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NER TAKES ALL

김영진展 / KIMYOUNGJIN / 金榮鎭 / painting   2012_0210 ▶ 2012_0220

김영진_영원한 풍요_캔버스에 유채_182×116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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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210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정지 상태의 변증법과 비판적 리얼리즘의 장기 지속: 김영진 회화의 중간 결산1. 미술의 진정성 대 미술의 시장화 80년대 말 비평가 벤자민 부흘로는 60~80년대 미국미술을 비교 평가하는 한 토론회에서 80년대 말의 미국의 미술비평은 완전히 마비된 듯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하며 설명한 바 있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예술적 규범과 평가기준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성'있는 비평의 한 기능이었고, 그에 의거해 창작과 문화제도 사이에 중재가 성립되고 문화기구들의 정당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80년대 이후에는 비평의 중재적 기능과 정당화 능력이 미술관과 미술시장의 힘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었고, 도록이나 미술잡지의 기사를 쓰고, 은행의 미술품 투자 서비스나 법인 또는 개인의 미술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것 자체가 비평의 새로운 기능이 되었다는 것이다. (「형식주의와 반형식주의 사이에서(미니멀리즘과 팝아트 이후의 비평론(토론))」/ 1987년 뉴욕 DIA예술재단에서 열린 현대예술토론회로 헬 포스터가 사회를 보고, 마이클 프리드, 로잘린 크라우스, 벤자민 부흘로가 주제 발표로 참여했다.『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이영철 엮음, 시각과 언어, 1995), 245~246쪽 참조.) ● 이런 지적이 80년대 미술운동이 쇠퇴하고 미술시장이 미술계를 주도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래 우리의 미술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좀 더 긴 안목으로 미술사를 되돌아보면 '진정성 있는' 비평/창작과 미술의 시장화 사이의 이런 대체 관계가 최근에 처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19세기 중후반을 뒤흔들었던 사실주의/인상주의 혁명이 세기말의 금융적 팽창에 따라 확장된 미술 시장에 흡수되면서 나타났던 현상의 확대된 반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은 바로 금융적 거품에 의존했던 미술시장의 급격한 위축 속에서 새롭게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5백년에 걸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역사가 220년(장기 15~16세기), 180년(장기 17세기), 130년(장기 19세기), 100년(장기 20세기) 단위의 점점 짧아지는 주기를 갖고, 실물적 팽창(MC) 단계와 금융적 팽창(CM') 단계로 구성된 파장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면서 지구적 규모로 확산되어 왔다는 사실이 1994년 조반니 아리기의 명저『장기지속』(백승욱 옮김, 그린비, 2009)에서 체계적으로 규명된 이래 21세기 사회과학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있다. 각 축적체제마다 금융적 팽창이 한계에 달하고 나면 새로운 체계로 이행하게 되는데, 르네상스기나 계몽주의 시기의 정치적, 과학적, 예술적 혁명이나 20세기의 제반 혁명들 모두가 이런 이행기에 나타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헤게모니가 해체되고 있는 현 시기는 "장기 20세기"가 해체되고 새로운 체계로의 이행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고, 최근 "GNR 혁명"과 같은 과학혁명과 병행하여 향후 새로운 정치적, 예술적 혁명이 예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단순 반복된다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와 현재 사이에는 지구화와 인구의 규모, 문화산업과 예술시장 및 예술교육 등을 위시한 수많은 제도들의 팽창,기술의 발전과 연계된 예술개념의 확장 등 수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팽창하는 차이들의 눈부신 행렬만을 따라가다 보면 그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구조적 반복의 중요한 의미를 놓치기 쉽다. 미술에 국한해 볼 때 이 반복의 중요한 의의는 지속되는 상업화의 물결 속에서도 '진정성 있는' 창작/비평의 융기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역사적 성찰을 우리의 미술 상황과 연관시켜 보면, 80년대~90년대 중반(진지한 미술운동이 주도하는 시기)과 90년대 중반~최근까지(미술시장이 주도하는 시기)가 마치 호황/불황과 같이 하나의 순환 주기를 이루고 있고, 2010년대를 맞아 새로운 순환주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조심스러운 예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새로운 순환주기가 80년대 미술운동과 같은 형태의 새로운 집단적 아방가르드의 탄생을 가능케 할 단서를 현 상황에서 곧바로 찾아내기는 어렵지만, 조만간 '진정성 있는' 창작/비평이 새로운 형태로 융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분명하다.

