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구성수_김홍주_박승훈_박영근_변연미 신미경_심승욱_유승호_정광식 한영욱_함명수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작가는 물질과 씨름하며 정신과의 합일 혹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 다른 차원의 지점과 조우하는 순간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그 어떤 쾌를 작품을 통해 쏟아낸다. ● 우리 시대와 사회가 그렇듯이, 동시대미술에서도 유행처럼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표현이 난무하고 급증하고 있다. 유행이 그러하듯 일정한 시기-물론! 안타깝게도 짧다-가 지나면 그 자리에 새로운 유행이 구식이 된 지난 유행을 밀어내고 자리를 잠시 차지한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그 자리를 내준다. 주기는 빨라지고 모양새는 변덕스럽다. 과연 예술이 이런 것이었던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 가치 있는 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어디쯤에 적용할 수 있을지 무색해진다. 이 시대의 미술에서 얇고 가벼운 무드가 급증하는 것을 환기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매체의 뿌리인 물질과 물성(物性)을 주목하고자 한다. 뒤샹이나 개념미술 이후로 미술에서 물성이 점차 그 비중을 잃어가는 것이 큰 경향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물질과 물성은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러하다. 대신 그 물질을 대하는 작가들의 태도나 중요성은 그 이전과는 또 다른 양상일 것으로 판단된다. 물질적 상상력이 충만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물성의 진화를 보고, 그들의 태도의 의미와 가치를 살피고자 한다. 이 전시는 작품 안의 물질과 이에 대한 태도를 들여다 보는 자리이다. ● 작품은 작가의 창의력에 그것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근원인 재료와의 물적, 정신적 결합에 의해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재료와 그 물성을 다룸에 있어서는 무한한 가능성과 확장성을 안고 표현될 수 있다. 재료의 물성에서 오는 다양하고 풍부한 그 '가능성'이 곧 물성이 지닌 가능한 '틈'이다. 여기서 말하는 틈은 결핍이나 부재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오히려 기회와 가능성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는 능동적 의미로 작동된다. 그 능동적 가능성을 확장시키며 넘어서는 일이 '물성의 틈을 넘다'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작품의 재료(물질)가 드러내는 물성의 접근에 있어서, 그것에 반응하고 해석해 연마하는 과정과 태도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단순히 독특한 소재로 시각적 유희를 선사하는 작업이 아닌, 매체의 그 본질을 마주하기 위해 몸으로 끊임없이 밀고 당기고 전진하는 가운데 물성이 작동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진화'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 물성의 틈을 넘는 과정은 물질과 작가와의 운명적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끊임없는 둘 사이의 관계 맺음 속에서 완성되어 간다. 그 관계 맺음은 한낱 돌을 부단히 쪼고 갈아내며 빛나는 옥이 되는 과정처럼 고난하고 수고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예술가가 다루는 물질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가는 절차탁마切磋琢磨! 물성과 그것이 지닌 내재적 힘의 세계를 살리고, 부활시키고, 물(物)의 한계와 경계를 시험하고, 극복하고 뛰어넘는다는 측면에서 이것은 주목해야 할 영역이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데 있어 놓쳐서는 안 될 의미심장한 일은 여기서 발아한다. 그랬을 때 창작에 있어 그 물성이 작가의 정신과 결합해 어떤 새로운 세계를 이루었는지를 짚어 본다면 우리는 충분히 한 예술가의 온전하고 치열한 세계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의 세계에 들어서 함께 호흡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온전한 자기를 찾아가는 길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놓치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기'가 필요하다. '천천히', ... 그리고 '깊이' 들여다보는 일만이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 예술작품이란 결국 한 인간이 창조한 고귀한 세계이며, 감상자는 이를 마주하고 느끼며 자신에게도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나는 일이다. 그 세계를 마주하고 들여다보는 것에 전시는 빛나는 작은 목표가 있다. ●『절차탁마, 물성의 틈을 넘다』展에 참여하는 11인의 동시대 예술가들은 회화, 조각, 사진 등 크게 세 분야에서 본 전시의 기획 의도에 부합하고 있다. 김홍주, 박영근, 변연미, 유승호, 한영욱, 함명수는 회화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매체의 물성과 그리기의 본질을 탐구, 연마하고 있으며, 조각 분야의 신미경, 심승욱, 정광식은 각기 다른 물성에 대한 의미심장한 태도로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리고 구성수, 박승훈의 작업은 사진에서는 드물게 매체 고유의 물성에 도전적이고도 실험적인 태도로 작품 영역을 열어준다. 이들은 각기 매체와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다루는 물질과 그 성질을 끊임없이 탐구, 연마하며 매체의 물성의 틈을 넘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함께 그들의 유의미한 태도를 주목하고자 한다.
