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2_0201_수요일_06:00pm
갤러리라메르 신진작가창작지원展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3층 Tel. +82.2.730.5454 www.gallerylamer.com
시계로부터 해방된 시간 ● 시간을 본적이 있는가? 인간은 거울을 통해서야 제 얼굴을 볼 수 있듯, 시계를 통해서 시간을 본다. 시계로 나타나는 시간은 자연에 의거하기 보다는 인간들끼리의 규약이다. 이 규약은 예술작품 속에서는 종종 변경된다. 이정아의『만들어진 시간(Intended time)』전은 기계적 시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삶의 변경을 꾀한다. 전시에 나오는 시계는 암흑의 우주 속에서 별이 반사하는 빛의 궤적을 포착하는 천체 사진처럼,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시간의 진동을 추적한다. 사진과 설치 등으로 만들어진 전시에는 시계추 외에 나무 이미지도 등장한다. 흑백 모노톤의 평면 속에서 시계추는 흔들리고 있으며, 나무는 실루엣만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공간 속에 흔적으로 남긴다. 시계추는 좌우로 진동하고 있으며, 나무는 부름켜를 키워가며 나이테를 늘려갈 것이다. 인간의 의식에는 명료히 각인되지 않은 이 시간 현상을, 작가는 그것이 펼쳐지는 공간의 단면을 드러냄으로서 표현한다. 시계추는 기하적 이미지가 나무는 유기적 이미지로 대조를 이룬다. 흑백 모노톤에 잠겨 진 '만들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리는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자 하며, 작업을 통해서 '되찾아진' '근본적인 시간'(프루스트) 속에 잠겨 있는 것들을 그린다.
공간예술에 속하는 미술과 달리, 시간예술에 속하는 문학이나 음악에서는 시간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A.A 멘딜로우는 「시간과 소설」에서, 시간을 주제로 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예술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프루스트는 사고의 양식을 통어할 수 있는 시간의 힘과, 사고를 시간의 지배로부터 구해내는 직관의 힘에게 동시에 매혹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사건과 회상의 시간 사이에 개재되는 경험으로 인하여 과거는 수정된다. 그래서 순수한 과거는 되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일어난 당시에는 정신이 미치지 못했던 사건이 있다. 이것이 사고라는 화학작용을 거치지 않고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어쩌다가 우연한 연상 작용이 이것을 망각으로부터 되살려 낼 때 이것은 원래의 형태대로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고, 그럼으로서 시간에서 해방된다. 시간과, 시간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된 과거를 되찾는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직관을 발전시키는 것--사건을 무시간적으로 만드는 것--이 프루스트의 목적이며, 그 작품 전체의 지표라는 것이다. ● 째깍거리는 시계로부터 해방된 시간은 이정아의 작품 주제이다. 사진이라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기계 눈 시점은 의식의 배후에 있는 시각적 무의식을 기록한다. 이 의식되지 않은 것들이 의식적 존재를 규정한다. 만물은 시간 속에 산다. 인간은 시간의 시험 하에 있다. 우리는 매 순간 갱신되거나 퇴행한다. 예술작품 또한 시간이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정아의 작품에서 시계는 기계 부품으로 나타나며, 기계적으로 분절화 된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녀에게 시간은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만들어져야 할 미지의 것에 속한다. 진동하는 시계추가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실루엣과 무한한 연상의 사슬을 낳는 숱 많은 나무의 복잡한 실루엣이 대조하는 바가 그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미세한 굴곡을 더 다양하게 음미하고 살고 싶지만, 대부분 시간에 떠밀리며 그 결과는 기계적으로 분절화 된 존재이다. 생산력을 중시하는 사회가 원하는 인간이 바로 이러한 부류이다. 누구에게도 1분 1초가 똑같듯이, 누구와도 대체될 수 있는 노동자와 소비자는 자신에서 비롯되지 않은 거대한 체계의 부품들일 뿐이다.
