가운 물리, 화학 실험이 아닌 자신의 감각을 연구내지는 분석, 형상화시키는 작가로 거듭나게 한다. ● 그의 초기 작업은 작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감각들에 대한 표현이라면 현재 진행하고 있는 '감각 형상'은 관계성으로 인해 파생되는 감각들까지 모아 재조합하는 형식이다.

장영원_37.2℃ 베티_리넨에 유채_91×116.8cm_2011

그러므로 현재 작업은 과거보다 넓은 의미를 갖게 되는데, 과거에는 직접적인 작가의 기억에 의존해 왔었다면 현재작업은 직접적이면서도 간접적으로 감각되고 사유된 기억에 대한 작업이다. 이것은 작가와 대상이 관계 맺게 되었을 때 발생되는 수많은 감각들을 형상화시키는 것으로 항상 그가 초반 작업부터 이끌어 왔던 '감각된' 감각들을 최대한 끄집어내어 형상화시키는 노력이 수반된다. 대부분의 초기 작업은 초상화의 형식을 띠고 전면을 바라보는 형식을 취하는데, 가운데 둥근 원의 사용은 불완전한 요소로서 비구상적 표현 혹은 기호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작가와 일차적,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대상의 형상을 의미한다. 안면부에 드러나는 타원형태의 단색 면 사용은 눈, 코, 입 각 기관의 대상을 나타내는 기호의 사라지게 만듦으로써 대상의 정체성을 지우고 작가와 대상의 관계성만이 남게 하려는 의도이다. 하지만 현재의 작업은 그것보다 좀 더 나아가 대상의 기호를 완전히 삭제하여 관계에 대한 감각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감각된 기억'까지 끄집어 내는 작업이다. 이것은 일차적 관계를 넘어서는 삼차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보다 폭넓게 작가에게 감각되는 것을 표현한다. 즉, '작가와 대상의 관계 맺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사유되는 감각에 대해 보다 폭 넓은 감각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감각은 단지 물리적 감각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정신 활동을 통한 감각을 뜻하는데, 작가가 어떠한 일련의 사건 즉, 일상생활에서 매일 같이 부딪히는 사건 중,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면, 이 사건을 통해 발생되는 감각들 슬픔, 처절함, 외로움, 분노, 그리움과 같이 텍스트로 나열하면 수도 없이 많은 단어와 문장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감각을 재구성하여 형상화하는 것이다.

장영원_The Sound of Silence_리넨에 유채_118.5×250cm×2_2012

'감각의 재구성'은 공간에서 다시 한 번 이루어진다. 작가는 작업 시작 전에 전시할 갤러리 공간을 측정하고 그에 맞추어 캔버스 사이즈를 결정한다. 이는 캔버스 위에서만이 아니라 공간까지도 감각 형상화의 일부로 삼는 장영원 만의 독특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체가 모여 그의 '감각'을 형성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작품 또한 하나의 조각으로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여러 작품이 공간 안에 전시 되었을 때 관객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눠진 작가의 감각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고 캔버스 위에서 형상과 기억을 재구성하는 그의 작업은 갤러리 공간에 이어 관객이 전시장 안에 들어 섰을 때 하나 하나의 작품 감상보다도 여러 작품이 모여 공간 안에서 울리는 작품의 공명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장영원_미드나잇 블루스_리넨에 유채_72.7×90.9cm_2012