김홍주의 작업에서는 꽃이든 잎이든 그 형태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들어서 있다. 여백이 차지하는 미(美)는 소외되지만, 형태가 공간을 장악하는 현장에서는 어떤 뭉글거림과 웅얼거림이 작동되는데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 피어나듯 그것들이 솟아오른다. 또한 솟아오른 그것이 부유하다 잠시 멈춰선듯한 짧은 순간을 포착한 듯 작품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동시에 담겨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다듬어진 색조와 필들의 만남에서 이런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 같다. 세필로 끊임없이 집중해 그려내며 공간을 꾸준하게 밀어내고 채우는 행위적 그리기는 회화란 매체의 본질과 의미를 지속적으로 묻는 과정 안에 있다. 어떤 대상을 그렸냐는 주제와 소재의 문제보다 앞서는, 그리기 그 자체의 경계와 의미를 집요하게 물으며 그 안에서 사유를 발생시켜내는 과정이 곧 형태로 완성된다. 이랬을 때 그의 형태는 결과로써의 형태로만 인식되지 않고, 그리기 자체가 지니는 '존재의 고유성'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 앞에 마주하는 단 하나의 가득한 형상 앞에서 붓질의 미세한 떨림들이 번져나며 대상의 경계 밖으로 뻗쳐 나갈 때, 화면의 크고 작음을 떠나 질서와 조화로 펼쳐진 코스모스를 느끼게 해준다.
박영근은 다양한 고전작품이나 상징성을 담고 있는 익숙한 이미지를 차용해 대상에 대한 시간과 속도의 관점에서 회화에 접근하고 있다. 그가 대상으로 삼는 우리에게 익숙한 상징적 이미지에는 오래된 시간성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데, 멈춰버린 그 시간성을 벗겨내며 오늘의 현재로 가지고 와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그 과정에는 전동 그라인더나 핸드밀러를 이용한 독특한 기법이 적용된다. 그는 그라인더를 이용해 먼저 그려진 화면 위를 덮고 있는 두터운 물감층을 빠르게 밀어내고 벗겨낸다. 캔버스 위를 자유자재로 그라인더가 지나가면서 붓질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속도감을 담은 날카로우면서 유연한 선(線)들이 생기고, 화면은 역동적이고 거침없는 에너지의 흐름을 타게 된다. 작품 안의 동적인 대상은 그 역동성이 배가되고, 정적인 대상 또한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흐름을 타며 충만한 에너지를 품게 된다. 이렇게 됐을 때, 마치 대상으로부터 파장력을 지닌 에너지가 품어져 나와 감상자에게까지 닿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회화 안에서 시간과 속도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을 적용시켜 풀어내고 있다.
