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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22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4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전은희의 회화-시간과 흔적과 부재를 머금고 있는 벽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벽에 난 미미한 얼룩이나 크랙에서 풍경을 보는데, 자연과 같은 전원풍경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그리고 심지어는 전쟁과 같은 인위적인 장면을 모두 벽에서 본다. 벽 자체에 내재된 이미지라기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심안과 혜안이 보아낸 이미지일 것이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보아낸 직관적 이미지일 것이다. ● 이처럼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가시적인 풍경들이 있다. 벽이 그렇다. 말라붙은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벽이나 낡고 해진 벽을 보고 있으면 저만한 그림도 없지 싶다. 벽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벽 위에 그려진 그림은 바람이 그린 것이고 비가 그린 것이고 시간이 그린 것이고 풍화가 그린 것이다. 이처럼 자연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이 그린 그림 이상으로, 사람이 만든 벽이 오랜 시간 자연에 노출되면서 점차 자연에 동화돼가는 느린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이 만든 벽과 자연 사이에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은 자연에 완전히 동화될 때까지(그래서 흔적도 자취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벽을 만든 사람의 흔적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림 자체는 자연이 그린 것이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암시되는 것은 자연의 속성이 아닌 사람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흔적을 캐내고 냄새 맡기 위해선 약간의 우울한 기질(혹은 연민?)이 필요하다. 존재보다는 존재가 암시하는 부재(그 끝이 순수한 무에 닿아있는)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부재를 그리워하는 절실한 마음(아니면 최소한 알 수 없는 끌림이라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은희는 벽을 그린다. 처음에 작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은 나와 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경계다. 그 경계 안쪽에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고 고립돼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벽에 작은 창문을 냈고, 그 창문을 통해 너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불통의 벽이 소통의 벽이 된 것이며, 나에게로 닫혀있던 경계가 너에게로 통하는 네트워크로 확장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너와 연결될 수가 있었다. ● 하지만 이처럼 나는 너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네가 그리고 너는 내가 될 수는 없으므로 이때의 소통은 불완전한 소통일 수밖에 없다. 너를 전제로 한 대화가 아닌, 너를 소외시킨 독백의 형태로서만 겨우 소통할 수가 있을 뿐이다(독백도 소통의 한 형식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언젠가는 너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벽은 견고했고, 창문이 위안이 될 수는 없었다. 창문은 마치 세상을 향한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지만 그럴수록 현대인으로 하여금 익명 뒤에 숨고 자기 속에 숨게 만드는, 그래서 오히려 더 자기소외를 심화시킬 뿐인 윈도의 메타포 같다. 소셜네트워크는 다만 인간관계를 표면적으로만 피상적으로만 확장시켜줄 뿐이다. 타자를 전제하지 않은 주체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향한 윤리적 공감에 대한 레비나스의 전언에도 불구하고 그 공감이 나와 너 사이의 비가시적인 벽을 허물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벽은 실존적 조건이며 자의식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벽에서 꽉 막힌 고집을 보았고, 타협할 수 없는(처음부터 타협의 대상이 아닌) 자의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가능성은 다른 곳(이를테면 상징적 의미가 아닌 실존적 의미)에서 찾아질 터였고, 따라서 작가는 그 다른 곳을 찾아 헤맨다. ● 도시에는 변두리가 있고, 변두리는 도심에도 있다(달동네). 그곳에는 도시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사물들이 모여 산다. 그렇게 모여 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도 떠나고 사물도 떠난다. 그리고 미처 떠나지 못한 사물들은 사람들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흔적과 함께 버려진다. 그렇게 재개발건축 현장에는 원주민들이 버리고 간 집터며 담장 그리고 사물들이 어우러져 부재의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재하는 풍경을 자연이 접수하면서 또 다른 존재의 풍경을 만든다. 그래서 그곳은 무슨 부재와 존재 사이의 풍경 같다. 자기를 아로새기려는 흔적의 고집과 그 흔적을 몰아내려는 자연과의 분투로 치열한 풍경 같다. ● 그 풍경 속에 서면 삶의 흔적들이 무슨 혼령이나 망령들처럼 우르르 몰려온다. 그렇게 나는 타자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타자의 삶을 엿볼 수가 있다. 그렇게 만나지는 타자(엄밀하게는 타자의 흔적)는 사실은 익명이지만, 왠지 익명 같지가 않고 살갑게 다가온다. 그가 가꾸던 텃밭이며, 세숫물로 씻어 내렸을 계단, 한때는 희고 알록달록한 빨래들로 치렁치렁했을 빨랫줄, 볕이 잘 드는 담장 밑에 앉아 햇볕을 쪼였을 의자며, 칼바람을 조금이나마 막아낼 요량으로 쪽 창문에 덧댄 합판조각 사이로 그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의 채취가 냄새 맡아질 것만 같다. ● 그렇게 작가는 상징적 의미가 아닌 실존적 의미(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며 일)를 매개로 비로소 타자와 만나질 수가 있었고, 타자와 소통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 타자의 삶(혹은 살?)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타자의 삶에 내 삶이 겹쳐진다는 것, 그리고 그로부터 나를 발견한다는 것, 그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수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 모두가 작가 속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와 작가의 인격의 일부가 될 수가 있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며,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 작가는 시종 벽을 그렸다. 그림 스타일로 볼 때 결코 다작이 가능하거나 용이한 경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꽤나 많은 벽들을 그렸다. 하도 많은 벽들을 그리다보니 하나같이 벽다움이 오롯해지는 경지에 이른 것 같다. 그 벽들은 심지어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다. 그렇다고 무슨 극사실 회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 사실적이라는 말은 시간과 흔적과 부재가 무슨 상징적인 기호처럼 그림의 표면 위를 겉도는(그래서 끼워 맞추는) 식이 아니라, 벽 속에 스며들고 아로새겨져 마침내는 벽의 일부가 된(벽에 무슨 실존 같은 것이 있다면, 벽의 실존이 된) 차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 벽의 질감(그 자체 타자의 삶의 질감이며 흔적의 질감이기도 한)은 직관적으로 일순간에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몇 번이고 거듭되는 덧칠을 통해서 종이 밑바닥에서부터 배어나오는 질감인 것이며, 그 자체가 타자의 삶의 질감이 작가 자신의 삶의 질감이 될 때까지 반복 덧칠해가는 동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벽을 통해서 타자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갈 수가 있었고, 타자가 될 수가 있었다.
이역만리를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 시인 백석은 아마도 만주의 한 여인숙에 든다. 그리고 그 허름한 방의 흰 바람벽을 스크린 삼아 「흰 바람벽이 있어」란 시를 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후략). 꼭 그렇지는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벽은 대개 쓸쓸한, 외로운, 가난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 된 캔버스며 스크린이다. 세상에서 의지가지없는(혹은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상상력으로 지은 지상의 처소다. ● 현대는 벽이 없는 시대다(밀란 쿤데라는 비극이 없는 시대라고 했다). 세상 끝까지 열려있는, 그래서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시대다. 모든 것은 명명백백해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숨길 수 있고 숨을 수 있는 벽이 그리운 시대다. 작가는 그렇게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 아니라, 서로에게 스며드는 벽을, 서로의 가림막이며 몸이 되어주는 벽을 그리고 있었다 ■ 고충환
Vol.20111221d | 전은희展 / JUNEUNHEE / 田銀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