Critical writing ● 푸르스름한 바탕 위를 떠다니는 이미지들은 하나의 부유물 같다. 손으로 움켜쥐려 하면 물컹거리며 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갈 것처럼 크고 작은 붓 터치들은 형상 위에 뭉쳐있기도 하고 미끄러지듯이 밀려나가기도 하면서 해체되기도 하고 모아지기도 한다. 그림 하단의 검붉은 막은 마치 막 물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순식간에 이미지를 삼킬 것 같은 기세로 아래쪽에 침전돼 있다. 이 어둠이 위를 덮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은 우리의 시선을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더 응시하게 만든다. 떠내려갈 듯 흩어질 듯 캔버스 위에 퍼져있는 형상들은 바로 '작가의 기억'이다. 작가의 기억은 이야기로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좀 더 날카로운 '감각의 기억'을 형상화하고 있다. 장영원의 초반 작업은 자신의 성장기를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남자 대 남자로서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그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엄했다. 그의 분노 표출은 불특정적이었으며 순간적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감정 변화는 그에겐 항상 모순덩어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 그는 그것을 단지 단순한 감정의 변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기억과 유사한 감정을 회화로 표현하기로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첫 번째 작업이 바로「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이다. ● 한 남자가 무엇을 던지려거나 휘두르려는 동작을 네 개의 연속화면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얼굴 위에 그려진 검은 원들 때문에 쉽게 야구 연습장에서 배팅연습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네 개의 불특정 원들이 온전히 얼굴을, 특히 남자의 표정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왼쪽 첫 번째 인물의 약간 올라간 눈썹 모양으로 그가 무언가를 힘껏 던지려 애쓴다는 것뿐이다. 얼굴은 신체에 있어서 가장 잘 드러나면서도 가장 표현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얼굴 표정만으로도 한 사람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고 얼굴 자체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은 이런 결정적 부분을 검고 둥근 형태로 가렸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인물의 표면적 정보를 알아낸다기 보다는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피는 방향으로 우회하게 한다. 작가는 감각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 방해되는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인상, 얼굴 표현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데만 집중케 한다. ● 감각의 기억 ● 순간 즉, 이성에서 격한 감정의 상태로 넘어가는 그 순간의 기억을 좀 더 면밀히 분석하기 위해 작가는 영화나 사진에 쓰이는 1초의 연속 촬영기법을 잠시 빌린다. 그럼으로 그의 눈, 그리고 감각이 마치 기계로 촬영된 것처럼 이미지로 구현되고 이 찰나의 시간을 가능한 한 길게 멈추어 놓는다. 작가는 순간의 기억을 위해 타인이 만들어낸 제 3의 이미지에서 자신이 원하는 형상을 뽑아낸다. 예를 들어 영화나 광고 그리고 잡지 이미지 등은 자신이 구현하려는 이미지와 전혀 상관 없지만 '그때'를 회상하는 것을 도와줄 이미지로서 사용된다. 선택된 이미지는 그 자체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작업을 거치게 되는데, 캔버스 위로 이미지를 옮기기 전에 컴퓨터 작업을 통해 완벽하게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가 찾기로 한 감각의 기억을 축출해 낸다. ● 작가는 감각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거나 경험한 이미지에서 출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내 눈을 믿지 않습니다. 사과를 바라봄에도 눈을 감고 상상을 통해 그 '사과'를 눈으로 본 것과 같이 상상하면 눈으로 본 것과 다른 사과의 형상만이 기억됩니다. 실제의 사과 껍질의 옹기의 모양조차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상상을 통한 그리기는 나를 더욱더 무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상상을 통한 형상조차 믿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감각을 믿을 뿐입니다."_장영원 작가는 자신의 눈으로 바라 본 것 그리고 기억 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이미지를 믿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인 타인의 눈에 의해 실현된 제 3의 이미지에서 감각의 기억에 대한 이미지를 찾는다. 작가가 원하는 그 어떠한 형상을 만들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꼴라주 작업 즉, 편집, 자르기, 오리기, 붙이기 등 혹은 몽타주 기법이 사용된다. 사실 몽타주는 영화 후반작업에서 감독의 예술적 감각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쓰이는 방식이다. 영상을 통해서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는 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기 때문에 편집은 시간과 공간을 재편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의미마저도 새롭게 생산해 낼 수 있는 수단이다. 작가는 이러한 편집기능을 통해 제 3자의 이미지를 자신의 감각의 기억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이 모든 작업들은 감각을 형상화 시키기 위한 작업의 시작점으로 그 감각과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찾아 가장 근접한 형상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한다. 그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은 결국 그의 감각이다.