유승호의 작업은 저만치 멀리서, 이만치 가깝게 바라보기의 이중주적 요소가 들어있다. 아스라한 묵빛을 담아낸 전통산수의 고즈넉함이 먼저 느껴지지만, 좀 더 깊이(?) 감상하기 위해 가깝게 다가가 보면 그만 폭소(爆笑)를 터뜨린다. 둥, 슈우, 야~호, 우수수수 등 가벼운 의태어, 의성어들이 깨알같은 글씨로 꼬리에 꼬리를 물듯 박혀 문자로 된 산수풍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유쾌하고 재치있다. 그의 화면에서 의미로써의 풍경은 불협화음이고 존재하지 않는다. 무거운 풍경 안에 낯설은 가벼운 문자들이 서로 충돌하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습화된 고정관념을 해체시키고 흐트려 버린다. 또한, 이와는 완전히 다를법한 시리즈는 찬란한 빛깔의 알루미늄 위에 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콕콕콕, 마치 리듬감이 실린 듯한 자동기술적으로 명랑한 점을 찍어내듯 이루어진 풍경은 때론 문자로 읽혀 위트있는 문장이 되기도 하고, 상상력이 충만한 부유하는 낯선 풍경이 되기도 한다. 그의 그리기이자 글쓰기는 점들과 문자들이 화면을 떠다니며 즐기는 유희(遊戱)의 풍경이다. 발랄하지만 진득하게 밀고 당기는 과정이 담긴 그의 쓰기로써의 그리기는 관념적 태도에 대한 유쾌한 반전을 보이며 매체를 새롭게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 한영욱은 인물을 그린다. 인물은 얼굴로 집중돼 표현되고, 얼굴은 눈빛과 살들 사이의 주름으로 거의 모든 것을 말한다. 그가 하는 작업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가장 온전하고 밀도 있게 잡아내며 표현을 극대화시키는 뜨거운 표현주의 영역에서 볼 수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얼굴에서는 미세하면서 강렬한 선들이 빛나고, 낯선 얼굴은 뚫어지게 당신을 응시하며 이 순간의 만남을 각인시키고 있다. 캔버스가 아닌 매끄럽고 차가운 알루미늄 위를 니들에 집중시켜 숨막히게 긁어내며 때론 진하게, 때론 섬세하게 부유하는 선(線)들은 만나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평면이지만 이런 방식은 그의 회화에 입체감을 주고 날카롭게 긁힌 선들은 빛을 받아 조화되어 그 존재감을 살려낸다. 집중하고 절제하며 무수하게 긁어내는 과정은 그에게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끊임없이 탐구하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살아온 삶과 세월의 흔적이 담긴 얼굴은 개인의 역사를 드러내는데 한영욱은 그 재현에 그치지 않고 그 삶에 자신의 삶을 살포시 얹으며(or 얹어가며) 자신이 발견하고자 하던 이상을 향해간다. 날카로운 선들은 주름에 집중된다. 미세한 주름 하나가 사람의 이미지와 인상에 결정적인 차이를 제공한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개개의 존재는 작은 주름 하나와, 그 작은 눈빛 하나를 통해 존재가 살아나고 의미를 얻는다.