김영진_Winner takes all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09

2. 김영진의 변증법적 회화 ● 이와 같은 역사적 "차이와 반복"이라는 관점 없이는 지난 30여 년 간 진행되어 온 김영진의 작업 세계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미술사가 선형적인 형식적 진보라는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착각하는 피상적인 연대기적 관점에서 보면 김영진의 작업은 시대착오적이거나 모호하게 보이기 쉽다. 물론 작품활동의 양적 측면에서 보면 그의 위상이 모호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1989년경 그의 나이에 비해 미술운동에 뒤늦게 참여했다가 몇 차례 작품을 선보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민중미술운동이 퇴조했기에 그의 작품은 민중미술에서도 주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를 기억하는 이들조차 극소수에 국한된다. 반면,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주역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미술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화랑가와 대학에서 안정된 위상을 확보한 것과 달리 팽창하는 미술시장과 제도의 수혜로부터도 지속적으로 소외되어 왔다는 점에서도 주변적이다. 게다가 그는 IMF 위기 이후 두 차례나 생계를 위해 작업을 중단해야 했던 관계로 남들과 달리 자기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에서조차 소외된 채로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드문 경우이다. 그런데 이런 3중의 소외에도 불구하고 김영진의 작품들에서 끈질기게 빛을 발하고 있는 하나의 형상이 있는데, 이는 발터 벤야민이 "정지상태의 변증법적 이미지"라고 불렀던 것과 흡사하다. ●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은 헤겔식으로 지양되고 종합되는 과정적인 변증법에 반대하면서 대립하는 양극단들이 긴장을 이루며 하나의 성좌를 이루는 정지상태의 변증법을 갈파했고, 이런 관점에서 다양한 판타스마고리들에 의해 은폐되고 지워져 버린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을 역사적, 미학적, 철학적 분석을 통해 현재 시간과 마주치게 하려고 노력했다. 바로크 시대의 '비애극'과 19세기 파리 아케이드에 대한 분석을 1920~30년대의 유럽의 문화정치적 상황과 마주치게 하는 방식으로 '변증법적 섬광'을 일으켰던 그의 이론과 비평은 당대에 에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 몽타쥬,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브레히트의 '서사극' 등과 공명하면서 현대예술의 창작과 비평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그의 비평이론이 90년대 이후 날이 갈수록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데, 이 역시 앞서 말한 역사의 반복과 무관치 않다. 성좌적 변증법의 방식으로 극단적 긴장을 포착하려는 그의 사유야말로 낡은 것이 해체되는 동안 새로운 것이 부상하며 충돌하고 겹쳐지는 시기, 즉 역사적 이행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벤야민의 주요 작품들이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번역되면서 그의 사유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어 그가 말했던 정지상태의 변증법의 풍부함을 올바로 이해하고, 창작과 비평에서 '체화'해 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발터 벤야민의 정지 상태의 변증법에 관해서는『독일 비애극의 원천』(김유동 옮김, 한길사, 2009)에 실린 「인식비판적 서문」을, 역사철학에 관해서는『선집 5』(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에 실린「역사철학 테제」를, 미메시스와 언어에 관해서는『선집 6』(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을 참고할 것.) ●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상을 더디게 수용하는 국내의 인문학적, 예술철학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김영진의 작업이 유독 두드러진 빛을 발하게 된다. 1989년 그가 민중미술운동에 공개적으로 참여한 이후 현재까지 그의 작업에서 작용하고 있는 내적 형상화의 원리는 바로 "정지 상태의 변증법적 이미지"라고 밖에는 달리 지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이 원리를 항상 의식하고, 작품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충분하게 '체화'해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미흡하다는 것 역시 타당치 않다. 어떤 철학적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 예술의 과제라고 착각하지 않는 한 말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돋보이는 지점은 벤야민적인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사유와 평행하여(이에 비추어 볼 때 더 잘 이해된다는 의미에서), 90년대 중반 민중미술운동이 해체된 이후에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가 안팎으로 당면 해온 복잡한 갈등과 긴장의 역사적 이미지를 성긴 모자이크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형상화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진_거대한 체스판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0