장영원_L씨의 대인기피_리넨에 유채_72.7×90.9cm_2012

감각의 기록 ● 작가 장영원이 표현하려는 감각 형상의 표현 방법으로 우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기반으로 감상하게 만드는 구상적 이미지보다는 감정에 더 호소하는 추상적 이미지가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추상표현이야 말로 스토리 부분과 배경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감(感)'이라는 것을 표현하기에 가장 쉬운 통로라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사용하는 사진 매체는 미술사에서 구상이래 추상이라는 장르를 생성하는 데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매체이기도 하다. 사진의 발명 이후 많은 작가들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해내는 사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사진적인 사실주의를 추구하거나 심지어 사진을 회화 표면에 그대로 가져다 쓰기도 하였다. 반면에 사실적인 재현을 놓고 사진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히다고 판단한 일부 화가들은 사진이 지니지 못하는 회화 고유의 본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물질세계에 대한 새로운 리얼리티를 제시해 준 사진술의 발달과 형태나 시각을 달리해서 보여주는 사진의 다양한 특성들은 회화가 구상성을 벗어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사진 같은 기록 매체의 발달은 회화의 입지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했고 이상주의적 색채와 형태가 점차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어 비 재현적인 추상회화로의 귀결에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사진은 추상과 구상이라는 장르 구분을 위한 명확한 경계선 역할을 감당한다. 많은 작가들은 이러한 사진을 자신의 새로운 예술영역으로 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대표적인 예가 사진을 독특하게 자신의 회화의 표현을 위해 도입한 프란시스 베이컨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자료는 고갈되지 않는 그림재료였다. 사진은 시간의 '셔터'를 충동질하면서 풍부한 이미지의 사전의 요소들과 그 회화임을 강조하는 요소들 사이에서 거리감을 준다고 믿었다.(크리스토프 도미노 (성기완 역),『베이컨: 회화의 괴물』, 시공사, 서울, 2001, p.63.) 사진은 이미지와 시간의 예술이며 순간의 찰나를 잡아두기 때문에 시작점부터 완성 단계까지 끝임없이 변화 가능한 서술형의 회화와는 달리 찍음과 동시에 이미지와 시간,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기록할 수 있다. 때문에 회화 역시도 사진과 마찬가지로 기록이라는 측면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베이컨이 왜 이러한 사진적인 요소를 작업의 일부로 포함시켰는 지를 짐작할 수 있고 이것은 작가 장영원에게도 해당된다. 순간의 찰나를 기록하는 사진과 이 사진을 회화 속으로 끌어들여 사진 이미지의 '모방' 내지는 '복사'가 아니라 복제 이미지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실재(reality)'를 추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사진매체의 특징과 잘 맞아 떨어진다. 또한 감각의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 왜 추상보다 구상이 적합한지는 질 들뢰즈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구상화하기(다시 말해 삽화적이면서 서술적인 것)를 추월하는 데는 두 방식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 첫 번째는 추상적인 형태로 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형상의 길, 바로 그것에게 세잔은 '감각'이라고 하는 간단한 이름을 주었다. 형상은 감각에 결부된 느낄 수 있는 형태이다. 감각은 살의 시스템인 신경 시스템 위에 직접 작용한다. 추상적 형태는 두뇌의 중개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뼈에 훨씬 가깝다.(질 들뢰즈(하태환 역),『감각의 논리(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민음사, 서울, 2008, p. 47.) 그렇기 때문에 신경과 연결되어 있는 '살'을 표현하는 것이 감각의 장식적인 효과 밖에 낼 수 없는 추상보다는 온몸의 신경과 연결되어 있는 살의 표현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감각이란 것은 쉬운 것, 이미 된 것, 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만 아니라, '피상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도 반대가 된다. 감각은 주체(신경 시스템, 생명의 움직임, '본능', '기질', 등 자연주의와 세잔 사이의 공통적이 어휘처럼)로 향한 면이 있고, 대상(일, 장소, 사건)으로 향한 면도 있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 관객으로서 나, 나는 그림 안에 들어감으로써 감각을 느낀다 그럼으로써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자의 통일성에 접근한다.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 비록 그 신체가 사과의 신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된 신체이다.(Ibid, p.48.) 장영원의 회화에서 그려지는 육체는 보편적 존재의 체험과 자기 자신의 삶의 경험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감각을 일깨우는 유일한 대상이며 형태의 일그러짐과 변형은 그러한 감정을 일깨우는 노력이자 수단인 것이다.