프랑스에서 거주하며 작업 활동을 하고 있는 변연미는「검은 숲(Forêt noire)」연작이란 일관된 주제 아래 대자연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선(線)' 그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그녀의 그리기와 긋기는 집중적이고도 집요하게 표현적이다. 유려(流麗)하기보다는 거침없이 쏟아지는 무수한 선들로 짙고 깊어져 숲이 된 선들은 (화면 밖 공간으로) 울려 퍼지며 자연에 대한 경이와 숭고의 감정을 만나게 한다. '검은 숲'의 검다는 것은 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곧 그 깊이로 통함을 느낄 수가 있다. 그에게 선을 긋는다는 것은 자신 안의 길(道)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 깊이로 몰입해 들어가고자 하는 방편일지 모른다. 좀 더 존재감 있게 와 닿는 숲의 표현을 위해 작가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잠자듯 침묵하던 숲은 장갑을 끼고 커피 찌기와 고운 모래, 먹 등을 물감과 함께 섞어 뿌리고 바르는 행위를 통해 품고 있는 생명이 곧 깨어날 듯 깊숙한 곳으로부터 울고 있는 듯하다. 대기를 향해 치솟는 가지와 가지 사이, 잎과 잎들 사이에서 섬세하게 빛나는 생명의 진득한 울림이 그 숲을 지금 진동시킨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그 숲을 향해 들어서면 우리는 만나야 할 길(道)을 그 깊은 숲을 통해 발견할지도 모른다. 변연미의 선과 그리기가 침묵하는 수행자의 행위를 닮아 있다면 함명수의 그리기는 회화란 매체의 본질적인 작용과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함명수는 회화의 재현을 넘어, 그린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와 작용을 모색하는 과정을 진지하게 사유한다. 도시풍경(Cityscape)은 주변의 익숙한 동네나 골목, 옥상 풍경에서 거대한 도시로 나가지만, 그 표현은 생경하면서 마치 오색찬란한 꿈속에서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처음에 한 겹이던 풍경 위로 다시 한 겹이, 또 다시 한 겹이 아주 가는 붓길을 따라 무수히 겹에 겹으로 꿈틀거리며 올라간다. 물감의 흘림이나 터치들을 다시 그리며 그 사이의 차이와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그가 쌓아놓은 도시풍경은 결코 재현으로서의 풍경이 될 수 없다. 뜨거운 붓길을 따라 길을 만들며 풍경 전체는 유기적으로 역동하는 생명력을 담고 움직이고 있다. 그 안에서 부딪히는 색과 빛은 다채롭게 얽혀져, 회색도시를 그가 동경하는 눈부신 계절이 담긴 자연의 빛으로 담아낸다.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색채, 봄의 새싹 돋는 느낌, 가을의 풍부한 색감 등을 좋아하는 작가는, 비록 형태는 도시이지만 자연의 계절을 느낄 수 있도록 작업한다. 앞에서 천천히 그의 도시 안으로, 그의 풍경 안으로 몰입해 들어가면 가는 선들이 리듬을 타고 흔들대며 세상의 풍경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끌어준다.
신미경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 중국과 한국의 전통 도자 등 감상자에게 친근할 수 있는 '원본'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원본과 작가에 의해 탄생된 '새로운-번역된- 원본' 사이에 호기심과 의문이 자연스레 발생되어 창의적 틈을 생산해 내는 힘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원본은 작가의 번역(Translation)을 통해 '새로운 원본'으로 탄생하여 우리 시대에 가능한 다층적 코드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며, 감상자로 하여금 시각적, 촉각적, 그리고 후각적으로 뇌리에서도 다시 번역을 시도하며 소통해 간다. 작품의 주재료인 비누는 고정된 형태를 지니고 있어 항상(恒常)할 것 같지만, 그 물성이 담고 있는 물질의 이면은 작품의 주요 개념과 함께 동시에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기록에 의한(-문자적 기록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의한 기록까지 포함-) 문화와 역사는 쉬이 변하지 않는다는, 어쩌면 불변한다는 인식을 우리는 고정관념처럼 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신미경의 작품에서 비누의 물성을 재해석하며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와 의문을 제기해 준다. 문화와 역사의 원본들을 동시대로 들여와 비누로 재현해 낸다는 것. 건드리지 않고 손에 닿지 않고 그대로 두면 고대 유물처럼 고정된 이미지의 기록으로 영원하고 불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비누 그 안에는 세상의 이치처럼 고정불변의 항상(恒常)하는 존재는 결코 없다는 것을 인식시킨다. 이것은 물성이 갖는 소모적이고 마모적인 속성이 아닌, 확장시켜 본다면 늘 친근하게 대하고 실용적인 그 물질에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필멸의 속성을 마주해야하는 인식을 상기시킨다. 아직 녹아내리지 않고, 아직 사라져버리지 않았지만 인연가합(因緣加合)에 의해-사용도에 따른 손과의 만남, 비와 바람 등 신미경은 외부에 조각상을 설치하며 날씨의 변화에 따른 마모를 보았듯- 곧 아픔이 되고 멸(滅)이 될 필연성을 직면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특별할 수 없고, 아주 희귀할 수 없는, 물질적 가치조차 높지도 않은, 그저 누구나가 사용하고 있는 비누를 통해서이지만 그로 인해 펼쳐지는 경험의 세계는 아주 특별한 인식을 삶에서도 가능케 한다. 비누를 통해 복제된 문화적 유물들은 존재하는 것들의 생멸의 사유를 가능케 할 코드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신미경의 작업은 도자의 장인정신을 온전히 담아내는 과정에서의 절차탁마를 상기시킬 수 있으며, 우리 시대의 순수미술에서 물성(비누)의 경계를 극복한 경우로 본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물성의 극복 차원이 아니라, 물성을 매개로 시대와 역사를 넘어서 세상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이치를 사유할 수 있는 틈을 생산한다.