3. 신자유주의 시대의 역사적 모자이크 ● 김영진의 작업에 반영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모자이크'는 대략 2004년을 기점으로 전과 후로 구분될 수 있다. 이 구분은 그가 주제 면에서 인터넷과의 인터페이스를, 그리고 방법 면에서는 디지털 페인팅을 새로운 형상화의 과제로 포함하기 시작했다는 데에 근거한 것이다. 「window」(2004), 「즐감」(2004), 「바탕화면 독도」(2008)가 전자의 산물이라면, 「공동경비구역」(2004), 「큰 아버지의 봄」(2006) 같은 작품들이 후자의 산물이다. 그가 2004년에 시작한 이와 같은 '인터넷'-'디지털 페인팅'-'아날로그 회화'의 삼각 인터페이스는 다양한 발전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는 디지털-아날로그의 대립을 양자택일이 아니라 오히려 양극의 상호침투라는 방식으로 '공속'시키기 때문이다. 「윈도우」와 「즐감」, 「바탕화면 독도」가 '디지털의 아날로그화'를 모색한다면, 「공동경비구역」과 「큰 아버지의 봄」은 '아날로그의 디지털화'를 모색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다. ● 이 순환구조는 아직은 단평면적이다. 이는 아마도 그가 2004년 이후 작업할 시간을 충분히 얻지 못했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다시 충분한 작업 시간을 확보한다면 이 순환구조는 다양한 형태의 중층적 구조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디지털 시대의 회화의 종말"이 아닌 "디지털 시대에 맞서는 새로운 회화"의 형식이 솟아날 가능성이 이 작품들에 잠재되어 있다. 더구나 이런 착상 자체는 국내에서는 '디지-로그'라는 형태의 담론(이어령)이 2006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디지-로그'적인 인터페이스가 2004년 이후와 이전을 구분해주는 차이인 데 반해, 여타의 회화 작품들은 9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정지 상태의 변증법'을 통해 한국사회의 역사적 갈등과 긴장을 '공시적' 이미지로 구성해내는 모자이크적인 작업의 연속성이다. 이 작업은 「분단의 기억」(1989~1994)에서 시작하여, 「미디어와 현실」(1991), 「브레이브 뉴 월드」(1995), 「이쾌대에 대한 경의」(1995) 같은 작품들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김영진_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11