장영원_첫사랑은 죽었다_리넨에 유채_130.3×193.9cm_2012

감각의 리얼리즘 ● 작가는 감각의 표현 방법으로 본래의 기호가 사라진 이미지 조각들을 이용하여 캔버스 위에 나열이 아닌 조합의 재구성을 통해 자신의 감각 형상에 가장 근접한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조합된 이미지는 또 다시 그에게 감각된 색과 형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다시 해체되고 다시 구성된다. 물감이 번지고 떨어지고 기존의 물감 위에 다시 채색되고 또다시 지워진다. 그러한 작업 끝에 형상들은 무너져 내리듯 흘러내리거나, 비어있거나 때로는 뒤 덮인 체 가려지기도 한다. 감각이란 것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특히 이것이 기억 속의 감각일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을 떠올릴 때 형상으로 기억해 내기 보다는 그 주변의 색깔, 소리, 냄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억을 이끌어 내는 모든 오감은 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경의 기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작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하여 그때의 감각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를 떠올리기 위해 우리는 정확한 묘사 따위는 필요 없다. 다만 뭉뚱그려진 형상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감각 형상에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원래 감각 형상은 아니게 된다. 이 작업은 시작에서 완성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과정이 낳은 또 다른 과정에서 끝을 맺게 된다. 마치 이는 하나의 습작들처럼 형상만이 캔버스 위에서 부유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기억나기 직전 혹은 아른거리는 기억의 형상을 잡으려 하는 듯한 모습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겹겹이 쌓여지는 붓 자국들은 결국 작가가 자신의 감각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인상파의 사실주의를 추진시켜 단순한 시각적, 현상적 사실에서 다시 근본적인 물체의 파악, 즉 자연의 형태가 숨기고 있는 내적 생명을 묘사하는 데 목적을 둔 세잔의 붓터치와 비교될 수 있다.

장영원_새벽 2시 45분_리넨에 유채_116.8×91cm_2012

세잔은 스펙트럼의 일곱 가지 색깔만을 사용하여 마침내 대상의 '고유한 색조'(ton local)를 파괴하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일곱 가지 이외의 색들, 예컨대 검은색, 황갈색, 황토색 등을 자신의 팔레트 위에 올려 놓고 그들이 침몰시켰다고 생각한 대상자체의 고유한 중량감과 색을 살려냄으로써 대상자체로 더욱 접근하려 시도했다.(M. Merleau Ponty,『Le Doute de Cézanne』in Sens et Non-sens, Nagel, Paris, 1966, p.20.)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집착'은 그를 인상주의 미학으로부터 완전히 떠날 수 없게 만들었으나 그러한 상황 때문에 그의 그림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겐 역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세잔은 감각을 떠나지 않은 채 오직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에 따라, 형태나 색채를 둘러싸는 '윤곽선'이나 '원근법'과 같은 회화적 배열도 없이, 하지만 그러면서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려 했기 때문이다.(Ibid, p.21.) 세잔의 색채와 붓 터치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의 표현임과 동시에 우리의 머릿 속에 자리잡고 있는 대상의 본질을 걸러내는 많은 관습과 규약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그의 붓 터치 하나 하나는 바로 진실로 가려는 노력이고 이 방법은 작가 장영원의 회화에서 비슷한 경향으로 다시 나타난다. 사건이 발생된 시점에서 일어난 감각활동은 때로는 색으로 뒤덮이거나, 영상처럼 기억 저편에서 뚜렷하게 보이기도 하고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감각 체계를 무너뜨린다. 사건의 발생과 함께 느껴졌던 그 감각은 사라지고 점차적으로 아련하고 공허한 감각 형상으로만 남게 된다. 작가는 사건이 발생됐을 때 느꼈던 감각의 색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그러한 감각과 가장 닮은 형상을 그려내기 위하여 많은 붓 자국을 표면 위에 중첩시키고 또 중첩시킨다. 수많은 붓 자국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에서 '즉각성'이란 없다. 그의 한겹 한겹의 붓 터치가 바로 감각의 기억을 떠올리게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는 그의 기억을 형성시키는 그만의 리얼리즘을 완성한다. ■ 정상연

Vol.20120302i | 장영원展 / JANGYOUNGWON / 張榮元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