저것은 무엇인가, 저 낯설고 당혹스러운 어떤 웅얼거림을 울리는 저 검고 어두운 것은 무엇인가. 알아차리기 힘든 대상을 만났을 때 우리는 긴장하고 거부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단정하며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 심승욱의 작품에 드러나는 것은 저 보이는 낯설음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긴장과 불안을 통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에너지와 욕구를 끄집어낸다. 살면서 대개는 낯선 대상과 상황을 불안해하며 경계하고, 적응된 익숙함을 원하고 즐긴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저 깊게 감추어진 내면에의 긍정적 에너지를 끄집어내어 생을 작동시키는 힘의 의지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심승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둡고 낯설음을 등장시키고 이를 통해 깊은 심부 어딘가를 건드려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그의 작업과 감상자가 소통할 수 있는 접점일 것이다. 여기서 빨려 들어가 그 지점을 만나기 위해 깊이의 문제가 발생한다. 심승욱은 깊이를 위해 조각의 구조를 드로잉을 통해 완성한다. 그는 몰드를 통해 동일 패턴을 찍어 중첩시키는 것은, 드로잉을 통한 수작업을 통해 중첩시켰을 때하고 깊이의 차이가 분명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번 새로운 변화와 다양성이 끊임없이 발생 가능한 수고스러운 핸드드로잉을 고수하는 이유이다. 일종의 어두움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검은색을 통해 집중을 높이고 몰입을 가능하게 하며 우리 내면에 깊은 곳에서 존재하지만, 떠오르고 있지 못하는 자기 생의 의지를 끌어올리는 작업이 그의 검은 중력 시리즈에 녹아 있다고 본다. 어두움, 그 안에는 가장 강하게 빛나는 밝음을 감추고 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여주고자 하며 그것이 한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넘어설 수 있는 도전이 되는 작업이 심승욱의「검은 중력(Black Gravity)」이다. 깊이 들여다보고, 느끼고, 믿어라. Amor Fati.
