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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214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공휴일_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진선 GALLERY JINSU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61번지 Tel. +82.2.723.3340 www.jinsunart.com
점과 점 사이를 유목하는 선 ● 김명진의 작품은 주로 꼴라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린 것처럼 정교하다. 그것은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이어간 붓 질 같다. 여러 가지 색과 무늬가 새겨진 가느다란 한지 끈은 붓에서 나온 하나의 선처럼 화면 위에 흐름을 남긴다. 그 흐름의 흔적은 유기적이지만, 붓에서 직접 나온 선이 아니기에 단절과 간극이 있다. 물감 대신에 준비된 것들은 다양한 길이와 폭, 색의 농도로 이루어진 한지 띠이다. 정확히 언제 만들어진지 기억할 수도 없는 이 재료들은 여러 상자 속에서 서로 섞여 그때그때의 맥락에 맞게 선택된다. 거기에는 하나의 붓에서 나온 듯한, 또는 하나의 씨앗에서 발생한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작품은 꼴라주 뿐 아니라 수없이 뜯어내고 나이프로 긁어내고 덧붙이는 과정이 있으며, 그것은 수정 없이 '일필휘지'로 만들어지는 통상적인 동양화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tansplant'라는 전시부제는 자연스러운 발생과 성장이 아닌, 이식이나 이접(離接)의 의미가 강하다. 김명진에게 이식은 우선 어디에선가 비롯된 얇은 것을 또 다른 곳에 정교하게 붙인다는 방법론에서 온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정원 가꾸기나 수술 후의 치유과정처럼 자연과 인공의 합작품이다. 작품은 작가에서 시작되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반대로 어디서 시작 된지 모르지만 작가의 손에 의해 완성된다. 「land-eascpe」라는 작품 제목 역시 대지와 혼연일체가 된 자연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의 탈주와 변형이 있다. 김명진의 작품에서 이러한 탈주와 변형은 자연과 이물적인 그 무엇을 자연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된 과정을 더 가속화시키는 한 술 더 뜨기 전략을 구사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생명은 본래 이질적인 것을 끝없이 받아들이고 동화하며 변형시키면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한지 끈 꼴라주에는 시간의 흐름이 내재해 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정된 것은 자연화 된다. ● 이식이라는 주제는 2000년에 있었던 첫 개인전 때부터 지속된 것이며, 이후의 전시는 이식의 내포적 의미를 심화하고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그에게 이식이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 포함한다. 얼핏 보면 피고 지는 식물 이미지 같지만, 식물도 동물도 아닌 혼성적인 풍경이다. 혼성체는 칡넝쿨이 얽힌 것처럼 하나로 떼어내기 힘들다. 작품은 하나의 기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원을 가진 것들이 분화와 퇴화를 거듭하며 얽혀드는 장(場)이다. 노랑 치자물을 들인 바탕은 붉은 식물 이미지와 대조된다. 바탕 역시 칠해진 것이 아니라, 물을 들인 것이기에 형상을 그리는 한지 꼴라주처럼 그 효과를 완전히 예측하기 힘들다. 불확정적인 것들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바닥으로부터 배어나온 얼룩에 위로부터 부가된 얼룩이 만나서, 미지의 대륙과 바다를 나타내는 지도가 된다. 작품 「land-escape701102」은 연한 노랑바탕 위에 여러 겹으로 출렁이며 변신 중인 식물 이미지가 조응한다.