이정아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시계로부터 분리된 시계의 추는 어떤 특정 시간이 아닌 익명적 시간을 가리킨다. 작품 속 나무는 슬라이드 돌아가는 소리나 째깍거리는 시계보다는 긴 시간대를 상징하고 있지만, 창문처럼 연출된 프레임 안에 배치되면서 의식 속에 진입한다. 단촐하게 표현된 빈 무대 같은 공간들은 작가 및 관객의 기억과 연상 속에서만 활성화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은 180×120cm로 확대된 사진 5장이 나란히 걸린 작품이다. 낮에 찍었지만, 밤처럼 어두운 흑백 화면은 블랙 미러 처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비추며, 시간 만들기에 동참시킨다. 흐트러진 머리칼 같은 나무의 실루엣과 검은 기둥처럼 드러나는 시계추의 대조는 어스름한 풍경 속에서 긴장감을 자아낸다. 거기에는 자연과 인공,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대조가 있다. 양자가 대결적 구도인지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려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도 예술도 모두 이 두 가지 항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선악의 이분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작품 속 시계추는 나무 보다는 동적이며, 그 역동적 궤적을 통해 이야기한다. 광량과 셔터 스피드에 따라 움직이는 시계추로 말미암은 빛의 궤적은 다양하다. 지구가 회전하는 것을 실제로 지각하기 힘들 듯이, 시간의 흐름 또한 그러한데, 작가는 이 시간의 흐름을 지각할 수 있도록 추의 진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정아의 작품에서 공간화 된 시간은 여러 사물과 자연, 그리고 상황과의 만남을 통해, 단순한 선율적(melodic) 계기를 넘어서, 화성적(harmonic)이고 다성적(polyponic)인 울림을 낳는다. 동시화(synchronize)된 시간은 단순한 선적 흐름을 복합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작품 「만들어진 시간_순간」(2011)은 여러 진폭으로 흔들리는 궤적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만들어진 시간_흐름」(2009)은 진자의 궤적이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가른다. 「만들어진 시간」(2010)은 나무 실루엣과 진자의 흔적이 조합된다. 「만들어진 시간_순간」(2010)에는 다양한 두께와 진폭으로 포착된 진자가 있으며, 「만들어진 시간_정지」(2009)는 추가 공간 속에 정지된 모습이다.
부채 살 같이 펴지는 시간의 주름이 선명한 작품 「만들어진 시간_흐름」(2009)에서는 천정으로부터 빛의 공간이 열리는 듯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최초의 빛이 천지를 가르며 시간 또한 시작되는 것 같은 숭고한 풍경이다. 「만들어진 시간_연상」(2011)은 나무 실루엣과 추의 궤적 위에 흰 사각형도 보이는데, 그 사이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기하학적인 선이 인공과 자연 모두를 같은 시간의 주기 아래에 포섭한다. 3개가 한 쌍인 설치 작품 「만들어진 시간」(2011)은 시계 환이 자리할 가운데 부분에서 식물이 쏟아져 자라게 한다. 구획된 경계를 넘나드는 시간의 신축성은 자연의 편에 있다는 점이 암시된다. 이정아의 작품 속 화분은 나무의 축소판으로, 시계추와 대조되는 이미지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만들어진 시간을 위한 드로잉」(2011) 시리즈는 방이나 건축을 떠오르게 하는 기하학적으로 구획된 바탕과 그 안의 의자, 화분 같은 소품을 통해 구조, 부재, 흔적 같은 주제를 표현한다. 이 심심해 보이는 빈 무대에도 어김없이 진자 자국이 공간을 날카롭게 베어낸다. 공간 속의 상흔 역시 시간에 의해 아물 것이다.