사실적 재현 기법과 맞물린 이중적 스푸마토 기법은 근작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보여준다. 이런 형식은 「영원한 풍요」(2009)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정책의 마술사 '그린스펀' FRD의장이 멋쩍은 듯(금융위기의 실책을 인정하며) 안경을 치켜 올리는 유명한 모습과 교활하게 웃는 모습이 함께 병치되면서 토대가 해체되는 듯이 흔들리는 맨허탄의 풍경 위로 연기처럼 변형되면서 악마적인 형상들처럼 하늘로 확산되는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를 구성하는데 아주 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현실과 초현실을 중첩시키는 이중 효과는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불꽃의 크고 작은 원과 맞물려 회전하는 롤러코스트의 나선형 운동이 역동적으로 그려진 「롤러코스트 자본주의」(2010)에서는 더욱 극대화되고 있다. 사람들을 태우고 불꽃놀이 속을 현란하게 회전하는 롤러코스트는 상승과 하강의 반복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의 상징적 이미지로 극화되고 있는 데 반해, 통제를 벗어난 그 회전 운동의 속도를 조율하기 위해 소집된 G8 정상회담에서 걸어 나오는 선진국 수뇌들은 사실상 허깨비 같은 존재로 느껴지게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있다. ●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과거와 같이 파편화된 모자이크 형태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불꽃과 사람의 이미지가 롤러코스터에 실려 회전하는 형태와 붉은 색의 터치들이 맞물려 가속화되면서 강한 운동감과 함께 형태적 통일감이 강화되고 있다. 파편적 모자이크나 꼴라쥬 방식보다는 서로 병치된 이질적 이미지들이 서로 삼투하여 더 강한 통일감을 만들어내는, 이런 몽타쥬 방식은 「거대한 체스판」(2010)에서 더 선명히 드러난다. 브레진스키의 책 제목 『거대한 체스판』을 그대로 작품 제목으로 빌려온 이 작품은 부시나 오바마의 얼굴을 거대한 체스판 위에 장기 말과 함께 병치시킴으로써 민주당이나 공화당 모두가 실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유비를 시각화하고 있다. 특히 그림 상단에 있는 뉴욕 월가의 황소(조각)가 힘차게 내뻗은 두 다리에 밀리고 있는 듯한 오바마의 고뇌에 찬 얼굴이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거센 압력을 실감나게 해준다. ● 위의 그림들이 동시대의 거시적 요동을 압축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면, 「껍데기 」(2009)나 「수영장에서」(2009)같은 그림들은 일상의 단면들을 미세하게 '미분적분'하듯 조탁하고 있다. 「껍데기」는 돼지 껍데기와 돼지고기 갈매기살을 굽는 장면을 클로즈업 한 그림인데, 고기판 뒤의 빈 공간에는 영화 『선 씨티』의 마초적 영웅주의를 그린 환각 같은 장면이 고기판과 마치 하나의 시공간처럼 용해되어 몽타쥬되어 있다. 「수영장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서울 강변 수영장의 한 장면과 헐리웃 영화 『300』에서 그리스 병사와 페르시아 병사가 창과 방패를 들고 대적하는 한 장면이 반은 초현실적이면서도 반은 현실적인 느낌이 들게 배경색과 맞춰서 반쯤 투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김영진의 최근 작에서는 묵시록적 혹은 미래의 불안이나 환타지를 주제로 하는 헐리웃 영화의 이미지들이 일상생활에서의 소비와 여가의 시공간과 함께 용해되어 현실적 순응과 초현실주의적인 욕망이 상보적으로 순환하고 있는 모습들을 재현하는 데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winner takes all」(2010)에서는 죽기 살기로 싸워 살아남아야 하는 '승자독식'방식의 현단계 자본주의의 단면이 격렬하고 표현주의적인 터취로 그려져 있다.

