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카리 아리사카展 / Yukari Arisaka / painting   2012_0214 ▶ 2012_0226

유카리 아리사카_Evening Haze_캔버스에 유채_24.2×33.3cm_2011

초대일시 / 2012_0214_화요일_05:00pm

이브갤러리 기획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이브갤러리 EVE GALLERY 서울 강남구 삼성동 91-25번지 이브자리 코디센 빌딩 5층 Tel. +82.2.540.5695 www.evegallery.co.kr blog.naver.com/codisenss

오늘날의 일반적인 회화로부터 상품의 역량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 그것은 일찍이 「회화」라고 불리었지만, 때로는 휘황찬란한 단순한 형해(形骸)는 아닌 것인지? 아리사카의 작품을 볼 때마다, 혹은 그 파동 ,반향가운데 있을 때마다, 나는 그러한 감개에 사로 잡힌다. 오해하지 말아달라. 이 고고한 화가에 있어서는, 세속적인 회화와는 완전히 무연의 사태가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티프(이것 자체가 벌써 상품이다) 혹은 그리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을 그린다-이것을 화가라 칭한다면, 아무래도 아리사카는 화가는 아닌 듯한 생각이 든다. 분명히 그림과 같은 것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다시 말하자면-고고한 「화가」의 내면 공간, 그 깊숙한, 이것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독자적인 화가인 것이다.

유카리 아리사카_Red Shadow_캔버스에 유채_50×72.7cm_2011
유카리 아리사카_The Voice_캔버스에 유채_24.2×33.3cm_2011

그리는 것도 아니고, 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아리사카가 일관해서 몽롱해진 화면을 가져와, 지지하고 있는 것은 비-의식이라고 하는 사고, 아니 오히려 입장, 태도이다. 이것을 쉬르레알리스트의 이른바 무의식 혹은 그 수법으로서의 오토메티즘 작가와 착각 해서는 안 된다.혁명적일 것 같은 무의식이 결과적으로 의외로 의식적이고 체제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의식의 속박이라고도 해야 할 문맥(통사론)을 다 버리지 못하고, 하필이면 「생물」의 원시적 형태에 매달렸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에 대해, 비-의식, 아니 오히려 의식과 의식이 아닌 관계성=차이에 가까스로 몸을 걸치고 그리고 제작하는 화가의 모습은 혹시 「초이성」(자우미заумь)을 몽상, 실천하고 있던 러시아의 전위예술가들과 의외로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유카리 아리사카_Voices of the Mountains (Partial image #1)_ 블랙 페이퍼에 펜, 마커, 연필, 수채_75.2×308.8cm_2010
유카리 아리사카_Voices of the Mountains (Partial image #2) 블랙 페이퍼에 펜, 마커, 연필, 수채_75.2×308.8cm_2010

그것은 접어두고,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은, 비-의식은 허무가 아니고, 우리가 보통 「선線」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것을 무의식 가운데 중개한다, 혹은 돌려 보내는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이다. 아리사카 유카리의, 특히 일종의 드로잉에 대해서는, 선은 넓이, 아니 오히려 「무-」와「비-」의 두 개의 의식에 걸친다고 하는 의미로, 능동적인 확대이며, 그러므로 선이 이루는 형태도 스스로를 부정하며, 그렇다고 해서 무로 귀환하는 것도 아닌, 또 다른 모습을 동경해 혹은 밀착하여, 마루라든지 벽의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마치 스스로는 화가라고 하는 본체의 그림자라고도 말할 듯이 어디까지라도 전개해 가는 것이다. ■ 모토에 쿠니오

유카리 아리사카_Voices of the Mountains (Partial image #3) 블랙 페이퍼에 펜, 마커, 연필, 수채_75.2×308.8cm_2010
유카리 아리사카_Wind in the Wood_캔버스에 유채_50×72.7cm_2011

今日の絵画一般から商品の括りを除いたらいったい何が残るのか? それはかつて「絵画」と呼ばれたものの、ときにきらびやかな単なる形骸ではないのか?有坂ゆかりの作品を目にするたびに、あるいはその波動もしくは反響のうちに身を置くたびに、私はそうした感慨にとらわれる。誤解しないでほしい、この孤高の画家にあっては、これは俗流の絵画とはまったく無縁の事態が進行しつつあるということだ。モチーフ(これ自体がすでに商品である)あるいは描くことを動機づける何かがあってそれを描く―これを画家と称するなら、どうも有坂は画家ではないような気がする。たしかに絵のようなものを紡ぎだしてはいるのだが、この―もういちど言おう―孤高の「画家」の内面空間、その奥深い薄明の、それはほんの一部でしかない。要するに、ここにいるのは独得の画家なのである。 ● 描くでもない、描かないでもない―有坂ゆかりの一貫して朦朧とした画面をもたらし、支えているのは(注意してきいてほしい)非-意識という思考、いやむしろ立場、態度である。これをシュルレアリストのいわゆる無意識あるいはその手法としてのオートマチスムと勘違いしてはならない。革命的であるはずの無意識が結果として意外に意識的で体制的だったことは、彼らが意識の縛りともいうべきシンタクス(統辞法)を捨てきれず、よりによって「生物」の原始的形態にしがみついたことに歴然としている。これに対し、非-意識、いやむしろ意識と意識ではないものの関係性=差異に辛うじて身を支え、そして制作する画家の姿はひょっとしたら「超理性」(ザーウミ)を夢想、実践しつつあったロシアの前衛たちのそれに意外に近いのかもしれない。 ● それはさておき、一つだけ言っておきたいのは、非-意識は虚無ではなく、私たちがふつう「線」と呼んでいるものはそれを無意識に仲介する、あるいは送り返す何かだということだ。だから有坂ゆかりの、とりわけ一種のドローイングにおいては、線は広さ、いやむしろ「無-」と「非-」の二つの意識にまたがるという意味で、能動的に広がりであり、だから線の成すかたちもみずからを否定し、だからといって無に還るのではなく、また別のかたちに憧れ、あるいは寄り添い、床とか壁の現実をまったく無視して、まるで自分たちは画家という本体の影とでも言わんばかりにどこまでも展開していくのである。 ■ 本江邦夫

Vol.20120214f | 유카리 아리사카展 / Yukari Arisaka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