작품 속 시계는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나타나며, 해체된 모습이다. 그것은 근대 이후에 인간들의 삶을 일률적으로 규정해온 보편적인 시간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작가는 시간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휙 보내버리기도 하고 진한 밀도를 부여하기도 한다. 근대의 보편적 시간이란, 세계, 아니 우주 자체를 '장엄한 시계장치'로 생각했던 뉴튼 이래 절대적이 되었다. 근대과학은 단일법칙 체계의 적용을 받는 세계를 기술하는 방식이다. 반면, 현대과학에서 시간은 그 준거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라 인식하지만,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고차원이 아닌 일상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절대적인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다. 시간은 동질화되면서 보다 가속화된다. 세상은 시간으로 간주되며, 속도는 성공의 척도가 된다. 예술작품의 시간적 요소를 탐구한 한스 메이어호프에 의하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고대적이고 중세적인 상들은 영원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원성은 근대에 급격히 몰락한다. 영원성이란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영원토록 불변하고 영생을 약속하는 신국이라는 틀로, 철학적인 차원에서는 영원한 진리와 가치라는 틀로,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봉건제처럼 영원하고 고착된 사회 정치적 구조라는 사회적 틀 내에서 그려졌다. ● 그러나 현대성은 이러한 영원성을 비판한다. 근대에 와서 시간은 삶의 보편적인 조건이 되었다. 진보는 시간이 풍요를 낳는다는 믿음이다. 아방가르드 역시 진보의 신화에 대한 믿음과 전진을 향하는 선적인 시간 개념과 관련이 있다. 근대는 처음으로 변화를 고양시켰다. 이정아의 작품에서 가속 페달을 밟는 직선적 시간은 다시금 시간 환(chronological looping)으로 되돌아온다. 이 시간 환은 그 출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작품 속 시간의 방향은 예측할 수 없는 비인과적 연속이 되어간다.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 즉 지각된 시간이다. A.A 멘딜로우는 현대예술이 이러한 지각적 시간을 강조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절대적 시간 간격이 아니라, 감각 인상의 순수한 계기의 순서에 의해 판단한다. 예술 작품 역시 사랑이나 죽음처럼 심장 박동 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시간을 마음속에 생겨나는 연속적인 생각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자 육체처럼 유동하는 시간의 궤적으로 기록한다.
이정아의 작품에는 시간의 빛나는 첨점(pin-point)이 나타나 있다. 멘딜로우는 현대 소설에 종종 나타나는 이 시간의 첨점에 대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순간에 과거의 시간 전체를 자체 안에 끌어들이고, 영원한 현재, 포괄적 지금이 되어 버린다고 해석한다. 수없는 순간, 잃어버린 세월, 기억되지 않은 시간들을 기록하지만 불변하는 형태를 가지는 시계추는 이정아의 작품 속 도처에 편재한다. 화면은 잃어버린 빛나는 형상들이 명멸한다. 잃어버린 시간들은 사진적 형식을 통해 한데 모여 있다. 관객의 의식을 집중시키는 시간의 첨점은 흐릿한 흔적을 넘어서 강도를 획득한다. 이 시간의 첨점의 강도에 대해 현대 예술가들은 현재나 과거와 달리, 작가가 불변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세 번째 요소로 간주했다. 이것은 '인생의 덧없음이나 그 생애가 그렇게도 짧다는 애석함 등과는 강한 대조를 이루는 영원불변의 시간'(버지니아 울프)였다. 현대의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직관의 순간들은 이 세 가지 요소가 눈부신 통찰의 섬광 속에서 만나 하나로 융합되는 점이 나타난다. ● 이러한 맥락에서 이정아의 작품 속 나무는 격세유전적인 상징이 된다. 그것은 개별적인 나무가 아니라, '인류의 집단적인 정신구조'(융)라 할 만한 것과 일치하는 하나의 유형이다. 무시간적 형상과 형식을 각인하는 시간의 홈(time-coulisses)이다. 그것은 자아처럼 소멸하여 원형 속으로 되돌아갔고 되풀이해서 살았다. 멘딜로우는 현대 소설에 나타나는 '시간의 홈' 개념을 설명하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은 이제 육체 속에서 현재가 되어 그 근본과 일치되게 반복된다고 본다. 이정아의 작품 속 나무는 시간 속에서 자기정체를 잃어버린 자아와 합체되는 현기증 나는 이미지이다. 언젠가 본 것 같은 장면들은 이정아의 작품 속에 편재한다. 소설 「장 크리스토프」에 나오는 한 대목--'그는 이미 옛날에 두 그루의 나무와 그 호수를 본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현재의 일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때의 일이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여러 세기가 그의 가슴 속에 소용돌이쳤다'(로망 롤랑)--처럼 이정아의 작품에서 공간적 형태와 시간적 형성물은 중첩된다. 이 시간의 홈은 인생과 역사를 압축한다. '만들어진 시간' 전은 똑같은 시계를 보는 우리가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를 묻는다. ■ 이선영
Vol.20120204g | 이정아展 / LEEJUNGA / 李淨娥 / photography.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