김영진_수영장에서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09

4.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성좌 ● 최근작들을 형식적 측면에서 과거와 비교해 보면 분명히 알레고리적인 모자이크 방식에서 이질적 이미지와 시공간이 상호침투하는 몽타주적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몽타주 방식 역시 넓은 의미에서 개별 작품을 넘어서 전체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예술의지', 즉 몰락하는 시대 속에서 대립적인 것들 간의 '변증법적 성좌'를 포착하려는 '예술의지'라는 벤야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독일비애극의 원천, "표현주의와 마찬가지로 바로크는 본래적인 예술적 훈련의 시대이기보다 줄기찬 '예술의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른 바 몰락의 시대는 늘 그렇다. 그것은 예술들이 '몰락'하는 시대들, 예술들을 '욕구'하는 시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로이스 리글은 이 용어를 로마제국 말기의 예술에서 발견했다. 이 의지는 형식만이 접근할 수 있으며 잘 만들어진 개별 작품은 결코 접근할 수 없다. 이 의지 속에 독일 의고전주의 문화가 붕괴한 이후의 바로크의 현재성이 그 근거를 둔다...지금이나 당시에나 그러한 신조어들 가운데 많은 것들에서 새로운 파토스를 표현하려는 갈망이 드러나고 있다. 작가들은 언어의 특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은유가 솟아 나오는 내밀한 이미지적 힘을 개인적으로 전유하려 했다."(77쪽) "바로크 시대의 번역가들은 가장 장력한 표현들을 찾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늘 그렇듯이 이러한 강압성은, 그 속에서 진정한 내용을 담은 완성된 형식의 표현 같은 것이 고삐 풀린 힘들의 갈등으로부터는 좀처럼 쟁취될 수 없는 어떤 문학적 생산의 징표이다. 그와 같은 찢겨짐 속에 오늘날은 바로크적 정신상태의 어떤 면들을 예술 활동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반영한다."(78)), 개별 작품들 하나하나가 모두 동시대의 '역사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모자이크 단위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과거에 비해 차이가 있다면, 그 모자이크 단위의 범위가 '세계화'됨과 아울러, 내용적인 밀도는 더욱 높아지고, 기법은 더욱 치밀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벤야민을 인용해 보자면 김영진의 작업의 가치는 최근 그가 사실내용들의 세목에 더욱 '미분적'으로 침잠하는 것과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 "모자이크의 가치가 유리용질의 질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현의 광휘는 그러한 사유파편들의 가치에 달려 있다. 미시적 가공작업이 조형적 전체성과 지적 전체성의 척도에 대해 갖는 이러한 관계는, 진리내용이란 사실내용의 세목들에 가장 엄밀하게 침잠할 때 비로소 파악될 수 있음을 웅변해준다."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38) ● 그런데 그가 최근에 천착하고 있는 '사실내용'의 세목들에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 풍경들이 추가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햇살이 밝게 비치는 넓은 공터에 차들과 가로수가 고즈넉하게 그려진 한낮의 가로 풍경, 아이와 엄마가 걸어가고 있는 학교 옆 거리의 한적한 풍경, 2~3미터 간격으로 마주보고 있는 붉은 벽돌의 다세대 주택 사이 공간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 한그루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서 있는 장면을 앙각으로 포착한 두 개의 미디엄 쇼트로 구성된 풍경들이 그것이다. 이 작은 풍경화들에는 모두 「대화동」이라는 무난한 제목이 붙어 있다. 이렇게 평범한 풍경들의 이미지는 햇살 밝은 풀밭 위에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는 초등학생의 모습을 디지털 페인팅 기법으로 그린 「큰 아버지의 봄」(2006)의 화사한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개개 작품만을 놓고 보면 이 잔잔하고 고즈넉한 이미지들은 앞서 언급했던 붉은 색과 검은 색을 주조로 한 우울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풍경들과는 상반되거나 전혀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상반되거나 무관해 보이는 여러 사실내용들을 함께 모아서 맞춰 보면 어느 순간 하나의 커다란 별자리가 보인다. 이 별자리가 바로 벤야민이 말한, 단편적 사실내용들이 모여서 하나의 진리내용을 형성하는, '정지 상태의 변증법'에 의해 형성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극단화된 모순들의 성좌라고 할 수 있다. 김영진의 개별 그림들은 이런 이유로 전체 그림들이 이뤄내는 성좌에 비추어 '겹눈으로' 보아야만 그 '배가'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각각의 그림들을 다른 그림들에 '대한' '숨겨진 차원'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 '겹눈'으로 보아야 그 숨겨진 다른 차원이 함께 보이는 '배가'의 방식은 앞서 말한 '디지-로그'적인 형식면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사진으로만 보면 '페인터'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타블렛(펜 마우스)을 사용해서 그린 이미지를 캔버스에 프린트한 것(「큰 아버지의 봄」)과 캔버스에 붓으로 직접 그린 그림(「대화동」)을 식별하기가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컴퓨터로 그린 것이 붓으로 그린 것처럼, 붓으로 그린 것이 컴퓨터 그래픽처럼 보이기도 한다. 향후 프린팅 기술은 대형화면의 경우에도 양자의 차이를 식별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발전해 나갈 것이다.