자연에는 붉은 꽃도 있고 단풍도 있으며 아주 어린 새순은 붉은 기운도 돌지만, 김명진의 작품에서 식물 이미지에 동물성 느낌을 부여하는 것을 붉은 색조의 선이다. 그것은 광합성을 하는 식물 고유색과 대조를 이룬다. 작품마다 양 색조의 비중과 역할은 다르다. 화면 중앙에 알 같은 형태와 그것을 감싸거나 그것으로부터 자라나는 식물 이미지가 있는 작품 「land-escape801102」는 발생의 이미지가 있다. 끈으로 만들어진 이 소우주는 돌돌 말려지거나 펼쳐지면서 대우주를 반향 한다. 덩굴처럼 얽힌 선과 얼룩 사이로 얼굴 이미지가 서서히 드러나는 작품도 있다. 작품 「untitled」은 퀭한 눈동자를 가진 얼굴이 보인다. 왼쪽에 머리카락인 듯한, 뇌의 풍경인 듯 변신 중인 선의 흐름이 얼굴을 이루는 희미하고 창백한 판에 미세한 파장을 일으키며 표정을 만든다. 작품 「rise」는 얼굴 실루엣이 보다 분명하다. 한쪽 눈이 파열되고 있으며, 그쪽 부분에서 뻗쳐 나오는 식물 이미지는 동물 혈관계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숲을 이루는 머리칼은 생각의 흐름이 뻗쳐오르는 형태이다. 외적인 시선은 맹목적이 된다. ● 작품 「red garden」에는 나무 위에 앉아있는 듯한 두 다리도 보인다. 몸의 일부는 자연의 일부와 두서없이 붙어있다. 작품 속 신체 이미지는 화면과 붙어있는 작가 자신의 초상 같기도 하다. 그 모두는 자연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고정된 자연의 외면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자연적 과정을 더욱 닮은 그의 작품에서 전체를 총괄하는 시점이나 의도는 없다. 스케치도 없이 시작한 그림은 그때그때 펼쳐진 화면과의 대화에 충실할 뿐이다. 그는 작품 속에 깊이 들어가고 길을 잃고 겨우 빠져 나오곤 한다. 작가는 언제 끝날지 모를 과정 속에서 '이 쯤 되면 완성이다'라고 결정할 여력밖에 남아 있지 않다. 다행인 것은 그 막연한 허우적거림 속에서 완성된 작품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이 작업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열이다. 사실 명확한 결과물을 예측 할 수 있다면 애써 작업이라는 것을 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단지 생산이나 노동에 불과하다. 반면 그의 작업은 끝없는 소모의 과정이다.
김명진의 작품에서 자연이라는 자못 견고해 보이는 실체는 과정이 된다. 그것은 자연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 갈 뿐이다. 하인리히 롬바흐는 「살아있는 구조」에서 고대와 중세를 아우르는 시기 전체를 특징짓는 실체라는 말과 그 사상은 씨앗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씨앗을 근본적으로 존속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 근본적인 존속자는 식물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다른 모습들을 취하지만, 결국 다시 근본형상으로 되돌아온다. 이 근본 경험으로부터 고대인들은 모든 단계들을 거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것으로 유지되는, 스스로는 아직 형상이 없는 가장 내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본질들과 성질들과 외적인 현상들의 어우러짐으로부터 질서정연한 코스모스가 생긴다고 보았다. 오직 본질만이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개체는 단순히 시간적인 현상으로서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법칙이 인간에게도 적용되었다. ● 그러나 대상이 아니라 과정에 방점이 찍힌 김명진의 작품에서 실체적 사고는 와해된다. 김명진의 작품에서 과정은 연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르기와 결합하기라는 그의 방식은 오히려 실체를 대신하여 들어선 체계나 구조와 관련 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자르기와 결합'이라는 두 가지 조작은 엄밀한 규칙을 사용하여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나타나도록 한다. 명백한 외적 증명에 의존하는 '사실'과 달리, 예술은 자기가 만든 것을 야기한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시대상의 불가능성들이 담론의 가능성들로 바뀐다. 자유롭게 꾸며내는 과정을 통해, 예술작품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형식이 된다. 한지 끈으로 된 망을 엮어가는 김명진의 작품은 자연적 대상의 재현이나 자동 기술 같은 내면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이 시작되는 시점은 불분명하다. 자연으로부터도 자아로부터도 시작되지 않는다. 원초적인 것은 불완전하며 그것을 대신하는 보충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작품(work)이기보다는 다양한 기원이 얽혀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는 하나의 의미를 향해 집중되기 보다는 그 바깥으로 탈주하며 무형의 성좌를 이룬다. 그것들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계 안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공간을 생성한다. 꼴라주라는 방법론은 이러한 끝없는 생성에서 불연속을 도입한다. 이러한 불연속에서 형태의 변형이 야기된다. 