침묵의 숲에서 나를 만나다. ● 정광식은 가장 단단한 돌인 오석(烏石)을 그라인더로 수없이 깎고 갈아내어 가장 유연한 자연의 풍경으로 담아낸다. 숲의 풍경, 그곳에서는 잠시 바람도 잠을 자고, 새들도 제집으로 돌아가며 시간은 멈추어 있다. 그 앞에 서면 마치 깊고 고요한 침묵의 숲에 들어와 홀로 스스로를 대면하고 있는 시간을 만나는 것 같다. 그의 풍경은 어떻게 보면 꿈틀대는 흙의 기운이 살아나 봄날의 새싹을 세상 밖으로 밀어 올려내며 생동적인 대자연의 근원의 시간을 보여 주는 듯 하다. 가장 작은 생명 안에도 우주의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그 순간을 크게 포착해 확대시켜 보여주는 장면이 그의 부조 조각 안에 들어 있다. 그가 쪼고 갈아서 세운 나무와 나무 사이, 숲의 안과 밖의 풍경 속에서는 원석이 가지고 있던 검은색 표현이 거의 살아 있다. 가끔씩 숲이 된 풍경을 스쳐 지나가다 보면 반사되는 빛나는 표면을 통해 자신의 움직임이 보인다. 작가는 연극의 무대와도 같은 숲의 풍경 속에서 관객들도 스스로를 바라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반짝이는 검은 면을 그대로 작품 속에 살려둔다. 스윽 지나가며 자신을 관조하는 시간이 담겨있다. 숲이나 도시나 물에 투영되는 자신을 바라보길 바라는 작은 소망이 그의 풍경조각에 담겨있다. ● 주변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꽃과 식물들이 화분을 떠나거나 뿌리 내리고 있는 흙을 떠나, 마치 채집된 식물표본의 형태로 등장한다. 구성수의 식물시리즈「포토제닉 드로잉(Photogenic Drawing)」은 사진사의 초기 사진술의 개념에서 응용하며 발전시킨 작업개념을 담고 있다. 회화, 조각, 사진이 결합된 독특한 사진드로잉 작업이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온전한 식물을 그대로 눌러 음각하고 패인 곳에 석고를 부어 양각화하는 조각적 과정을 먼저 거친다. 그 후 양각된 식물의 형태를 따라 드로잉하고 채색하는 회화적 과정이 수반되고 결과는 사진으로 완성된다. 사진이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간접적으로 담아내고 기록하는 작업이고 결국 어느 시점에서 한계에 부딪히는 필연이 있다면, 구성수의 사진드로잉은 모든 과정에 적극적으로 작가가 개입되어 창작된 새로운 형태의 사진작업을 시도함으로써 과정으로서의 매체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기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영역을 매체에 결합시키고 실험하는 새로운 형식의 도전이 그의 포토제닉 드로잉 시리즈에 담겨있다. 구성수의 사진 작업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실험이 박승훈의 사진에서는 또 다르게 나타난다.
박승훈은 자신이 여행한 세계 도처의 곳을-주로 문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간이다- 자신만의 고유 방식으로 기록한다.「이탈리아 여행일지(Travel Log: Italy)」에 등장하는 장소는 누군가에게도 여행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경험되어 익숙한 곳들이며, 여기서 감상자는 자신만의 추억과 의미를 새롭게 불러내 마주하게 된다. Textus(직물)라고 일컬어지는 작업은 text의 어원이 되는 말로써 씨줄과 날줄이 만나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기법을 보면 8×10인치의 필름이 아닌 16mm 영화필름을 사용해 씨줄과 날줄식으로 가로, 세로로 새롭게 필름판을 만든 후, 각각을 촬영해 필름을 직접 가로, 세로로 모자이크 형태로 엮어낸다. 옷감을 짜듯이 엮어내어 만들어내는 과정은 직접 필름을 손으로 만지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도 남겨지게 된다. 사진에서 필름은 드러나는 것이 아닌 가려지고 감추어지며 현상까지의 과정에 신비스럽게 존재하는 것인데, 박승훈의 사진 작업은 의도적으로 매체의 물성이 되는 필름을 오히려 과감하게 등장시키고 자신의 손에 지문이나 과정 중의 스크래치 등의 기록 행위 또한 드러내고 있다. 이런 모든 과정은 그의 사진 문맥에서 의미있게 엮이고 읽혀져 그의 작업 개념과 완성도를 확실하게 받쳐주고 있다. 두 작가는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고된 아날로그적인 과정을 중시하고 그 가치를 자신의 작업에 확실하게 부여하며 결코 가볍지 않게 자신만의 이미지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 조혜영
Vol.20120203b | 절차탁마切磋琢磨, 물성物性의 틈을 넘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