김영진_껍데기_캔버스에 유채_112×146cm_2009

5. 새로운 비판적 리얼리즘의 개화를 기대하며 ● 알레고리적 모자이크이든 상징적 몽타주이든, 개별 작품들이 모여 하나의 성좌를 이루든 낱낱의 작품 내에서 그 성좌가 반복되든, 이 모든 방법들은 복잡한 현실과의 연관관계(관념적, 감정적, 혹은 신체적 연관관계)를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정지 화면'내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강조하고, 기술하고 체험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이렇게 현실과의 '비판적 연관관계'라는 화두가 김영진의 전 작업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영진의 화법은 쿠르베 이래 현대미술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한 리얼리즘의 긴 전통에 속해 있다. 이때 그 현실적 연관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반쯤 혹은 상당부분 추상화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한때 오해한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80~90년대 우리 화단에서 있었던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상당부분 기법이나 양식이라는 국소적 문제를 방법론적 전체틀 혹은 알로이스 리글이 말했던 "예술의지"를 포함하는 "문제틀"(problematics) 전체와 혼동하는 데서 발생했다. ● 문제틀이란 곧 화가가 세계와 자신의 그림의 관계를 바라보는 의식적-무의식적 문제의식과 그 해결을 위한 방법론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19세기 중반 이후 모든 회화는 리얼리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될 수 있고, 전성기 모더니즘 회화의 일부를 제외한다면 20세기 회화적 성과의 상당수는 리얼리즘적인 문제틀에 입각하여 판단될 수 있다. 이 경우 구상과 추상, 단일매체와 혼합매체와 같은 다양한 형상화 기법들은 그 상위의 문제틀의 필요에 의해 활용 가능한 하위 범주로 위치지울 수 있겠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현실과의 비판적 연관관계를 화두로 삼는 리얼리즘적인 회화는 시대 변화에 따라 적합한 방법과 매체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 방법과 매체의 변화에 현혹되면 마치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듯이 리얼리즘이라는 문제틀을 놓치게 될 것이다. 현실과의 비판적 연관관계라는 문제틀을 놓칠 경우 기술복제적 이미지의 스펙타클과 디자인의 시대인 현대사회에서 회화는 별도리 없이 '장식'과 '상품'이라는 범주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 ● 여기서 현실적 연관관계라고 할 때 그 현실의 의미는 단지 동시대 사회현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 현실, 심리적 현실, 자연적 현실과 같은 다양한 차원들이 함께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한때 완전히 무시되었던 전통 산수화나 문인화가 21세기에 와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도 전통 회화의 근간을 이루던 자연과의 인터페이스나 신체적 화용론의 문제가 오늘날과 같은 생태위기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현실적 연관을 지닌 시대적 화두(생태론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미결 상태로 남아 있는 80년대 미술운동의 대다수 과제가 2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새로운 비판적 회화의 파도에 의해 재조명되고 재구성되고, 해결의 길을 찾게 될 가능성을 점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김영진_폭주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1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 이래 세계는 점점 더 큰 카오스적 요동 속으로 휩쓸려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한 세기 전과 유사한, 세계사적 이행에 직면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행기에 적합한 회화란 어떤 것인가? 앞서 말한 "디지-로그"적인 방식으로 비판적 리얼리즘의 혁신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김영진의 작업을 통해 조심스럽게 점쳐 볼 수 있겠다. 그런 방식으로 대립항들의 변증법적 긴장이 단층적이 아니라 중층적으로 하나의 매체 속에서 '콘트라스트의 콘트라스트'를 반복하며 심화되고 약동하는 새로운 회화적 양식들이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회화적 양식의 미래를 다시 벤야민을 인용하여 개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문화사적 변증법을 위한 작은 방법론적 제안. 각 시대에 대해 여러 '영역'에서 특정한 관점에 따라 이분법을 수행하기는 아주 쉽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그 시대의 '생산적인', '전망 있는', '생생한', '긍정적인' 부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실패한, 낙후한, 사멸된 부분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 긍정적인 부분을 부정적인 부분에 대비시킴으로써 긍정적인 부분의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정은 살아있는 것, 즉 긍정적인 것의 윤곽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그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이처럼 미리 배제된 부분에 대해 새로이 이분법을 적용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니까(척도를 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약간 전치시켜 그 부정적 부분에서도 이전과는 달리 다시금 긍정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이런 작업을 무한히 계속하여, 과거 전체를 역사적 완전복구 속에서 현재로 불러낼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발터 벤야민 『선집 5』의 옮긴이 「해제」; N 1a, 3=V, 573) ● 지난 30년간 김영진의 회화적 화두였던 리얼리즘의 문제틀은 이렇게 긍정과 부정을 반복적으로 대치시키는 긴 호흡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그 호흡은 크고 작은 진동수와 파장을 가진 물결을 이루고 있는데,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격렬했던 그 파도가 한동안 잦아들었다가 최근 들어 더 정교하고 치밀한 방식으로 커져가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 그에게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적당한 시공간만 주어진다면 그 파도의 깊이가 더욱 심화되고 폭이 확장될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이럴 경우 그가 80년대 초에 사용했던 개념미술과 설치미술의 방법들도 충분히 재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입체적 작업들을 통해 21세기 이행기에 내재한 긍정적-부정적 계기를 더욱 명료하고 입체적으로 치밀하고 힘차게 조망하여 대중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데 기여할 비판적 리얼리즘이 긴 어둠을 뚫고 새롭게 개화하기를 기대해 본다. ■ 심광현

Vol.20120210e | 김영진展 / KIMYOUNGJIN / 金榮鎭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