변형은 대재난과도 같은 파국 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김명진의 작품은 구성요소들의 이질성이 두드러진다. 명백한 의도와 방향, 목적이 없이 흐르는 선들은 수목의 모델이 아니라, 리좀의 모델과 관련된다. 펠릭스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이 전제하는 수목의 모델은 한 점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에 의해 진행한다고 본다. 반면 리좀의 모델은 임의의 한 점을 임의의 다른 한 점과 연결할 수 있다. 수목모델은 책(사본)을 리좀모델은 지도를 만든다. 리좀의 최종적 성격으로서의 지도는 해체, 연결, 역전 가능하며, 끊임없이 개조할 수 있다. ● 물론 리좀 내부에 수목구조가 실존할 수 있다. 반대로 수목이 가지는 리좀 형태 아래서 발아할 수 있다. 가타리에 의하면 수목모델은 어떤 체계의 생성능력을 논리와 수학적 공리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리좀의 모델은 한 언어 또는 한 방언의 생성적 제약들은 항상 권력 구성체의 실존과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수목 모델은 대수학적인 또는 기하학적인 변형방식 같은 양식으로 본다. 그것은 심층조직을 보존하면서 자신의 형태를 수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좀은 심층이 아니라, 표면, 무한히 확장되는 표면의 모델이다. 가타리는 들뢰즈와 함께 쓴 『천개의 고원』에서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 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한다. 리좀은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구조는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 사이의 이항관계들과 이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그것은 떨어진 점들 간의 관계 보다는 오히려 인접한 점들의 접합 접속이나 묶음을 통해 작동한다. 이 경우에는 회상보다는 환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선은 재현기능을 잃어버렸으며 어떤 형태를 둘러싸는 모든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김명진의 선은 점에서 점이 아니라 그 사이로 지나가며 방향을 부단히 바꾸며 변이하는 선, 즉 비재현적인 선이다. 이 '유목민적인 선'은 유기적 형태의 운동과 기관들의 한정을 벗어난다. 이번 전시에서 재현적 요소가 강한 유일한 작품 「horsemanⅡ」이 말을 탄 유목민 같은 모습인 것도 우연이 아닐 듯싶다. 유기적 재현으로부터 멀어지는 선은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고, 어떠한 형태도 제한하지 않고 계속 방향을 바꾸는 선', 즉 '다방향적이며 안과 바깥도, 형태나 배경도 갖지 않은 이 선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으며 아무런 윤곽도 그리지 않으며, 얼룩과 점들 사이를 통과해 매끈한 공간을 채우며, 시각적 질료를 뒤섞고 있을 뿐'(들뢰즈와 가타리)이다. ● 『천개의 고원』은 펠트의 비유를 든다. 여기에서 펠트는 직물과 비교된다. 저자들에 의하면 펠트는 반(反)직물이다. 직물이 수직수평의 축을 따라 하나하나 짜나가는 노동이라면, 펠트는 압축에 의해 얻어지는 섬유의 얽힘만이 있을 뿐이다. 김명진의 한지 꼴라주 작품은 펠트의 방식과 유사하게 짜여 진다. 가령 작품 「land-eascape601102」에서는 얽혀서 하나의 평면으로 압착된 붉은 선의 흐름만이 가득하다. 직물과 달리 펠트는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어 한계를 갖지 않는다. 앞면과 뒷면도 또 중심도 갖지 않으며, 고정된 것과 유동적인 것의 구별도 없다. 그것은 유기체나 조직이 아니라, 기관 없는 몸체를 만든다. 김명진의 작품에서 몸은 자연적 요소와 다양하게 접속되어 있다. 여기에서 입구와 출구, 이접과 배치의 방식은 무한하다.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요소들과 재료들은 조직화나 분화가 아니라 탈주한다. 그것은 탈 영토화한 기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재현주의는 강렬한 상호관련성으로 해체된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나무와는 달리, 리좀은 복제대상이 아니다. 리좀은 일종의 반(反)계보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反)기억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꺽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 집중화 되어 있는 체계와는 달리, 리좀은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이다. 나무는 혈통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관계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백지 상태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 뿌리지 말고 꺽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라고 제안한다. 김명진의 '이식'은 이러한 리좀적 사고에 기반 하여 유기적 사고나 재현주의에 내재된 계보적인 것을 해체하고, 연결 접속을 늘려 나간다. 이러한 배치물과 흔적들은 '다양체로서의 유기체'의 진면목이다. ■ 이선영
Vol.20111214k | 김명진展 / KIMMYUNGJIN / 金明辰 / painting