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된 나의 풍경

이미현展 / LEEMIHYUN / 李美炫 / painting   2012_0201 ▶ 2012_0207

이미현_비행술_한지에 수묵채색_70×62.5cm_2010

초대일시 / 2012_0201_수요일_06:00pm

갤러리이즈 창작지원 프로그램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이미연 작가와의 대화 ● 시대와 장소를 떠나서, 그림 한 점에 흡족한 것 보다는 계속해서 다음 작업이 기대되는 그림이 더 생명성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언제나 13살의 젊은 나이에 멈춰 있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질병이며 결과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고 그러면서 얻게 되는 외모와 인격과 지혜가 아름답습니다. 작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역사성을 갖게 되며 그것이 한 세대를 넘어서 인간의 나이를 넘어서는 어떤 힘을 갖게 되는 존재가 됩니다. 일컬어 명화라고 하지요. 아무리 난해한 현대작품이라 하고 미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100년이 지나고 500년이 지나게 되면 다시 미술사에서 예술작품으로 읽혀지기도 하고 모나리자와 같이 클래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작품의 가치를 단편적인 한 장의 결과물에 두기보다는 작업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로서 작품성을 깊이 있게 하는 데 관심을 둬야 합니다. 혹자는 동양의 미술과 서양의 미술을 끈덕지게 구분하고 분리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미술사의 갈래가 다른 양상으로 전개 되었으니 그런 연구는 옳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서양의 것과 동양의 것이 다르니 서로 융합하고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이것 또한 건강한 시도입니다. 예술의 범주에서 정답이라는 건 없으니 모두가 맞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오답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닌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우리는 종종 자신의 의식을 마취시켜가며 그런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의심을 해 보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과연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작업 방식이 자기를 속이거나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따져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종화의 시조를 당나라 이사훈이라 하고 남종화의 시조를 왕유라 합니다. 또 옛 산수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며 관념적이고 사유에 침잠되어 있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이미현_Viking_한지에 수묵채색_73×70cm_2010
이미현_마로니에공원_한지에 수묵채색_130×162cm_2010

여기서 정말 그런가를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질문하는 행위가 소위 말하는 현대미술의 시작인 것이지요. 특히, 그림을 그리고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더욱더 절실한 문제입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대하는 입장은 미술의 역사가 미술을 보는 시선과 확연이 다릅니다. 어떤 철학자는 예술의 종말을 언급하였습니다. 특히, 평면 작업에 대하여 전근대적이고 고리타분한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동시대에 평면을 하는 작가들이 존재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며 그 전체를 부정하거나 무의미한 작업으로 일관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아닌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에서 편견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는 행위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역사에 남던 아무도 모르게 묻히던 비교의 대상이 아니지요. 순수한 예술에서 이름과 명예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업을 할 때 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의도나 사심이 들어가게 된다면 거기서 쾌는 불투명한 쾌가 될 것이며 다시 말해 명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건 스스로가 감독자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작품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들고 예술작품화 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준거가 됩니다.

이미현_대학로_한지에 수묵채색_130×162cm_2010
이미현_한강공원_한지에 수묵채색_50×49.5cm_2011

필자는 작가와 대화를 하면서 이런 것들을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화면에서 전통성과 현대성을 충돌시켜서 발생하는 이상화된 풍경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 풍경은 자연의 그러한 풍경이 아닌 뭔가 인위적이고 인공적이며 조성된 자연의 풍경이라고 합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손 안의 자연입니다. 구체적으로, 손 안의 자연은 공원이나 정원, 시가지에서 발견됩니다. 이런 시선으로 작업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단지 거기서 머물게 된다면 그림은 심심해 지게 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차갑도록 객관화 시키고 타자화 시켜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본 시선에 갇혀, 그것이 활동하지 않는 관념의 나락이 돼 버린다면 그림은 도식화된 사유를 전개한 모양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일상에서 무엇인가 발견한다는 건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쾌든 불쾌든 간에 예술가들은 그것을 작품으로 옮기려고 하며, 그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게 있는데 이미지를 이미지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죠.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을 하게 되면 이미지의 힘이 쇠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미지가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전공과 도구와 여건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미지가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바깥으로 손을 뻗혀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현_한강공원_한지에 수묵채색_50×50cm_2011
이미현_올림픽공원_한지에 수묵채색_162×260cm_2010

작금의 화단에서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화 혹은 동양화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지적이 자신으로부터 온 기준인지 그림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묻게 됩니다. 이런 비판이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에게 선입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지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는 전혀 무관한 논쟁들이라는 것입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그 속에서 화면이 요구하는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데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작가는 정원이나 공원과 같이 손 안의 자연을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작가의 입을 빌리면, 인간은 누구나 자연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라도 자연스러운 풍경을 재현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그게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또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 스스로는 자신의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화면이 불러일으키는 언어로 일치시키느냐가 관건이며, 그 이미지가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대표할 수 있는가를 처절하게 자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돌파구로 필자와 작가는 본 작업들에 관하여 두서없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입장을 강요하거나 선입감을 불러일으키는 대화는 작가의 작업 방향과 세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것이 비평은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진중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작업이 된다면 이것이 순수한 예술을 하는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 김용민

Vol.20120204d | 이미현展 / LEEMIHYUN / 李美炫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